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누군가에게는 길었던, 또 누군가에게는 짧았던 3일이 흘렀다. 예고했던 대로 최하급 변이체가 모두 하급 변이체로 변이됐다. 준비되지 않은 플레이어들에게는 재앙이 찾아왔다.
최하급 변이체를 사냥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갓 각성한 플레이어도, 마음만 굳게 먹는다면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하급 변이체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하급 변이체와는 차원이 다르다. 스스로를 강화하거나, 강력한 무기가 없는 이상, 사냥할 수 없다. 플레이어들에게 변이체란, 기프트를 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계의 수단.
최하급 변이체를 사냥하던 이들은, 더 생존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걸고 하급 변이체를 사냥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준비된 플레이어들에게는 기회였다.
하급 변이체는 최하급 변이체보다, 기프트를 5배 많이 준다. 즉, 하급 변이체나 최하급 변이체나 차이 없을 정도로 강해진 플레이어들에게는 기프트 수급량이 5배나 늘어나게 된 것이다.
흑인 남자- 제이드는 창을 앞으로 찌른다. 그의 창은 그에게 달려들던 하급 변이체 두 마리를 꿰뚫었다. 창에 꿰뚫린 채, 끄윽거리던 하급 변이체들이 먼지가 돼 사라졌다.
하지만 변이체는 두 마리가 끝이 아니었다. 세 마리, 네 마리··· 순식간에 단위가 두 자리로 바뀐다. 제이드는 뒷걸음질 치며 그들을 상대하다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가 보이자, 그는 가볍게 점프한다.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온 그는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는 변이체들을 향해 창을 들었다. 그의 창이 빛난다. 그가 습득한 고급 등급 스킬.
<파우스트의 창>
그는 바닥을 향해 힘껏 창을 던진다. 바닥에 꽂힌 창이 전격을 일으켰다. 감전된 변이체들이 몸을 떨어댔지만, 전격의 파도에서 헤어 나올 수는 없었다. 역겨운 냄새와 잿더미만이 남았다.
잠시 그가 자아낸 광경을 바라보던 제이드는 바리케이드 안쪽으로 내려왔다. 기관총을 든 채, 그를 엄호하고 있던 그의 동료들이 그에게 물었다.
“끝?”
“그래.”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쉬지 그래.”
“미안하지만 그럴 시간 없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9일 후면, 하급 변이체가 중급 변이체로 변한다는 것을.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도 살아남고, 그의 동료도 살아남는다. 그는 죽어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통신망은 마비됐지만, 그의 스마트폰은 위성 통신 기능을 탑재했다. 무려 1기프트라는 거금을 쏟아 투자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대리어스와.
- 제이드,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 아버지···
평소 냉철한 성격의 그였지만, 아버지와의 전화는 그의 마음을 뒤흔들 수밖에 없었다.
- 제이드, 조금만 버텨라. 방책은 내가 어떻게든 만들어보마.
‘방책을 어떻게 만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아버지는 허언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즉 정말로 무언가, 자신을, 자신들을 구원할 방책이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말대로, 버틴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다시 창을 들었다.
***
내게 코인을 추천해줬던 후배 놈이 좋아하던 게임이 있다. 일명 ‘방치형 게임’이라 불리는 것으로,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캐릭터가 알아서, 자동으로 사냥을 하는 게임이었다.
당시만 해도, 코인을 투자하기 전이라 나와 후배 놈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한 편에 속했다. 헤 입까지 벌린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녀석을 향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게 재미있냐?’
‘개꿀잼이야.’
‘그걸 뭔 재미로 하는데?’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본 것이었다. 직접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다마고치 보는 것처럼 지켜만 보고 있는데 저걸 무슨 재미로 한단 말인가? 그러자 후배 놈이 대답했다.
‘가만히 앉아도, 강해지고 돈도 벌리잖아?’
‘현실 돈이면 몰라도 게임 돈이잖아?’
‘형, 현실에서 못하니까 게임에서 이러고 있는 거지··· 그리고 회사에서는 이런 게임이 딱이라니까.’
‘그래? 나도 해볼까?’
물론 취향이 맞지 않아, 하루도 못 가서 그만뒀다.
세상에 랭킹이 오르려면 하루 종일 켜둬야 한다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 후배 놈의 대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란하게 불을 뿜어대는 32기의 센트리 건. 그리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기프트가 들어온다. 분명 반나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40만에 육박했던 기프트가 -30만이었다.
딱 반나절 만에 10만 기프트를 벌어들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잠만 잤는데도. 아직까지 빚쟁이 신세인 건 맞지만, 이 추세면 앞으로 한나절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자동 사냥 만세.’
속으로 쾌재를 지르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진혜연이 사람들에게 버프를 주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버프를 모두 준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열심이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나저나 오빠,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불로소득을 얻은 기분이거든.”
“불로소득?”
“일 안 하고 돈 번다, 이 말이야.”
진혜연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고막을 요란하게 뒤흔들 정도의 소음이 들려왔다. 퉁퉁퉁. 센트리 건의 기관포 소리다. 그것도 한 곳도 아니고 사방에서.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건물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저거··· 말하는 거죠?”
