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동작구의 플레이어들도 무사히 구출을 마쳤다. 그 숫자는 고등학교에서 구출한 학생들과 한승주를 포함해 30명. 동작구의 인구가 40만이다. 그중에서 살아남은 이는 고작 30명.
물론 초기 숫자는 더 많았겠지. 시간이 한 달이나 지체돼서, 플레이어의 숫자가 더 줄어들었을 뿐. 다른 구의 상황도 동작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작구의 플레이어들과 함께 쉘터로 이동한 나는 정민혁에게 인수인계를 맡기고, 바로 관악구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1분 1초가 아까운 시점이었다.
관악구청에 임시 쉘터 설치를 마친 나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왔다. 눈발이 한층 더 거세졌고, 붉은 태양은 암막에 가려진 것처럼 그 빛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일식(日蝕)이다.
어둠으로 잠겨진 세상을 내려다보며, S31을 들었다.
- 예, 형님.
“준비됐냐?”
- 시작할까요?
“그래.”
뚝. 전화가 끊어진다.
나는 품속에서 귀마개를 꺼내 썼다. 지난 이주 간 나만 성장한 게 아니다. 내게 지급 받은 기프트나, 혹은 사냥해서 얻은 기프트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장했다.
내 앞에 금속 인형이 나타난다.
<기계 정령, 에코>
정민혁이 나를 서포트하기 위해 얻은 스킬, 기계 정령, 에코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정가 80,000기프트짜리 전설 등급 스킬. 하지만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기계 정령, 에코]
- 플레이어, 정민혁이 소환한 기계 정령.
[기계 정령, 에코가 S31의 성능을 증폭합니다.]
조용히 노래를 재생한다. Somebody love you~♬ 듣기 좋은 보컬의 목소리가 내 귀를 메운다. 소리를 95% 이상 줄여주는 귀마개를 착용했음에도 시끄럽다고 느껴질 정도.
어둠에 찬 도심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을 것이다. 눈 사이로 하나둘씩 변이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내가 가진 최강의 스킬, 영령 빙의로써.
[영령 빙의(L)를 사용합니다.]
[떠돌이 영령 ‘마도사, 벨루가’를 불러옵니다.]
관악구 인구가 50만이다. 그중 소수의 플레이어들을 제외하고, 변이체로 각성했다고 생각하면 대략 50만 마리의 변이체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는 방랑기사, 카론보다는 마도사, 벨루가가 적합했다.
‘다음번엔 다른 영령도 찾아봐야겠네.’
지금까진 그 둘만 사용했지만, 다음에는 다를 것이다.
[마력에 따라 동화율이 설정됩니다.]
[마력 84를 확인했습니다.]
[현재 동화율 100%]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 48시간]
[영령의 능력치와 스킬의 일부를 불러옵니다.]
[파이어 볼트(N)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파이어 볼(S)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레인 오브 파이어(R)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이프리트의 축복(U)를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피닉스 소환(U)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마도사, 벨루가와의 동화율이 100%에 도달하며, 새로운 스킬이 개방됐다. 피닉스 소환. 말 그대로 전설 속에나 나오는, 불사조를 소환하는 유일 등급 스킬이었다.
용케 건물에 올라온 상급 변이체 한 마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푸른색의 장벽에 가로막혀 튕겨 나가고 말았다. 앱솔루트 배리어가 아닌 기계 정령, 에코의 능력인 ‘장벽’이다.
장벽을 뚫고, 앱솔루트 배리어를 뚫고, 피해를 입힌다는 건 녀석에게는 도저히 무리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할 것이다. 녀석에게 관심을 끄고 하늘을 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피닉스.”
가려진 태양을 대신하듯, 붉은색 구체가 떠오른다. 구체는 점점 부풀어 오른다. 몸을 말고 있던 피닉스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마침내 그 자태를 드러냈다.
[피닉스]
- 플레이어, 이진서의 소환수.
캬아아아.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피닉스가 비행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이쪽을 향해 몰려들던 변이체들의 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 1초도 안 되는 시간이다.
설령 중급 변이체라 한들, 예외는 아니었다. 피닉스는 내 마력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프리트의 축복의 영향을 받는다. 녀석은 오히려 본신의 힘보다 강화된 상태다.
간신히 살아남은 변이체들도 혼란에 빠진 듯,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피닉스의 울음소리는 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니다. 아군에게는 희망을, 적에게는 공포를 선사하는 심판자.
시끄럽던 음악 소리는 어느새 화염 소리에 파묻혔다. 그때 내 눈에 피닉스에게 접근하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수백 미터 상공에 있는 피닉스에게 도약한 녀석.
평범한 도약력이 아니다. 상급 변이체의 도약력과 비교해도, 비교를 불허(不許)할 정도의 엄청난 도약력.
‘저건···’
[최상급 변이체]
- 플레이어를 살해하고 진화한 변이체.
- 상급 변이체일 때보다 모든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마비독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진화 형태에 최적화된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 최대 1,000마리의 변이체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
- 진화 조건 : 플레이어(Player) 1,000명 살해 시, 혹은 같은 최상급 변이체 10마리 포식 시, 아문(Amun)으로 진화.
- 보유 기프트 : 1,000
상급 변이체가 아니다. 최상급 변이체다.
