39화
정민혁과 박승기는 기계 정령, 에코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흥시에서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종결된 후,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건, 박승기였다.
“변이체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데 얼마가 필요한지 알고 있나?”
전에 최유미와 강순철의 일을 보며, 정민혁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고, 물은 적이 있었다. 변이체를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여부와,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가 필요하냐고.
그리고 그때 시스템의 대답이···
“10만 기프트 아닙니까.”
10만 기프트였다.
10만 기프트. 그룹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지금의 그에게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거금. 이진서는 방금, 그런 거금을 소모해 변이체를 인간으로 되돌린 것이다.
“어때, 자네라면 10만 기프트를 써서 사람을 살리겠는가?”
정민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진서 형님이나 혜연이라면 모를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살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그게 일반적이지. 하지만 우리 리더는··· 그걸 했지. 아마 깊게 생각하고 저지른 일은 아닐 거야.”
“······”
무조건 이진서의 편을 들고 보는 ‘진서빠’ 정민혁도 이번에는 입을 꾹 닫았다. 뭐, 10만 기프트로 사람을 살려? 만약 이진서만 아니었다면 호구 새끼라고 부르며 비웃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엄청난 선행이지. 하지만 이런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리더를 맡고 있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룹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네. 올바른 쪽으로든, 혹은···”
술잔에 담긴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켠 그는 말을 이었다.
“나쁜 쪽으로든 말일세.”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내 사촌 동생 년을 보게. 물에 빠진 년 살려놨더니, 오히려 보따리 달라고 하고 있는 격이야. 물론 워낙 개념 없이 자란 년이라서 그런 건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하다고, 우리 그룹에 그런 사람이 또 나오지 말란 보장은 없겠지.”
인간에 대한 지독한 환멸(幻滅). 한때 박승기가 경험했던 그것을 리더 자리에 오른 정민혁도 경험하고 있었다. 고작 몇 주. 그는 인간이 그리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런 사람이 또 나오지 말란 보장이 없다고? 아니, 틀림없이 나올 거다. 지금껏 무상으로 기프트를 공급한 은인이라 하더라도, 언제든 칼을 내밀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아니, ‘칼을 내밀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정민혁은 성악설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 저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좋네. 하지만 리더의 행동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야. 리더는 바뀌어야 하네. 조금 더 이기적이게.”
“아무리 의원님이라 하더라도, 형님을 바꾼다는 표현은 거슬립니다.”
정민혁이 잔을 들이킨다.
“그럼 저대로 내버려 둘 건가?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꼴은 못 보겠어. 자네가 못하겠다면, 나 혼자서라도 말하겠네.”
“······”
어차피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정민혁이 생각하기에도 박승기의 말은 일리가 있었으니까. 곧,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는 않았다.
***
[보유 기프트 : 1,476,546.5]
이번에 얻은 기프트에, 원래 있던 기프트를 합치니 147만 기프트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프트가 모였다. 나는 기프트를 모조리 능력치에 투자하기로 했다.
어차피 70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150만가량의 기프트라면 모든 능력치를 70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수치였다.
[기본 근력 능력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기본 체력 능력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기본 민첩 능력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기본 지력 능력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기본 행운 능력치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남은 기프트는?’
[보유 기프트 : 785,576.5]
그럼에도 아직까지 80만가량의 기프트가 남았다.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이제 기프트를 투자할 곳은 스킬과 장비.
‘간만에 카드깡이나 해볼까.’
70의 행운. 카드깡을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5,000기프트짜리 무작위 유일 등급 스킬 카드 57장을 구매했다. 이로써 남은 기프트는 딱 50만이 된 셈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57장의 분홍색 스킬 카드들. 하나하나 까는 맛이 손맛이 있긴 하지만, 하나하나 까기엔 너무 수가 많았다.
‘일괄 개봉해줘.’
스킬 카드들이 일제히 강렬한 빛을 낸다. 하지만 그 빛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주황색으로 빛나는 것은 그중 단 하나밖에 없었다. 28만 5천 기프트로, 전설 스킬 카드 한 장인가.
진리의 눈, 게비샤가 25만 기프트였으니 뭐, 아주 손해를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망감이 들었다. 신화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두 장 정도는 줄 줄 알았는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나는 갈락시아의 도서관에 손을 뻗었다.
[스킬 카드 - 갈락시아의 도서관(L)을 획득했습니다.]
‘도서관?’
도서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도서관 맞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스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내, 나는 정보를 살폈다.
<갈락시아의 도서관>
종류 : 액티브(Active)
등급 : 전설(Legendary)
설명 : 전설적인 대현자, 갈락시아의 도서관. 검술, 마법, 소환술, 정령술 등, 그야말로 없는 서적이 없다는 지식의 보고. 원하는 서적을 무제한으로 꺼내 열람할 수 있다. 원본이 아닌 레플리카(Replica)로 복사돼 나오기 때문에 꺼낸 서적을 훼손하거나,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원본이 소실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력을 사용해 도서관의 일부를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혹시 서적을 열람하는 걸로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 뭐 그런 의미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갈락시아의 도서관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게 될 것이다.
