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143
평소보다 조금 이른 아침.
“아니, 새벽이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그런지, 해가 아직 뜨진 않았다.
평소라면 아직 자야 할 시간이다.
하물며 오늘은 일요일.
밤늦게까지 공부했을 효진이랑 영은이를 생각하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시리얼이다.
우유를 부어 만든 시리얼을 떠먹으며 컴퓨터를 켜곤 월오룰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딸깍, 딸깍.
몇 번의 클릭으로 새로운 글이 올라왔나 확인해 보았는데, 여전히 풀린 정보는 없다.
“뭐 당연하지.”
아무도 접속을 하지 못하는데 누가 정보를 퍼오겠는가?
서버라고 해킹한다면 가능할지 모르나, 그 정도 해킹 프로그램이면 남에게 팔고 한 건 챙겨서 빠지는 것이 좋다.
차라리 월오룰의 개발 업체인 라온 소프트의 직원이랑 친해져서 정보를 얻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철저한 보안으로 이렇다 할 정보가 풀리지 않는다고 한다.
회귀 전에 들은 이야기론 직원 하나가 몰래 풀어준 정보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 직원은 해고, 거기에 손해배상 청구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순식간에 게임상에서 삭제가 되기까지 했을 정도니, 라온 소프트의 대처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은 게시판에서 상주하며 플레이해야겠네. 어차피 크세이트 공작령에는 못 들어가고, 직접 걸어서 가야 하니까 문제는 없네.”
대충 오늘 일정이 잡혔다.
지금 나는 크세이트 공작령에 들어가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들어가는 것이 꺼려진다는 표현이 옳다.
메인 시나리오 때문에 크세이트 공작과 등을 지게 되었다.
시스템창의 내용에 따르면 직접적인 적대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 직접적인 적대가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내 목숨을 노린다거나,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거나 같은 것들 말이다.
이거 얼마나 다행인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크세이트 공작이 누군가? 세드릭 제국에서 둘밖에 없다는 공작이며 엄청난 강자다.
그런 NPC가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오며 내 목숨을 노린다고 생각해 봐라.
엄청 피 말리겠지.
상상만으로도 그 끔찍함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내가 이렇게 몸을 떨며 무서워하는 이유도 있다.
회귀 전에 한 유저가 NPC의 추격을 받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그 유저는 그걸 방송 콘텐츠로 삼았다.
일부러 NPC를 건드려 자신을 추적하게 하였고, 그대로 브리타니아 대륙 전역을 떠돌며 NPC의 추적을 피해 다녔다.
물론 그게 재미가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
“완전 꿀잼이었지.”
하물며 그 플레이어의 캐릭터 네임도 쇼쌩크였다.
마치 한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 네임이었고, 그는 정말로 NPC를 상대로 석 달이 넘는 도주기를 찍었다.
당연히 조회 수는 엄청났고, 캐릭터 하나를 포기하고 다시 키워도 남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뭐, 중요한 건 쇼쌩크가 아니고 NPC의 집요함이다.
전역에 수배서를 뿌려 현상금을 걸기도 했고,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올 기세로 수많은 병사를 풀기도 했다.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안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크세이트 공작은 중요한 분기점에서 한번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이것 하니만큼은 알 수 있다.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든가, 아니면 그 결정에도 이겨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기르든가.”
결과적으로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소리다.
조금 있으면 점검 시간이 끝날 것이다.
크세이트 공작령에서 오시리크 자작령까지 향하는 마차라도 타면 금방 갈 수 있겠지만, 지금 나는 그 크세이트 공작령에 들어가기가 상당히 꺼려진다.
어제 로그아웃하기 전의 병사들의 눈빛은 크세이트 공작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한 나쁜 놈을 바라보는 듯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뿐만 아니라 영지에 머물고 있는 영지민 또한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데 있어서 문제가 있을뿐더러 그 시선이 영 곱지 않을 터니 자연스럽게 꺼려지는 것이다.
“뭐, 그냥 정보 확인하며 걷는다 생각하지 뭐. 아니면 범이 등에 올라타도 되고.”
허락을 해 줄까 싶지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안 그래도 덩치가 커진 범이의 등에 올라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이번이 기회인 것 같다.
나는 컴퓨터를 끄고 먹었던 그릇을 치웠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들르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니 서버가 열리기 5분 전이었다.
“그럼, 즐겨볼까?”
나는 캡슐에 누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시간이 되었을 때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 * *
[Welcome to the World of Ruler]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환영 문구와 함께 내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허…… 엄청나네.”
이른 아침이자 막 서버가 열린 시점인데 놀랍게도 동시 접속자가 많은지 순식간에 성벽 앞이 유저로 가득 찼다.
“와! 드디어 열렸다.”
“기다리다가 지칠 뻔했다고!”
“자, 점검은 뭘 한 거냐?”
“뭔가 바뀌긴 함? 공홈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던데.”
“야, 이 멍청아. 월오룰인데 당연히 그걸 알려주겠냐?”
“오픈 월드를 지양하는 게임이니 당연히 우리가 알아서 찾아내야지.”
“먼저 정보 캔 놈이 돈 번다. 얼른 얼른 움직여!”
“어이, 형씨! 길 막지 말라고! 뚝배기 깨 버린다!”
접속과 함께 요란하게 떠드는 유저들 덕분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흥분에 가득 찬 얼굴은 물론이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이미 기대치가 한계점에 달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 나를 발견한 몇 유저가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다.
“시저다.”
