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191
쏴아아아아.
비가 내린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는 마치 세상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내 버리겠다는 듯 힘차게 쏟아졌다.
“쩝, 하필 비가 오네.”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현실 세상의 비나 이곳 월오룰의 게임 속의 비나 차이가 없다.
지면을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라든가, 무더위에 쏟아지는 소나기와 태풍을 떠올리게 하는 폭우를 떠올리는 여름비라든가, 수확기에 지친 농부에게 하루 쉬어가라는 듯 알려주는 가을비가 떠오른다.
겨울은 눈이 내린다. 그건 생략하자.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던 그 눈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니까.
아무튼, 지금 나는 폭우 속에서 열심히 사냥 중인 내 소환수를 보고 있다.
“컹! 컹!”
덩치를 키운 백랑이 앞으로 달렸다.
접속할 때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던지라, 바닥이 질척질척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는 아니지만,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어 새하얀 순백의 털이 순식간에 더럽혀졌다.
찝찝할 만도 하건만, 백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꼬리를 바짝 세우고는 그대로 눈앞의 듀라한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소환수 ‘백랑’이 스킬 ‘몸통 박치기’를 사용합니다.
자동차 사고라도 난 듯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만 요란했지, 겉으론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백랑의 공격은 효과가 있었다.
- 듀라한이 상태 이상 ‘기절’에 걸렸습니다.
기절은 대략 3초. 그 시간이면 백랑이 원하는 목표물을 가지고 남을 시간이다.
툭.
백랑이 옆구리에 끼어 있던 듀라한의 머리통을 빼내고 커다란 주둥이로 물어 고개를 흔들었다. 듀라한의 머리는 숭이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고, 숭이가 자세는 잡았다.
- 소환수 ‘숭이’가 스킬 ‘정권 지르기’가 사용합니다.
- 추가 데미지 150% 입힙니다.
퍼어억!
숭이의 주먹에 듀라한의 투구가 찌그러졌다.
그 순간 상태 이상 효과가 끝난 듀라한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라라라!”
듀라한의 몸이 잃어버린 머리통을 찾으러 달려갔다. 하지만 숭이가 머리통을 허공으로 던졌다.
“캬락!”
가직스가 유유히 낚아채 아주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고, 듀라한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은 것은 일방적인 폭력뿐이다.
“잘하네.”
“냐앙…….”
내가 칭찬하기도 전에 먼저 칭찬하는 루이즈와 범이.
루이즈는 내 등에 기대어, 범이는 내 품에 안겨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셋만이 유일하게 비를 맞지 않고 있다. 피온이를 불러 허리와 꼬리를 이용해 작은 천막을 만들어 그 아래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그리 넓지는 않다.
갑자기 시스템창을 통한 알림이 울렸다.
“피온아, 잠깐 멈춰봐.”
“캬!”
움직임을 멈춘 피온이었고, 나는 손을 뻗었다.
“탐지.”
- ‘탐지’ 스킬을 발동했습니다.
- 반경 1km를 탐지합니다.
- ‘탐지’ 스킬에 걸린 것이 없습니다.
어느 사냥터든 나는 탐지의 반지는 절대 빼놓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인던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고, 혹시나 희귀 약초라도 구하면 그게 다 돈이니 말이다.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고는 인벤토리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쯤인 거 같은데 말이야…….”
대게 보물 지도라는 것은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 추상적인 위치를 표현해 두는 편이다.
지도 위에 그려진 것이 명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멀쩡한 동상도 이상하게 그려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그나마 내 손에 들려 있는 지도는 꽤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무너진 잔해 속에 검을 들고 있는 동상을 찾으면 된다.
다만 내가 기억하기로, 이곳에 검을 들고 있는 동상만 해도 수십 개는 된다.
아무래도 한때 제국의 황궁이 있던 장소이기 때문에, 당연히 동상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커뮤니티 검색을 통해 동상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
탐지의 반지까지 동원했음에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이곳이 아니거나 좀 더 움직여 봐야 할 것 같다.
“뭐, 그사이에 경험치나 쌓자고.”
지금 내 레벨은 499다. 거기에 경험치가 99%까지 차올랐기에 곧 레벨업을 할 것이다.
열 마리 안에 레벨업을 할 것 같은데, 이곳에 있는 듀라한의 숫자가 적은 편인 것을 생각하면 한 시간 안에 가능할 듯하다.
“그사이에 지도에 나와 있는 곳을 찾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쏟아지는 비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반경 1km 이내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 너머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자, 피온아.”
“캬!”
피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속도는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평생을 모랫바닥에서 살아왔던 피온이라 그런지 흙바닥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조금씩이지만 빨라지고 있으니 나중에는 좀 더 속도가 날듯하다.
“그전에 진화부터 마무리해야겠네.”
1. 레벨 500 달성.
2. 꼬리를 이용한 막타 100회 성공 100/100
아마 피온이도 내가 레벨업하고 얼마 가지 않아서 레벨이 오를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피온이가 진화해서 전투 능력이 올라가거나 확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피온이의 꼬리에 등을 기대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쿠우우웅!
갑자기 바닥에서부터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 그와 동시에 땅이 미세하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들 저쪽 공터로 이동해.”
지진이 났을 때 건물이나 쓰러지기 쉬운 물건 근처에 있으면 안 된다. 특히 이곳 같은 경우 옛 황궁이 있던 폐허가 아닌가? 건물이 많기에 빠르게 공터로 이동했다.
