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코인 채굴-24화 (24/236)

24화

“저는 회삿돈을 횡령했습니다.”

“횡령, 말입니까?”

“회삿돈으로 코인을 모조리 구매했죠.”

대출받아 코인에 꼴아박은 놈. 회삿돈 횡령해서 코인에 꼴아박은 놈.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결이다. 우열을 가릴 수 없···지는 않나? 적어도 나는 범죄는 안 저질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짐짓 쓰게 웃으며 말했다.

“뭐, 코인 투자, 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대출받고 거하게 날려 먹었습니다.”

“오를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치고는 그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확실히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진서 씨 그룹은 몇 명입니까?”

“400명입니다.”

“400명이라··· 진서 씨도 보통은 아니네요.”

그는 웃었다. 나 역시 마주 웃어줬다. 물론 속으로는 어느 정도 대비를 해 놨다. 그가 나를 부른 목적이 무엇일까. 그냥 나와 같은 순수한 목적이라면 좋겠지만,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그걸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진서 씨는 같은 사람을, 플레이어를 죽여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플레이어를 죽이면, 그 플레이어가 가진 기프트 코인을 제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죽인 놈들은 전부 잔챙이들이라 몇 푼 되지 않았지만··· 진서 씨는 다르겠죠.”

점점 정신이 어지러워진다. 나는 곧 깨달았다. 내가 마신 차에, 그가 무언가 수작을 부려놨다는 것을.

‘아···’

우리 어머니, 이순옥 여사가 말씀하시기를···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라고 하셨다. 배달부 일을 할 때도 몇 번이고 뼈저리게 느끼곤 했었지.

아들 같다며 건넨 우유가 상해있거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있거나.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당하는구나··· 여기서 죽는 건가?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점점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오히려 방금 전보다도 훨씬 더.

[신경 마비독 Lv.7에 중독됐습니다.]

[순수한 마력이 독기에 저항합니다.]

[축적된 행운이 다시 없을 기적을 불러옵니다.]

[순수한 마력이 독기를 완전히 집어삼켰습니다.]

[칭호 ‘만독불침’을 획득했습니다.]

<만독불침>

조건 : Lv.7 이상의 독에 저항

보상 : Lv.7 이하의 독에 면역

“그 독에 걸리면 말이야. 나도 뼈도 못 추리거든? 이진서 씨. 기프트는 감사히 쓸게. 앞으로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받아먹지 말고.”

박영서는 기분이 좋은 듯 쾌활하게 웃었다.

“아, 그리고 너희 그룹이 있는 곳? 400명의 사람들? 전부 다 노예로 만들 거야. 반반한 여자가 있으면 모조리 강간해야지. 저년들처럼 말이야.”

아, 드디어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만약 마력이 조금만 적었다면, 아니, 행운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정말 실현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화가 치밀었다. 내 안일함에.

나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있다. 더 신중했어야 한다. 박영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어느 정도의 기프트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회삿돈을 횡령해서 코인 지른 놈이다. 나보단 많이 지르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도 비장의 무기를 쓰기로 했다.

‘메모라이즈.’

메모라이즈는 세 번의 스킬을 저장할 수 있다. 그 스킬이 전설 등급 스킬인 영령 빙의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은 사용할 일이 없어 저장만 해놨지만···

[영령 빙의(L)를 사용합니다.]

[방랑기사, 카론이 몸에 빙의됩니다.]

[마력에 따라 동화율이 설정됩니다.]

[마력 64를 확인했습니다.]

[현재 동화율 81%]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 48시간]

박영서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1번 프리셋.’

내가 불러온 용기사의 흑철 갑주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폭식의 대검, 아르고스.’

순식간에 내 손에 거대한 대검이 소환된다. 나는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겅. 검이 그의 목을 베어버린다. 그의 목은 그대로 그의 몸과 분리됐다.

목을 잃은 몸이 소파 아래로 떨어진다. 피분수가 솟구친다.

[다른 플레이어를 살해하셨습니다.]

[‘퍼스트 블러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퍼스트 블러드>

등급 : 일반(Normal)

조건 : 처음으로 플레이어 살해.

보상 : 기프트 채굴량 +0.5%

‘플레이어 살해 업적도 있었나.’

하기야, 변이체 살해 업적이 있는데, 플레이어 살해 업적이 있지 말란 법은 없다.

심호흡을 한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첫 살인. 내게 독을 먹인 악인(惡人)이라고는 하지만, 같은 인간을 죽인 건, 명백하게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감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가슴은 금세 원래대로 되돌아왔고, 일그러졌던 표정 역시 무덤덤해졌다. 그동안의 전투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박영서가 변이체보다도 못한 놈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까?