‘음···’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귀마개를 끼고 있어서 제대로 못 들었던 건가. 소음이 보통 큰 게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공사장 소음을 면전에서 듣고 있는 기분이랄까.
“아직 직접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지만··· 저게 언제까지 저럴까 궁금해 하는 분위기이긴 해요.”
“언제까지라···”
차마, 앞으로 줄곧 그럴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원룸 살 때, 층간 소음으로 고통받았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 사이, 정민혁이 올라와 물었다.
“형님,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방음벽을 구매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시스템에 방법을 물어볼까, 내심 고민하고 있던 나였다.
“쉘터 전체에 도배하는데 1,000기프트가 든다고 합니다. 그래도 모든 소음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지만 그 정도면 생활 소음 정도로 줄일 수 있다고 해서.”
“얼마 안 하네, 사자.”
“그 형님, 활동비가 떨어져서···”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는 정민혁의 모습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려다, 문득 내 잔고가 마이너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0만 기프트. 빚을 메워야, 그에게 활동비를 건넬 것 아닌가.
“아··· 미안한데, 한나절만 미루자. 지금 마이너스라서.”
뭐, 아까 말한 대로 한나절이면 금방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서울 전체를 마저 수색하고, 경기도로 영역을 뻗어나갈 생각이었다.
정민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조금 늦으셔도 괜찮습니다. 거주민들이 벌어들이는 기프트도 있고 하니까요.”
“거주민들?”
“뭐, 형님이 벌어들이는 것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전투 부대를 조직해, 도시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예, 행여나 변이체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형,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고.”
“예, 형님!”
존경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을 뒤로, 나는 지하 1층으로 내려왔다. L 주상 복합 센터 지하 1층은 공방이 됐다. 공방(工房). 대장장이의 그 공방 맞다.
김민수의 말인즉, 공방은 제작 스킬을 배가시켜준다고. 그 가격만 무려 9,500기프트.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성공작 ‘디아블로’를 본 나는 망설임 없이 투자를 결정했다.
내가 1층으로 내려갔을 때, 김민수는 강태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본 그들이 손을 흔들었다. 이내, 강태윤이 내게 다가왔다.
“형님, 발전소 설치를 마쳤습니다. 앞으로 형님이 안 계셔도, 일 년 정도는 넉넉하게 쉘터에 전기가 공급될 수 있을 겁니다.”
서울대 에너지 자원 공학과 수석 출신인 그는 자발적으로 쉘터에 효율적인 발전기를 설치하고 싶다고 요청해왔고, 나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전까지 시설에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똑똑한 놈이 더 나은 방안을 가져왔다는데, 굳이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민수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다 생각난 건데 말입니다, 형님.”
김민수를 바라보자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두 공돌이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김민수는 건축학과고, 강태윤은 에너지 자원 공학과이긴 하지만 서로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김민수도 서울대라고 했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강태윤에게 물었다.
“얘기해봐.”
“서울 시내에 화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비록 폐쇄되긴 했지만, 다시 가동할 수만 있으면 막대한 양의 전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막대한 양의 전력을 얻어서 어디다 쓰는데?”
“이 서울시 전체에 전기를 공급할 수만 있다면, 여러 가지 일이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망 연결이라든가.”
엉뚱하게도 이 이야기를 정민혁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SNS에 광적으로 미쳐있던 그. 다시 SNS를 할 수 있다면, 쾌재라도 지르지 않을까?
‘뭐, SNS를 다시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제는 사람 숫자가 적어졌지만 말이야.’
“확실히 인터넷이 다시 연결될 수만 있다면··· 플레이어를 탐색하는 데 효율적이겠네.”
“예. 우리 쉘터는 위성 통신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모든 플레이어가 위성 통신을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위성 통신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가볼게.”
강태윤이 뒤로 물러서고, 김민수가 앞으로 나섰다.
“리더, 디아블로 MK2를 완성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분명, 미사일에 의해 산산조각 나 버린 디아블로가 서 있었다. 생김새는 MK1과 별 차이 없지만 확실히, MK1보다 고성능이었다. 내구와 기능이 높아진 걸 보면 말이다.
[디아블로 MK2]
종류 : 탈것(Vehicle)
등급 : 희귀(Rare)
내구 : 150/150
기능 : 속도 Lv.4, 부스터 Lv.3, 쉴드 Lv.3, 오토 쉴드 Lv.3
“그리고 만들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입니다.”
“만들어보고 싶은 거?”
“예. 전차 같은 걸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구원교의 전차를 떠올렸다.
물론 그 전차는 국군이 사용하던 군용 전차를, 기프트로 개조한 것이었지만. 확실히 그런 전차가 있다면, 다수의 변이체를 효과적으로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제 로망이기도 하고··· 시간만 들인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 만들어보세요.”
“그런데, 활동비가··· 민혁이한테 물어보니까, 리더한테 직접 말하라고···”
“···예. 한나절만 기다리세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말하는 그에게 잿밥을 뿌리긴 싫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쉘터 바깥으로 나왔다.
“진서 씨, 새로운 레시피를 발견했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짐작이 간다.
“···이런 이유로 기프트가 필요해요.”
요컨대 체력과 마력을 영구히 증진시켜 주는 레시피를 발견했는데, 기프트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새로운 디아블로 MK2에 탑승한 채, 그대로 달아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