지진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기에 긴장하려는 찰나, 흔들리던 땅이 잠잠해졌다.
“음? 뭐지.”
쿵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린 지 5초도 되지 않아 지진이 멎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건물이 무너지거나 동상이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기에 지나가는 지진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별일 아니겠지.”
나는 다시 피온이에게 앞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
* * *
그 시각, 크이케 후작령의 사냥터.
스콜피온 맨이라는 몬스터에 의해 메시아 길드가 전멸이라는 치욕을 당한 곳이지만, 사냥터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졌다.
“저주 걸렸다. 쓸어 버렷!”
“X발. 이렇게 쉬운 몬스터를!”
“개 같은 거! 그날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직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난다니까!”
“메시아 길드의 저력을 보여주마!”
유저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스콜피온 맨에게 힘도 못 쓰고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시저가 올린 공략 영상에서 스콜피온 맨이 저주와 디버프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대대적인 인원 개편으로 한 파티에 한 명씩은 저주와 디버프를 재능으로 가진 유저를 끼워 넣어 사냥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었다.
크이게 후작령의 성벽 바로 앞까지 밀렸던 전선은 다시 협곡으로 점차 밀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쥴리안나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로써 다시 공략을 진행할 수 있겠어요.”
조금씩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길드원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에는 혈색이 도는 듯했다.
그동안 저 눈앞의 몬스터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오죽하면 그 영향이 캐릭터에까지 미쳐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동안 설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그녀와 다르게 김세준과 마오후둥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김세준은 전투가 원활하게 진행되면 될수록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눈앞의 공략이 다른 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아 길드에 어울리지 않으며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동감해. 그래도 덕분에 원활한 사냥이 되니 선물이나 하나 줄까 싶은데 말이야.”
마오후둥의 말에 김세준이 인상을 더욱 찌푸리며 물었다.
“선물?”
“그래. 선물.”
마오후둥은 낄낄대며 웃었다. 그리고 그 선물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다.
“괜찮군.”
“그러네요. 괜찮겠어요.”
둘의 허가가 떨어진 상황.
마오후둥이 말하는 선물은 다름 아닌 옛 바스티아 제국의 황성 너머에 있는 므지브하 자작령의 사냥터에 있는 숨겨진 몬스터였다.
므지브하 자작령은 메시아 길드의 손에 떨어진 지 오래인 사냥터로, 워낙 사냥하기가 힘들어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메시아 길드는 그곳을 지나가는 유저들의 사냥을 거들어주면서 메시아 길드의 유능함을 알린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인원 중에 대부분이 마오후둥의 아랫사람이었기에, 언제든 그 사냥터를 입맛대로 바꿔낼 수 있기도 하다.
므지브하 자작령의 사냥터 깊숙한 곳엔 상당히 강력한 몬스터가 있다. 얼마나 위험한 녀석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세준이 슬쩍 웃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처음으로 사냥을 포기한 몬스터이기도 하다.
“그럼, 오래간만에 모아둔 용돈도 써 볼까?”
마오후둥은 직접 시저의 방송에 찾아가 그 사냥터를 의뢰할 생각이다.
물론 그냥 안내할 생각은 없다. 돈을 받아 가는 만큼 재미를 위해 난이도도 올려줄 생각이었다.
벌써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마오후둥이었다.
* * *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 올랐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500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특별한 스킬 뽑기 권’이 생성되었습니다.
“좋아! 드디어 500레벨이다!”
나는 기뻐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방금까지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며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는데, 정확하게 내가 있는 곳에 떨어졌다.
뭔가 크게 한 건 할 것 같은 기분이 절로 들어 한바탕 크게 웃으려던 찰나였다.
“냐아…….”
바닥에서 들려오는 범이의 울음소리. 흙탕물 범벅이 된 범이가 잔뜩 성이 난 상태로 나를 보며 울고 있었다.
빳빳하다 못해 크게 부풀어진 꼬리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표현했고,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냥! 냥!”
범이는 그대로 점프해서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서둘러 범이를 낚아챘다. 그러곤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범이야. 형이 지금 엄청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래. 화 풀렴.”
“냐앙!”
내 사과에도 어림없다는 듯 범이가 화를 내었다.
하지만 내 손에 붙잡혀 있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다가 울음소리를 내었다.
- 소환수 ‘범이’가 고유 특성 ‘자유 변형’을 시전합니다.
- 몸집이 거대해집니다.
범이는 그 자리에서 거대화 스킬을 사용해 순식간에 덩치를 부풀리더니 나를 덮쳤다.
첨벙!
물웅덩이에 떨어지며 피온이의 등에 타고 있는 루이즈에게까지 물이 튀었다.
“주인님! 장난칠 거면 저기 멀리 가서 해!”
“아니! 이건 내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범이라고!”
“냐아아!”
“범이야. 좀. 나 스킬 뽑기 권 사용해야 한다고! 이번엔 특별한 거라고!”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범이.
하지만 시스템창은 내 말에 반응했는지 허공에 100개의 구슬이 무지갯빛을 뿜어내며 나타났다.
그것을 본 범이가 그대로 앞발을 뻗더니 하나 골랐다.
놀랍게도 스킬이 선택되었다.
- 소환수 ‘범이’가 스킬을 대신 선택했습니다.
- 스킬을 익혔습니다.
- 레전더리 스킬 ‘속성 부여’를 익혔습니다.
응? 뭘 익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