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225
기다리던 맥주가 나왔다. 나는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 이제 좀 살 것 같네.”
안 그래도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낮에 파수꾼에게 먹일 맥주를 만드는 과정을 봤으니, 마법으로 더욱 맛있어지고, 냄새까지 죽여주는 그 녀석을 보며 침을 삼키며 꾹 참았으니, 이렇게라도 해결해야 했다.
원래 계획이라면 야식으로 동생이랑 치킨과 맥주를 마실 생각이었는데, 그건 그거고 일단 이렇게라도 몸을 달랬다.
“음…….”
내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침묵으로 가득했다.
서로 관찰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 정확하게는 셋이 나를 일방적으로 살폈다.
루이즈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무심은 의자에 앉아 스컬 대검을 천으로 닦고 있었다.
물론 무심의 경우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 저 셋의 목을 벨 수 있으니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다.
‘그 덕에 나도 편하게 있는 거지만.’
무심이 내 소환수라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테이블에 있던 음식의 절반가량이 사라졌다. 나 또한 맥주를 비워 냈고, 접시 위의 음식도 다 비워낸 상황이다.
슬슬 이 자리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훑어보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열었다.
“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말에 그제야 입을 여는 철벽의 사나이, 권율이었다.
“나를 후원하는 분께서 자네와 접촉하라고 하시더군.”
자세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듯 두 눈을 감고 양팔을 겨드랑이에 집어넣는다. 이 자리에서 빠지겠다는 듯한 모습. 결정권은 그에게 없는 것 같았다.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자세한 것은 이레귤러 길드 마스터님께서 설명해 주실 거예요.”
얼음 공주라 불리는 그녀 또한 손에 들려 있는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저 멀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모습을 본 이레귤러 길드 마스터가 격한 한숨을 쉬었다.
“하…… 두 분은 매번 이러십니까? 가끔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땅이 꺼질 듯한 한숨, 거기에 약간 억울함과 귀찮은 것을 도맡아 해야 하는 역할에 불평불만인 듯했다.
그럼에도 그 둘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 진짜. 나중에 보자고.”
짜증과 함께 악당들이나 내뱉는 뻔한 대사를 하고 난 다음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이레귤러 길드 마스터 김민성입니다.”
손을 내밀기에 나도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와 동시에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직업 때문이었다.
그의 직업은 다름 아닌 화염 권사.
격투가 직업으로 모든 공격에 화염 데미지를 추가로 입힐 수 있는 유니크 등급의 직업이었다.
그 특별한 능력 덕분에 수많은 사냥터에서 확실한 딜러로 자리 잡았고, 나아가 길드를 창설한 것이다.
길드 랭킹 70위.
월오룰에 무수한 길드가 있는 것을 보면 절대 무시 못 할 순위를 유지하고 있는 길드였는데, 내가 회귀 전에는 20위권에 들어설 정도로 저력이 있었다.
지금 순위를 올리지 못하는 것은 마땅한 탱커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공격 대부분은 화염을 머금고 공격을 한다. 그 열기는 적 몬스터에게 데미지를 주게 되지만, 탱커에게도 일정 부분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화염 내성에 강력한 탱커를 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나중에 그 탱커가 구해지고부터는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웃기네. 원래라면 미래에서나 같이 있는데 말이야.’
회귀한 나만 알고 있는 사실.
나중에 이레귤러가 길드가 구한 화염 내성이 있는 탱커가 다름 아닌 눈앞의 철벽의 사나이, 권율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얼음 공주 제시카.
한국과 러시아의 혼혈 태생으로 얼음 마법과 바람 마법을 전문으로 사용하는 유니크 등급의 마법사인 그녀였다.
평소 남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냉랭한 표정으로 활동해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마법사임에도 길드가 아닌 마탑의 의뢰를 수행하며 실력을 키워 갔고, 결국 그녀를 중심으로 하나의 팀이 꾸려져 활동하고 있다.
아무래도 수익을 위해 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언제나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고 할 말만 하는 그녀라 얼음 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려 왔다.
공주란 단어가 들어가는 만큼 상당히 미인이다.
그녀가 이레귤러 길드에 가입하게 되는 이유는 뭐 간단했다.
점점 강해지는 몬스터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마신교로 인해 그녀가 꾸린 팀과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작아졌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이레귤러 길드에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화염을 뿜어내는 길드 마스터의 화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바람 계열의 마법과 화염을 식혀 버릴 얼음 계열까지 가지고 있으니, 사실상 그녀의 합류는 이레귤러 길드에선 억만금을 주고 데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회귀한 상황. 이 셋이 함께하는 때는 앞으로 삼 년은 더 지나야 한다.
거기에 추가로 이상한 점.
‘후원해 주는 분이라…….’
월오룰의 유저가 누군가의 후원, 혹은 기업의 후원을 받고 활동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나를 만나라 했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었다.