푹,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약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어떠한 식으로든 저항할 줄 알았다. 아무리 그가 방심했고, 내가 기습을 하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령 빙의를 사용하지 않아도 쉽게 죽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87,567기프트를 획득했습니다.]

그가 가진 기프트가 내 손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혹시 아껴뒀던 건가? 아르고스에 묻은 피를 탈탈 털어내고는 직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제각각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대화를 들은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400명의 그룹을 이끌고 있는 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를 수용할 능력도 충분합니다.”

“데려가 주세요···!”

뒤에 있던 여직원이 비명 지르듯 말했다. 그녀는 처절한 얼굴이었다. 그 정도로 이 안의 삶이 피폐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때,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박영서를 죽인 건 감사드립니다만··· 저희는 아직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모릅니다. 인터넷에서 동영상 하나를 본 게 전부입니다. 어떠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집단을 운영하는지···”

그의 말인즉, 내가 박영서와 같은 인물이 아닐지 걱정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아르고스를 소환 해제하고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집단, 그룹의 운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리더이긴 하지만, 여러분께 딱히 원하는 것도 없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중년 사내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긁적거릴 머리도 없으면서···

“이렇게 돼버린 세상입니다. 도시에는 변이체가 득실거리고 있고, 우리 인간들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존재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 아닐까요?”

“······”

그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감동받은 눈치였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앞으로는 룰(Rule)을 만들어나갈 생각입니다. 솔직히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친구를 보니 확 생각이 드네요.”

나는 우리 그룹에, 박영서와 같은 생각을 품은 이가 존재하는 걸 원치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그룹에,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요구하는 것’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전에··· 잠시만 건물 안에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

“생각지 않게 한 시간 보너스 타임이 생겨서. 딱 한 시간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영령 빙의를 이대로 내버려 두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57분 남짓,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볼 생각이었다.

***

그렇게 이진서는 사라졌다. D 미디어 직원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김 부장은 멍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다들 떠날 채비 해야지.”

“그의 말이 사실일까요?”

“박영서를 죽인 사람이네. 설령 그가 우리에게 말한 대로가 아니라, 다른 의도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강제로 우리를 데려가려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그건 맞죠.”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영서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라고는, 그들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악마였으니까. 무슨 수를 써도, 그들이 저항할 수 없는.

그런 박영서가 별 손도 쓰지 못하고 죽었다. 특히, 그가 신경독을 이진서에게 먹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놀라움은 더 컸다. 신경독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다니···

“하지만··· 그 전에 우리도 먼저 해결할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말인가?”

“박영서에게 빌붙은 빌어먹을 놈들도 함께 데려갈 순 없죠.”

“······”

박영서에게 진심으로 복종하는 부류와, 마지못해 그의 말에 따르는 부류··· 후자 중에는 박영서보다 전자를 더 미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도 다 살아보겠다고 그런 거잖아?”

“우리는 그거 못해서 안 한 줄 알아? 씨발, 거 뚫린 입이라고. 저 새끼들 데려가면 안 됩니다.”

남직원이 옆에 놓인 각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장이라도 싸울 듯한 기세였다.

“네가 배달부냐? 별것도 아닌 새끼가.”

“다들 가만히 있을 겁니까?”

김 부장은 머리를 쥐었다.

물론 그도 박영서의 ‘친위대’를 미워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생존. 생존을 위해서, 박영서에게 충성을 택했는데, 그가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그때 한 여직원이 말했다.

“부장님, 저 새끼들이랑 친일파랑 다른 게 뭐예요?”

김 부장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건··· 맞지.”

다른 이들의 반응이 격하다. 어차피 양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는, 곧 결단을 내렸다. 그는 각목을 들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끝을 내야겠지. 자네들, 순순히 이곳에서 나가겠다면, 혹은 이곳에서 남겠다면 더 터치를 하지는 않겠네.”

“······”

이진서는 약속대로, 정확히 한 시간 뒤에 돌아왔다. 그가 보게 된 광경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몇몇 사람들의 사체와, 피로 물든 각목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감했다. 김 부장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저놈들은 아까 그놈, 박영서에게 빌붙은 놈들입니다.”

“···본인들의 사정이 있으니, 비난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그룹 내에서 이런 일을 또 벌인다면 그때는···”

이진서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죽일 겁니다.”

위압이 없지만, 마력을 담은 그의 경고는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김 부장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내, 이진서를 따라 사람들이 D 미디어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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