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쉘터로 돌아온 나는 몇몇 사람들의 스마트폰에 내 S31과 마찬가지로 ‘위성 통신 기능’을 탑재했다. 비용은 0.9기프트. 이로서 급한 대로 나와 쉘터 사이에 다시 연결망이 생겼다.
다음으로는, 건물의 주요 통로를 막아뒀던 8급 바리케이드를 7급 바리케이드로 교체했다. 아직 부서지진 않았지만 변이체들의 능력이 1.5배 향상됐으니, 예방 겸 교체한 것이었다.
오토 쉴드, 오토 리페어까지 50기프트. 1층부터 4층까지 통로란 통로는 전부 도배해버렸다. 설령 최상급 변이체라 한들 저 빼곡한 바리케이드들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진 못할 것이다.
무슨 벽을 타고 기어 올라오면 몰라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물자.’
그동안 나는 물론이고, 사람들은 물자- 식량, 식수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의 숫자가 많이 늘었지만, L 주상 복합 센터 내의 물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부족하다 하더라도 바깥에서 가져오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이 진혜연이 내게 건넨 초코바처럼 먼지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
이제 식량, 식수를 구하기 위해선 상점에서 기프트로 구매하는 수밖에 없다.
‘400명의 물자를 공급하는 것.’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그냥 내가 다 내면 된다. 식량? 식수? 까짓거 얼마나 한다고. 변이체가 드랍하는 기프트 양이 1.5배로 늘었다. 어차피, 앞으로 벌어들일 기프트가 훨씬 많다.
생각하고 있는데, 정민혁이 내게 다가왔다.
“형님, 박승기 국회의원님이 뵙자고 합니다.”
“무슨 일?”
“물자 문제 때문에 할 말이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진구에서 구출한 박승기. 국회의원 짬밥이 어디 간 건 아닌지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정신적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물자 문제 때문에라도, 그를 비롯한 김하나, 김민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가 먼저 듣게 되겠네. 이내, 그는 정민혁과 함께 내가 있는 7층으로 올라왔다.
“그··· 이미 알고 있겠지만, 식량이 모두 사라졌네.”
시스템 메시지로 확인했고, 직접 내 두 눈으로도 확인한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박승기는 대뜸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
“기프트로 물자를 구매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많은 인원의 물자를 감당하는 것은 자네에게도 큰 부담이라고 생각하네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합니다.”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지금 우리 그룹은 인원이 너무 많아. 모두 합치면 400명이 넘네. 거기에 지금처럼 계속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다른 지역(강남구)로 넘어가 변이체들을 소탕할 생각이었다. 거기서도 플레이어들을 발견할 테고, 그들을 굳이 외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인원을 추가로 늘리지 않는 건 물론이고··· 기존의 인원도 축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400명은 너무 많네.”
“어떤 인원을 말입니까?”
“불만만 가진 채 툴툴거리면서 일도 제대로 안 하는 인원들 있지 않은가.”
이번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의원님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박승기는 심장마비라도 걸린 듯, 화들짝 놀라며 변명의 말을 내뱉었다.
“아니, 나는··· 나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지 않은가.”
농담조로 말했던 건데, 두 번 말했다간 이 양반 정말 심장마비 걸리게 생겼다.
“제가 의원님께 사람들을 관리하라고 시킨 적은 없잖습니까.”
“자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은가. 그래서 암묵적으로 그래도 된다고 승인받은 줄 알고 있었네만.”
“저는 의원님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일도 시킨 적이 없습니다.”
정민혁에게 관리를 맡겼을 뿐, 그룹 내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시킨 적이 없다. 사실 뭘 바라고 그들을 받아들인 것도 아닐 뿐더러, 그들에게 딱히 시킬 것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굳이 시키려 한다면, 진혜연이 말했던 대로 전문 버퍼(Buffer) 정도, 그래, 그 정도가 전부였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면 직접 하는 게 편하다. 나 같은 놈을 세간에서는 호구라 부르던가?
“···그렇다면 자네는 대체 뭐가 되길 원하는 건가? 우리 그룹의 목표는? 아니, 애초에 그룹이 맞긴 한 건가?”
“······”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떠올린 인물은 이장우였다. 본 적은 없지만, 그는 스스로를 노아라고 말하면서 다른 이들을 노아의 후손들과 가축들에 빗댔다고 한다.
그때는 그저 사이비가 사이비 했네!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나 혼자 살아남는 건 어렵지 않다. 솔직히 자신도 있었다.
내 기프트가 그 자신감의 근원이다. 앞으로 2년만 버티면 스테이킹된 코인이 락업 해제된다. 6억 개가 넘는 코인이. 그러면 설령 그 어떤 존재라 하더라도, 나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홀로 살아남는다면,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앞으로 2년 후, 이 재앙이 끝났을 때, 나는 이 지구에 나 홀로 남는 걸 원치 않는다.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생각이 확실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타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박승기에게 입을 열었다.