애초에 나랑 접점이 있는 기업이나 다른 유저는 없다. 그나마 지금 유일하게 받은 광고인 미리내 기업의 광고가 전부였고, 그 또한 지은이에게 맡겨 두었기에 나와는 연관이 없다.
그렇다면 정답은 저기다.
“혹시 미리내 기업입니까?”
내 말에 세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특히 얼음공주 제시카의 표정 변화가 뚜렷한 것이 제일 신비했다.
“그렇다면…… 제 방송에 자주 오시는 그분이겠군요.”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마저 말하자 김민성이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거기까지 추리하시다니 대단하시군요. 맞습니다. 저희는 미리내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김민성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고 있던 것을 치워냈다.
“미리내 길드 사장님이신 진병철 님께서 말씀하시길. 마왕의 토벌에 적극 시저 님을 도와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그것도 마왕의 토벌을?”
“그렇습니다.”
김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좀 풀어서 설명하느라 십분 가량을 혼자 떠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거다.
남들 몸 사릴 때 확실하게 눈도장 찍고 싶다. 오히려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혀 왔던 모든 기업의 뒤통수를 치고 싶다. 그러니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나를 도와주고 싶다. 평소 팬이니 생생한 내 모습을 찍은 영상도 구할 수 있으니 좋다. 그리고 내가 후원하는 셋이 협력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러니까 대놓고 말하자면 한번 거들어줌으로 그간 서러움의 복수, 그리고 홍보라는 것이군요.”
“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야기도 하거든요.”
뭐, 미리내 길드 사장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겠다.
그리고 지금 이 타이밍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의문이 들었다.
“마왕을 토벌하고 나면 게임이 끝날 수도 있는데 그래도 하시려고 합니까?”
지금 세상에서 가장 민감한 이야기가 바로 마왕의 토벌이자, 게임 종료에 관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여기 있는 세 사람의 직업이 걸린 일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이렇게 도움을 주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대답은 권율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왔다.
“게임을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지.”
“아직 끝났다고 확정도 아닌데 머뭇거릴 이윤 없죠.”
“끝을 보려고 하는 게임이지, 현 상태를 유지해 봐야 저만 답답할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의 대답은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래. 게임을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지. 언제까지나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하물며 아직 확실히 끝이라고 그 누구도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러니 게임을 계속해서 진행할 생각이고, 눈앞의 찬스를 놓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저들의 이유였다.
나는 저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렇게 게임이 좋아서 미친 듯이 하는 사람도 있지.’
직업이 아닌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자들. 비록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누구보다 게임에 열정적인 사람.
그런 사람이 눈앞의 세 사람이다.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이야기해 줄까도 싶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는 NPC 몇 명과 내가 전부다.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하면 아마 지금 붕괴된 아이템 시세는 물론이고, 다시 수많은 유저들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돌아올 것이다.
‘뭐, 굳이 알려 줄 필욘 없지.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 좋겠어.’
그래. 순리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겠다는 그 미리내 기업의 사장님을 비롯해 눈앞의 세 사람에게 고마운 감정이 일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혼자 싸우는 게 벅찬 상황인데, 이렇게 지원군 역할을 해 주겠다 하니,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내일 계획을 알려 주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각에 마왕의 군대는 총공격을 해 올 것입니다.”
“아…….”
놀란 얼굴의 셋, 지금 이 이야기는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 어떤 유저도 모르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모두 모여주세요. 저와 함께 마왕과 싸우죠.”
“알겠습니다.”
김민성이 대표로 대답했다.
그리고 가장 행동이 빠릿빠릿한 것은 놀랍게도 다름 아닌 얼음 공주 제시카였다. 순식간에 로그아웃해 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권율 또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그대로 로그아웃했다.
“하하하. 부럽네요. 저분들이야, 소수 인원이니 현실에서 금방 연락 돌리겠지만, 길드는 이끄는 저로서는 수면 시간이 부족하겠군요.”
“힘내십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응원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가벼운 응원을 해 줬더니 씁쓸한 미소로 고맙다고 말하는 그였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둘러 알려 주고 자야겠네요.”
그렇게 김민성까지 가 버렸다.
주점에 남은 것은 나와 루이즈, 무심뿐이었다.
무심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네.”
“뭐?”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있다면 마왕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그렇지. 마왕군의 숫자에 전혀 밀리지 않지.”
“그럼에도 지금 플레이어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돈 때문인가?”
역시 무심.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얼굴 때문일까, 무심 또한 잠시나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기적적으로 내일 수많은 유저들이 접속해서 마왕군이랑 싸워줬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내가 바라는 것은 저거 하나다.
왜냐고? 그래야 내가 직접 마왕을 죽이러 갈 수 있으니까.
일단 우두머리 먼저 잡아야 확실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로그아웃했다.
* * *
다음 날.
월오룰에 접속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이리 많아?”
놀랍게도 키트비느 자작의 성문 앞에는 수많은 유저들이 접속해 있었다.
그것도 마왕군에 필적하는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