최상급 변이체는 탄생하기가 쉽지 않다. 최하급 변이체에서 최상급 변이체가 되려면 플레이어 166명의 목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에서도 고작 둘 본 게 전부다.
바른 마음 교회에서 마주쳤던 여성형 최상급 변이체. 생김새부터가 녀석과는 다른 개체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잠자코 전투를 바라본다. 도약한 녀석은 피닉스를 물어뜯는다.
피닉스에게 데미지가 있을 리 만무하다. 화염은 흩어지기만 할 뿐, 꺼지지 않는다. 그러나 녀석은 전투 의지를 보여주듯, 온몸이 타들어 가면서도 계속 물어뜯었다.
피닉스가 귀찮은 듯 녀석을 떨쳐버렸고, 녀석은 그대로 추락했다. 나는 피닉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
- 감히 내게 명령이라니, 오만불손하구나.
아, 설명을 까먹었는데, 피닉스는 소환수 주제에 제법(?) 개긴다. 불의 최상급 정령답게 그 프라이드 하나만큼은 대단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게 해를 끼치진 않지만.
“해줘.”
- ······
새도 짜증 내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 인상을 구기던 피닉스는 그대로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녀석의 몸은 초고온의 화염으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있는 폭탄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강렬한 폭발과 함께 최상급 변이체가 있던 일대의 건물이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그 위에 있던 녀석이 어떻게 됐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겠지.
최상급 변이체를 처치하는 건 이번이 처음, 업적이 떠올랐다.
[‘퍼스트 무버 4’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퍼스트 무버 4>
등급 : 유일(Unique)
조건 : 플레이어 중 가장 먼저 최상급 변이체 처치.
보상 : 기프트 채굴량 +15%
퍼스트 무버 4 업적은, 기프트 채굴량을 무려 15%나 늘려줬다. 이로써 111%였던 채굴량이 126%로 늘었다. 나는 메시지들을 닫고, 주저앉은 건물을 바라봤다. 피닉스는 죽었다.
방금 녀석이 사용한 건 자폭이다. 하지만 불사조. 애초에 죽는다는 단어는 의미가 없다. 마력이 빨려들어 가는 느낌과 함께 화염 속에서 작은 구체가 떠오른다. 피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아까보다는 1/2도 안 되는 크기. 녀석은 내 마력으로 부활할 수 있지만, 완전한 형태로는 부활하지 못한다. 일종의 제약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2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변이체들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다. 녀석은 미쳐 날뛰었다.
···1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몸이 자그마한 앵무새처럼 작아졌음에도 계속 날뛰던 피닉스는 아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시며 사라졌다. 나는 기프트를 확인했다. 57,675.
관악구에 있는 대부분의 변이체들은 소멸한 모양이다. 하기야 그 난리를 피워대는데, 아직도 건물 안에 가만히 있을 녀석은 없겠지. 나는 옥상에서 가볍게 도약했다.
등에서 날개가 펼쳐짐과 동시에, 내 몸이 가벼워진다.
[‘경량화의 날개’를 사용했습니다.]
소모품, 경량화의 날개의 효용이다. 나는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후, 디아블로에 올라탔다. 어느새 디아블로에 기생하고 있던 에코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기계 정령, 에코가 디아블로 MK1의 성능을 증폭합니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돌린다. 원래도 미친 듯한 속도를 자랑했는데, 지금 에코에 의해 성능 증폭까지 된 상태다. 게다가 빙판길. 그 속도는 기존 속도의 배 이상이다.
물론 거리에는 장애물이 많지만, 에코가 사용한 방벽으로 걷어낸다.
속도를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나는 한손으로 S31을 꺼냈다. 붉은 점이 몇몇 보인다. 살아남은 놈들이 있긴 한가 보네. 그러나 그 숫자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한마디로,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이내, 내 눈에 푸른색 점이 들어왔다. 하나? 아니, 수십? 백여 개도 넘는다.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했을 정도다. 그 숫자에 눈을 의심했고, 그들이 있는 위치에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여 개도 넘는 푸른색 점이 있는 곳이 산- 한국 굴지의 대학교, 서울 대학교 뒤에 위치한 관악산이었기 때문이다. 눈에 덮인 설산.
분명 장관이지만, 하루 종일 눈만 봐왔던 내게는 지겹게 느껴졌다.
나는 금세 관악산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등산로>
앞에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정상까지 올라올 것>
무려 백여 명이 넘는 플레이어 집단. 그리고 그 집단의 쉘터인 관악산. 나는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끼며 천천히 등산로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남자 넷, 여자 둘. 그들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화살. 낯이 익다. 내가 사용했던 ‘미스릴 화살’이 아닌가.
“플레이어?”
“정체를 밝혀라···!”
“정체라 한다면··· 배달부입니다.”
내 이름이나, 그룹을 밝히는 것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 편이 더 효율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맞았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배달부?”
“그 인터넷에 나오던···”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 배달부 씨가 이곳까진 무슨 일이지?”
“······”
예상치 못한, 나를 불청객 취급하는 반응이었다.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바른 마음 교회 정도를 제외하면 전부 나를 환영했었으니까···
‘하기야, 갑자기 나타났으니 그럴 법도 하지.’
“리더를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 리더를···?”
망설이는 눈빛을 했지만, 이내 그들의 고개는 끄덕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