2,000명이 넘는 그룹원들이 단순히 서적을 열람하는 것만으로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면, 그 가치는 말도 안 되니까. 생각하면서 나는 스킬 카드를 아공간 창고에 넣었다.
당장 습득해서 써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 당장 제거할 만한 스킬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내 스킬 중 마땅히 버릴 스킬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여덟 번째 스킬 슬롯(1,000,000기프트)을 개방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는 남은 유일 스킬 카드 56장 중, 메모라이즈와 파이어 월을 대체할 만한 스킬을 찾을 수 있었다.
<성운의 가호>
종류 : 패시브(Passive), 액티브(Active)
등급 : 유일(Unique)
설명 : 성운의 가호를 받아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25%만큼 줄어든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필요 없는 스킬의 경우에는 위력이 25%만큼 상승한다. 사용 시,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한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필요 없는 스킬의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위력이 100%만큼 상승한다.(재사용 대기시간 : 48시간)
재사용 대기시간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스킬의 위력까지 올려주는 성운의 가호. 메모라이즈보다 범용성 면에서 좋다고 판단했다. 영령 빙의를 연속으로 사용할 일은 거의 없으니까.
<미티어 스트라이크>
종류 : 액티브(Active)
등급 : 유일(Unique)
설명 : 상공에서 소형 운석을 한 개 소환한다. 지면에 떨어진 운석은 지속적으로 불타오르며 주변에 피해를 입힌다. 운석의 크기와 위력, 지속 시간, 지속 피해는 사용자의 마력에 비례한다.
판타지 소설 속에서나 봤던 미티어 스트라이크.
무려 운석을 떨어트리는 스킬. 파이어 월을 대체하기에 ‘완벽한’ 스킬이었다. 파이어 월보다 파괴력이 훨씬 강력할 것이기에 주의해서 사용해야겠지만 말이다.
[성운의 가호(U)을 습득했습니다.]
[미티어 스트라이크(U)을 습득했습니다.]
[‘보라색 맛났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라색 맛났어>
등급 : 고급(Superior)
조건 : 유일 등급 스킬 3개 보유
보상 : 기프트 채굴량 +4.5%
‘남은 스킬 카드들은···’
스킬 합성이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스킬 합성 같은 기능은 없다. 버리기는 아까우니,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룹원들에게 분배할 생각이었다.
정민혁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정민혁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혼자가 아닌 박승기와 함께.
“이 시간에 둘이 함께 무슨 일입니까?”
“···형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승기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동조의 의미를 표했다.
“형님의 품성이 더없이 착하고, 고결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하지만 세상에는 형님처럼 착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변이체를 사람으로 되살린 것. 분명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그를 살리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그리고 정민혁은 그 일 때문에 나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번 일 때문에 그러는 거냐?”
정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는 딱 잘라 그들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다.”
사실 울고 있는 여자, 최미라- 돌아오는 길에 이름을 알게 됐다-를 보면서 전 여친이 떠올랐다. 내가 연병수를 인간으로 되돌린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물론 저택에서 130만가량이나 되는 기프트를 ‘공짜로’ 얻은 것도 주요했지만.
그러나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변덕이었다. 10만 기프트로 일반인을 되돌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룹원들에게 투자하는 편이 이 세계를 위해 낫다는 걸 나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뭐···”
“의원님도 그 말 하러 오신 겁니까? 에이, 제가 무슨 호구도 아니고.”
“···호구 아니었나?”
“······”
호구라··· 단어를 곱씹던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 예전에 그런 말을 많이 듣기도 했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지난 4년간, 나도 변했다. 대출 끌어모아서 투자했다가 거하게 말아먹었는데, 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더 말은 안 하겠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런 자네가 싫지 않고. 여기 있는 민혁이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네.”
“맞습니다, 형님.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형님이 벌이신 선행을 만천하에 공표··· 아, 장난입니다, 장난. 솔직히 저도 형님이 그런 사람이라서 마음에 듭니다.”
“호구라는 게? 뒤질래?”
“아, 형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 입단속은 시키는 편이 낫겠네.”
“예, 그건 의원님이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안면이 있으시기도 하고···”
“그래, 그러면··· 이왕이면 빨리 말하는 편이 낫겠지. 이만 내려가 보겠네.”
박승기는 자리를 떠났다. 정민혁이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형님, 제게 하실 말씀이···”
“아, 카드깡을 했는데, 카드가 좀 남아서 말이다.”
나는 정민혁에게 방금 뽑은 카드들을 넘겨줬다. 정민혁은 눈을 크게 떴지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호구 아니라고 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나는 그의 뒤통수를 마사지해주는 것으로, 화답해줬다.
“진짜 뒤질래? 어디서 형보고 호구야.”
“암튼 형님, 감사히 쓰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