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189
내 눈앞에 있는 두 장의 초상화.
나는 그 자리에서 선뜻 고를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 보자…….’
나는 빠르게 내 기억 속에 있던 회귀 전의 지식을 꺼내 들었다.
일단 2황자인 셀탄 세드릭.
초상화에 나와 있듯 2황자의 머리카락 색은 금발이 아닌 적발이다. 대신 눈은 금색이었는데, 이 의미는 1황자, 공주와 배다른 형제라는 뜻이다.
뭐, 집안 사정은 중요하지 않다.
이 사실은 길드에서 살아남고자 발악하던 중에 알아낸 일인데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고, 2황자의 경우 좀 특별하다.
2황자의 외가인 디메트 백작가가 예부터 마신교를 숭배한 집안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훗날 마신교가 세상에 드러냈을 때 밝혀진 사실인데, 당시 세드릭 황성에는 2황자를 비롯한 디메트 백작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1황자는 이곳 나드키아 백작령에서 마신교와 싸우느라 황궁에 없었고, 공주는 루이즈에게 죽었기에 없었다.
황제는 반란을 손쉽게 제압한 듯하지만, 사실은 반란으로 인해 크게 다치고 얼마 가지 않아 병상에 눕게 된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 병력이 뒤로 물러났고, 황제는 대신해서 자리하기 위해 1황자가 수도로 돌아간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황제를 대신해서 홀로 남은 1황자는 황태자가 되어 마신교와의 전쟁만이 아닌 차기 황제로서 교육을 받아 갔다.
물론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을 받아 왔기에 금방 적응하고 나라를 이끌어 가게 되었지만, 나드키아 백작령에 황태자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팽팽하던 전선이 한참 뒤로 밀려나기도 했다.
아무튼 훗날 있을 일을 생각하면 2황자의 죽임은 시급한 일이기는 하다.
‘문제는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악질적인 놈이 므제크 후작이라는 거지.’
므제크 후작.
대륙 서부 지방 귀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귀족이었다.
서부 지방에 있는 귀족의 숫자는 총 마흔, 그중에 서른다섯이 그의 편에 서 있으니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최악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의 영지민을 비롯해 서른다섯의 귀족 모두가 자신의 영지민을 희생시켜 마족을 소환시킨 일이다.
서른다섯의 마족은 므제크 후작을 따르지 않은 남은 다섯의 영주와 영지를 처참하게 박살을 냈고, 순식간에 나드키아 백작령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므제크 후작은 브리타니아 대륙에 마족을 소환한 일등 공신으로 마신교에서 장로직을 얻어 활동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는 일의 원인이고, 앞으로 있을 전선에 확실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기에 죽일 수 있다면 당장 죽여야 할 인물이다.
‘환장하네…….’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내가 알던 이야기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이유는 2황자가 반역을 일으키는 것은 앞으로 2년 뒤이고, 므제크 후작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4년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앞으로 있을 스토리에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 최고 좋은 방법은 훗날 마신교로 배신할 귀족을 전부 처단하는 일이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있는 초상화의 두 인물도 빨리 처리하면 마신교에 대항하기 편해질 것이다.
다만, 저들이 배신한다는 것을 증명해 낼 방법이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말이다.
그나마 초상화의 두 인물에 관한 조사는 이미 끝냈는지 두꺼운 서류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1황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오래 고민하는군.”
나를 질책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흥미롭다는 듯 방금까지 소파 깊숙이 묻어 두었던 몸을 일으켜 기대한다는 듯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뭔가 알고 있다면 서슴없이 이야기하게. 허황된 일이든, 무엇이든. 예절을 무시해도 된다네. 그게 플레이어의 특권이기도 하니 말이야.”
무슨 말을 하든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1황자의 말에 나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둘 다 서둘러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시스템창이었다.
- 선택지에 없는 대답을 골랐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시스템창은 없었다. 대신 내 말에 1황자가 놀랍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이유는?”
‘제가 회귀했습니다’라는 대답을 할 순 없다. 하지만 회귀했기에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현재 서부 지방에 언데드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단순히 그것 하나만으로 결정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충분히 의심하고 서둘러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최근 서부 지방에서 넘어오는 NPC의 입에서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는 말이다.
당시에 나는 한참 아래에서 사냥하고 있었고, 검은 손 길드의 최정예 멤버가 이 시기에 이곳에 있었기에 거짓말이 아니다.
그게 진실이라는 듯 볼드모드 공작과 셀레스틴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1황자는 재촉하듯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마치 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진행하면 될 것 같은지 물어보는 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냥 말했다.
“2황자님의 외가는 서부 지방, 그것도 므제크 후작가의 집안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언데드가 발견된 것은 므제크 후작령이죠.”
“맞습니까? 볼드모드 공작님.”
내 말에 1황자가 물었다. 볼드모드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1황자는 어이없다는 듯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는 것이지? 이놈이 생각보다 날 만만하게 보았군.”
눈앞에 2왕자가 있다면 당장 죽일 법한 눈빛이었다. 그러고는 잠깐의 고민 끝에 옆에 달린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문을 열고 한 기사가 들어왔다.