“그저 이 세계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뿐입니다.”
빌어먹을 코인 채굴기가 아닌, 다시 본연의 지구로 되돌린다.
“그런 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아니,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박승기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말투는 내게 화를 내는 말투였지만, 눈은 내게 묻고 있는 듯했다. 그게 정말 가능하냐고. 나는 정민혁을 쓱 쳐다봤다.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 역시 내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님의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생각보다 강하니까요. 우리는 다시 지구를 되찾을 겁니다.”
“그래, 내가 자네라는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했고···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었군. 이제 자네가 뭐가 되고 싶어 하는지 알겠어. 자네는···”
짧게 말을 끊은 그는 입을 열었다.
“구원자네. 이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 말이야.”
박승기는 내게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에게 말해놓겠네. 자네가 있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가 나간 후, 정민혁은 나를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 아우에게도 형님의 목적을 한 번도 이야기해주신 적 없잖습니까? 이러니까 제가 어찌 형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헛소리는 쯧.”
나는 쓰게 웃으며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나 피우러 가자.”
“그건 제가 환영입죠.”
***
온통 어둠에 잠긴 방. 오로지 촛불만이 방의 내부를 밝히고 있다. 한 남자가 병상에 누워있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건 거구의 흑인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제이드.”
“유경영.”
유경영이라 불린 남자는 머리가 아픈 듯 머리를 쥐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제이드, 내 다리를 치료해줘. 다리를 치료해준다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
하지만 제이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미안하다.”
변이체를 사냥하던 중, 변이체들이 갑자기 강해졌다. 그리고 남자는, 유경영은 그 와중에 하반신 일부- 다리를 잃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제이드는 가까스로 그를 데려왔다.
“그놈의 기프트 때문이라면···”
“시스템에게 물어보니 너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유일 등급 치료 스킬, 성광 축복이나 신전의 최상급 회복 물약 정도는 필요하다더군.”
“최상급 회복 물약이 얼만데?”
제이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시스템 메시지로 대신 됐다.
[100기프트입니다.]
유경영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100기프트. 그들이 보유한 기프트의 양을 훌쩍 넘기는 수치였다. 설령 100기프트가 있다 한들, 고작 유경영의 다리를 치료하겠다고 쓸 리가 없었다.
“그럴 만한 기프트가 없다는 사실은 유경영, 너도 잘 알잖아.”
“그래서 나를 이대로 버리겠다는 건가?”
“버리지는 않을 거야.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이다.”
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품에서 빵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유경영은 빵을 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 이내 그는 눈물을 흘리며 빵을 삼키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제이드는 방 밖으로 나온다.
“제이드.”
“바깥 상황은 어때?”
동료들은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야만 했다.
“여전히 변이체들이 득실거려. 개 중에는 중급 변이체도 있더군.”
“사냥해야겠군.”
제이드는 벽에 걸려있는 창을 들었다. 상점에서 구매한 것으로 무려 1기프트짜리였다. 기관단총의 탄약을 모두 소모한 지 삼 일은 지났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근접전을 벌여야만 했다.
“그러지 말고, 제이드, 우리도 강동구로 가는 게 어때?”
“가다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저렇게 다리 다친 놈을 데리고 갈 수가 있나?”
“···굳이 데리고 갈 필요가 있나.”
제이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지금이야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으로 부상 당한 그를 돌보고 있지만, 앞으로의 미래에도 그럴 만한 여유가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는 창을 든 채, 동료들과 함께 변이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일식이 아닌, 지금이 하급 이상의 변이체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
영령 빙의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지났다. 마도사, 벨루가와 계약을 맺었기에 다시 그를 불러내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번엔 대신 다른 영령과 빙의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벨루가에게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또 어떤 영령이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영령 빙의(L)를 사용합니다.]
[떠돌이 영령 ‘방랑 기사 카론’을 불러옵니다.]
중년 사내가 나타난다. 검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철하게 생긴 사내가. 그는 그의 몸집만큼 거대한 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가 바로 방랑 기사, 카론인가.
- 그런 복장을 하고서 나를 부르다니, 불쾌하구나.
“···벗겠습니다.”
- 필요 없다. 남자의 나신을 보는 취미는 없다. 계약할 건가?
[방랑기사, 카론이 몸에 빙의됩니다.]
[마력에 따라 동화율이 설정됩니다.]
[마력 64를 확인했습니다.]
[현재 동화율 81%]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 48시간]
- 나는 거대한 대검을 사용하는 기사였다. 내 대검 ‘아르고스’는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지. 마법사인 네가 얼마나 잘 다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영령의 능력치와 스킬의 일부를 불러옵니다.]
[카론식 검술(U)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
[폭식의 대검, 아르고스(U)을 일시적으로 습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