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진서가 받아들인 플레이어의 숫자는 이제 거의 400명에 육박한다. 그중 바른 마음 교회의 신도들이었던 50명 정도를 제외하곤 대부분 L 주상 복합 단지 내에 거주하게 됐다.
수도와 전기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내부의 물자 역시 풍부했기 때문에, 많은 인원을 수용함에도 별문제는 없었다. 다만, 생활이 안정 궤도에 오르며 불협화음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싸워야 합니다. 언제까지 진서 씨한테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김민수의 말에, 가만히 앉아있던 박승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Free Will, 인간은 누구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네. 즉, 자네가 강요할 권리는 없단 말일세. 아니, 자네뿐만이 아니라 설령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진서··· 씨라 하더라도 말일세.”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슬그머니 주변을 살폈다. 안 보이는 곳에서는 대통령 욕도 한다지만, 그에게 대통령보다 무서운 건 이진서였다. 듣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박승기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인상을 찡그리며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의견은 어느 한쪽으로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논쟁인지, 의미하는 방증이었다. 하기야, 당연했다. 변이체와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그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내 말의 요지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싶은 사람들만 나가서 싸우면 된다 이 말일세.”
“참 궤변이십니다. 그러면 여기 가만히 앉아서 물자만 축내시겠다는 이야기입니까?”
“궤변? 이 친구, 웃기는군. 이 물자가 자네 것인가? 그리고 내가 언제 축내겠다고 했나? 변이체와 싸우는 것 말고도, 이 그룹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네.”
곧 둘의 논쟁은, 둘의 의견을 지지하는 플레이어들 사이의 논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한편, 김하나는 그런 그들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시선을 옮긴다.
야구 모자를 쓴 진혜연은 그런 플레이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진서와 가장 먼저 합류한 플레이어. 당연히 그룹 내의 위상은 그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드높았다.
실질적으로 플레이어들을 관리하고 있는 정민혁조차 그녀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진서도 그녀에게는 더없이 다정하고 친근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녀가 이진서에게 한마디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 될까? 만약 이진서가 그들에게, 자신들에게 환멸을 느껴 전부 내쫓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이 나이 먹고 고작 중3 꼬맹이의 눈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문득 김하나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졌지만, 이것은 엄밀히 현실이었다. 이내, 그녀는 나긋하게 그녀를 불렀다.
“혜연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뭘요?”
“뭐긴 뭐겠어.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거? 아, 저 국개의원이 하는 자유 의지니 뭐니 하는 개소리 빼고. 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오빠를 돕기 위해서라도, 변이체와 싸우는 게 맞다고 생각···”
역시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한 건가.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응?”
“우리가 진서 오빠를 도울 수 있을까요?”
진혜연은 근 며칠간, 이진서에게 보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낮에는 강순철에게 호신술과 사격을 배웠고, 밤에는 정민혁과 함께 변이체 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이 얻는 소량의 기프트라도 이진서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현실을 깨닫고 말았다.
인터넷에 공개되지 않은, 정민혁이 최근의 이진서를 촬영한 영상을 보며 깨달았다. 그녀는 강해졌지만, 같은 시간에 이진서는 처음 봤을 때의 수십 배, 수백 배 이상으로 강해졌다는 걸.
새벽 내내 변이체를 사냥하고도, 그녀가 손에 쥔 기프트는 0.1기프트도 되지 않았지만, 이진서가 그녀에게 용돈이랍시고 건넨 기프트는 그 100배인 10기프트였다.
···이렇듯, 그가 사는 세상은 차원이 달랐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랬지만. 그런 그를 돕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가능할지, 오히려 걸리적거린다고 느끼는 건 아닐지 그녀는 걱정부터 치밀었다.
“그거야···”
김하나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오빠는 저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그랬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진혜연은 저들의 언쟁을 의미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김하나는 문득 궁금해져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면 넌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처럼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뭐가 맞는 건지.”
그녀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그룹은 시끄럽게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김민수와 박승기는 각 그룹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언쟁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진서와 정민혁이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
“······”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려 한 시간에 걸친 언쟁에도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던 두 그룹이 단 1초 만에 결정한 무언의 합의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진서의 물음에, 박승기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허허, 우리가 무슨 일 있겠는가? 그냥 자네가 혹시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지.”
방금 전까지 국회의원 시절처럼 쩌렁쩌렁하게 호탕을 치던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노인 박승기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그는 이진서 앞에서 유독 약해졌다.