“당장 황궁으로 다녀와야겠습니다. 크베니 경.”
“예, 전하.”
“이것을 폐하께 전해 드린 다음, 2황자를 데려오세요. 거부할 경우 무력으로 제압하셔도 무관합니다.”
“충!”
1황자는 황제에게 전할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셀레스틴이나 볼드모드 공작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니베라 후작만이 조금 놀랍다는 듯 1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쩝, 진짜 나도 모르겠다.’
뭐 하나 제대로 된 증거도 없다. 그냥 내가 기억하는 회귀 지식을 바탕으로 지금의 상황을 저질렀다.
이게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한 치의 미련이나 후회가 들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가 지금 월오룰을 즐기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 올랐다.
- 선택지에 없는 대답을 골랐습니다.
-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차후 이어질 스토리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 다음 퀘스트가 생성될 예정입니다.
눈앞의 시스템창에 나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전부 다 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 선택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듯 시스템창이 반응했고, 다음 퀘스트를 받기 위해 대기하란 말을 들었다. 그러니 눈을 감고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서걱, 서걱.
펜이 움직이는 소리 들려왔고, 이내 펜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육중한 갑옷이 철커덕거리며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들었을 때 눈을 떴다.
1황자가 내 맞은편에 다시 자리했고,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민망할 정도의 시선에 고개를 돌리기도 해 보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나로 향해 있었기에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점점 민망해지려는 탓에 다시 눈을 감을까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1황자의 입이 열렸다.
“아까워……. 플레이어만 아니었다면 말이야.”
그러면서 나와 셀레스틴 공주를 번갈아 본다.
그런 1황자의 시선에 셀레스틴 공주가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오.라.버.니.”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강조하는 탓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내 동생 효진이가 화를 낼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나와 1황자가 셀레스틴 공주의 눈치를 봤다.
“흠, 흠.”
1황자는 다시 나를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플레이어 시저 남작. 자네가 해 줄 일이 있네.”
“예, 1황자 전하.”
“얼마 전에 옛 바스티아 제국의 황궁이 있는 곳에서 엄청난 기운의 마기가 측정되었네. 그곳의 조사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옛 바스티가 제국의 황궁이 있던 폐허를 조사해라.]
메인 시나리오.
난이도 : 매우 어려움
내용 : 최근 그곳에서 엄청난 양의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원인을 조사해라.
보상 : 연계 퀘스트.
특이사항 : 없음.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메인 시나리오라는데 당연히 가야 한다.
황금 고블린이 준 보물 지도를 사용하기 위해서 어차피 가야 했는데 퀘스트까지 생겼으니 오히려 기뻤다.
1황자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그제야 셀레스틴 공주가 나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앞서 해 주신 일 덕분에 세드릭 제국 남부 지방은 마신교의 영향권에서 전부 벗어났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 보답이자 아바마마, 아니, 폐하께서 직접 포상을 내려주셨답니다.”
그와 동시에 공주의 손가락 한곳에 자리 잡고 있던 반지가 빼지더니 나를 향해 내밀었다.
“백작의 작위를 상징하는 반지예요. 기존의 반지는 저에게 주시고 이것을 끼세요.”
나는 공주의 말대로 기존에 끼던 반지를 빼서 공주에게 넘겼고, 새로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와 동시에 공주의 말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 올랐다.
“앞으로 귀족들과 마찰이 자주 있을 예정인데,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편해지시길 바라요.”
- 백작의 작위를 얻었습니다.
- 업적 ‘백작의 작위’를 획득했습니다.
- 모든 능력치가 +10 추가됩니다.
오랜만에 얻은 업적 소식에 슬쩍 웃으며 시스템창을 치워냈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부탁하려고 했던 일이다.
같은 귀족이라도 남작의 작위는 제일 아래 계급이다. 귀족들과 마주치는 동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녔는데, 이로써 조금은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맡겨만 주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해 드리겠습니다. 공주님.”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그 모습에 1황자가 다시 나를 향해 안타깝다는 시선과 함께 한마디 했다.
“잘 어울리는데…… 참 아쉬워.”
그 말에 다시 셀레스틴 공주가 1황자를 노려보기 시작했고, 급속하게 냉랭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도망치듯 벌떡 일어났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도망쳤다.
그리고 내 뒤에 니베라 후작이 따라붙었다.
“같이 가세.”
후작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굳은 얼굴로 따라왔다.
우리는 아무런 말 없이 계속해서 이동했다.
니베라 후작은 나드키아 백작의 성을 빠져나와서야 입을 열었다.
“정말 생각 없는가?”
“…….”
나는 가만히 니베라 후작 바라보았고,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여 중얼거렸다.
“날씨 좋네.”
아무래도 니베라 후작은 공주님보다는 1황자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마을 번화가로 이동했다. 니베라 후작은 여전히 내 뒤를 따라왔다.
* * *
그 시각, 옛 바스티아 제국의 황궁이 있던 폐허에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지팡이를 들더니 그대로 땅을 내려찍었다.
쿵!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본 그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빛이 뿜어져 나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새하얀 뼈가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조용히 웃는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