첫 만남 때 ‘살기’를 느껴서 그럴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아, 잘 풀렸습니다. 광진구 변이체들을 마저 소탕했고, 송파구로 넘어가서 플레이어들을 구출했습니다.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테니, 다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예···”
그의 말은 법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여기서 플레이어들을 더 추가한다고? 속으로 불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겉으로 드러낼 만큼 담 큰 사람은 없었다.
곧 송파구의 플레이어들이 뻘쭘한 얼굴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진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7층으로 올라갔다. 기다렸다는 듯 진혜연이 그를 따라 올라갔다.
그러나 여전히 플레이어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직 정민혁이 남았기 때문이다. 정민혁은 스마트폰을 몇 번 만진다. 좋아요와 팔로워 수를 확인한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반응 좋고.’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정민혁이 입을 열었다.
“다들 재밌는 이야기 하던데··· 계속해봐요.”
“······”
“······”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진다. 이진서만큼은 아니지만, 이진서에게 플레이어 관리에 대한 전권을 물려받은 정민혁 역시 그들이 쉽게 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으므로 말이다.
***
붉은 하늘 아래 펼쳐진 세상.
도시의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VVIP 상점에서 구매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평범한 담배가 아닌 드워프식 수제 담배.
<드워프식 수제 담배>
종류 : 소모품
등급 : 고급(Superior)
설명 : 드워프가 만든 담배. 일반 담배와 달리 마력의 꽃에서 추출한 순수한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아무리 많이 피워도 중독되거나, 몸에 해롭지 않다. 피울 경우, 일정 시간 동안 집중력이 올라간다.
해롭지 않은 담배라니. 이건 엄청난 혁신이다. 그 맛도 현실의 담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맛이었다. 한 갑에 무려 0.1기프트나 하지만. 0.1 기프트야 뭐 껌값이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맛있어요?”
진혜연이었다.
“담배가 뭐 맛있어서 피우나? 넌 사탕이나 먹어라.”
난 사탕 하나를 구매해 그녀에게 건넸다. 진혜연은 얌전히 막대 사탕을 입에 물었다.
“달다, 달아!”
마치 양갱을 먹는 노인처럼 소리친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괴롭히지?”
내 물음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연약한 여중생을 괴롭히면 그건 나쁜 사람들이죠. 괴롭힘 당하는 건 정민혁 ‘아저씨’지.”
그녀는 부정했지만, 내게는 긍정처럼 들렸다. 나와의 친분 때문에 사람들이 진혜연을 괴롭힐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민혁이보다 내가 더 나이가 많은데 왜 나는 오빠고, 민혁이는 아저씨야?”
“그건··· 몰라요. 말 안 해요.”
“심각한 표정 하긴.”
“아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 다 들었죠?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다.”
내가 건물에 도착했을 때, 플레이어들은 둘로 나뉘어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언쟁의 주제는 다름 아닌 그들이 나, 이진서를 위해 변이체와 전투를 벌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였다.
“제가 맞혀볼까요? 오빠는 아무 생각이 없을 거 같아요.”
“정답이긴 한데··· 너무 쉽게 맞히니까 기분 상하는데?”
“죄송해요.”
“아냐, 농담이야.”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가 그들을 구출하고 데려온 건 말 그대로 ‘동정심’ 때문이다. 그들에게 어떠한 기대도 가지지 않는다. 변이체 처치? 다른 사람 손을 빌릴 필요 없이 내가 하면 그만이다.
기프트? 그들에게 받을 수 있는 기프트라 해봐야 뻔하다. 내게는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과 나의 채굴량은 적게는 수십 배에서 많게는 수백 배 가까이 차이 나니까.
차라리 그들이 변이체를 사냥할 바엔, 내가 처치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뜻이다.
“오빠를 도울 방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결론을 내렸어요.”
“무슨 결론?”
“제가 내린 결론은···”
그녀는 입을 열었다.
“버퍼(Buffer)에요.”
“버퍼?”
“플레이어가 스킬 습득할 수 있는 개수에는 제한이 있잖아요.”
“그렇지.”
플레이어가 습득할 수 있는 스킬 숫자에는 제한이 있다.
기본이 다섯 개고, 기프트를 지불하여 해금해나가는 식이다.
다만 좀 비싸다. 여섯 번째 스킬 슬롯을 해금하는 데 드는 비용은 100기프트였지만. 일곱 번째 스킬 슬롯을 해금하는 데 드는 비용은 무려 10,000기프트다.
이러니, 여덟 번째 스킬 슬롯을 해금하는데 드는 비용은 얼마일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찾아보니까 일정 시간 타인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스킬도 있더라고요.”
진혜연의 말인즉, 버프 스킬을 익혀 전문 버퍼(Buffer)가 되겠다는 소리였다.
‘이건 좀···’
괜찮은데? 내가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