“보상으로 뭘 받았을까?”
“부럽다.”
같은 내용이 전부였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뜨려 했다. 아무래도 과도한 관심은 게임 플레이에 방해되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한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시저 남작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크루트가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크루트는 혼자가 아닌 기사 둘과 함께 왔다.
성벽 너머로 들어가지 못하는 내 상황을 이해해 주는 것인지, 우리는 오크틴 협곡으로 향하는 길에서 다른 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남작님께서 하신 선택이 옳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입을 열자마자 하는 말은 다름 아닌 사과였다. 그리고 예상도 못 한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어머님과의 추억도 추억이지만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어머님의 유일한 유품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해합니다.”
뭐, 이해해야지.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약속했던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게 물건을 내밀었다.
- [크세이트 공작의 부탁]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나는 받은 물건을 손에 들고는 정보를 확인했다.
[마스터 스킬 북]
등급 : 레전더리
레전더리 등급의 스킬 북을 MAX로 올려주는 스킬 북이다.
‘헐, X발? 여기서 이게 나온다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쌍욕. 하지만 이건 쌍욕을 부를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물건이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스킬 북이 무엇이냐면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스킬 북 설명에 나와 있지 않은가?
레전더리 스킬 중에 레벨이 있는 녀석을 단숨에 마스터로 만들어 주는 녀석이다.
회귀 전을 기준으로 따지자면 이 물건이 등장하는 것은 앞으로 7년은 더 뒤에 있는 일.
그러니 월오룰이 오픈하고 8년 차쯤에 등장한 녀석이다.
당시 누군가 한 인던을 클리어하고 얻은 물건으로, 이 아이템을 얻자마자 바로 경매장에 올렸던 물건이다.
당연히 반응은 뜨거웠고, 최초 등장과 함께 100만 달러라는 금액에 팔렸다. 경매장 역사상 가장 비싼 물건으로 불렸던 녀석이다.
그 물건을 판 유저는 하루아침에 돈벼락을 맞고는 월오룰을 접었다고 들었다.
‘대박 터졌네.’
하물며 난 지금 이 스킬 북을 어디에 써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내가 진행할 사냥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것도 개꿀로 말이다.
“그리고 이것도 있습니다.”
스킬 북으로 끝나지 않았다.
크루트는 아직 줄 것이 남았다는 듯, 나에게 손을 더 내밀었다.
“저와 함께 오크를 사냥하실 때 나온 정산금입니다. 부산물의 가격은 저희가 사들이는 시세로 측정했고, 거기에 저를 교육해 주신 교육비까지 포함해 일만 골드입니다.”
첫 번째로 꺼낸 묵직한 돈주머니.
안에서 금화가 부딪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크루트가 내미는 금화 주머니는 하나가 아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주머니까지 나에게 넘어왔다.
도합 삼만 골드.
추가로 준 이만 골드는 다름 아닌 되살아난 오크의 왕을 죽인 것과 수많은 오크를 죽인 보상금이자, 영지를 무사히 지켜준 보답이라고 했다.
“다른 플레이어도 있는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
하지만 크루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남작님께서 미리 오크 족장의 숫자를 줄이지 않았다면 저희가 이기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도 정산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며 확실하게 계산해 왔다며 뿌듯하게 말하는 크루트였다.
“비록 어머님의 유품은…… 아닙니다. 저희 크세이트 공작령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루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동생과는 한 살 차이고, 어머니가 마신교에 납치되었을 때가 크루트가 두 살일 때라고 한다.
살아 있는 어머니가 아닌 그림으로만 보았던 어머니라, 어머니에 대한 건 아버지인 크세이트 공작에게 들은 이야기뿐이라고 한다.
당연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자신의 그리움보다는 대륙의 평화를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며 괜찮다는 말을 했다.
“마신교는…… 제가 꼭 쓰러뜨리겠습니다.”
“꼭 부탁하겠습니다. 아마 아버지께서도 인정하실 겁니다.”
그렇게 크루트는 마지막 인사로 나에게 고개 숙이고는 크세이트 공작령으로 가 버렸다.
순식간에 삼만 골드가 생겼다.
전부 인벤토리에 집어넣었고, 내 손에 들린 마스터 스킬 북을 바라보았다.
“어쩔까나.”
사용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팔아 버릴 것이냐? 이건 상당히 중요한 고민이다.
당장 마스터 스킬 북을 손에 쥐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걸 사용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 하나만 팔아도 앞으로 몇십 년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8년 뒤에 100만 달러에 팔린 물건. 지금 당장 팔아도 그에 비슷한 가격에 팔릴 거다.
그 정돈 아니더라도 상당한 가격에 팔 수 있는 물건임은 확실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레전더리 스킬의 레벨을 단숨에 MAX로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근데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잠깐의 고민.
나는 금방 고민을 떨쳐낼 정답을 찾아냈다.
“그래. 일단 인벤토리에 있는 스킬 북을 다 개봉하고 생각하자.”
지금 당장에도 마스터 스킬 북에 어울리는 스킬이 있긴 하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하게 사용해서 레벨을 올려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모든 스킬을 뽑아놓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스킬 뽑기 권 사용!”
내 외침에 인벤토리에 있던 스킬 뽑기 권이 전부 사용되었다.
언데드가 된 오크 왕을 쓰러뜨리면서 얻은 네 장과 오크 웨이브를 통해 얻은 한 장까지.
지금 내 레벨은 360이었고, 총 다섯 장의 스킬 뽑기 권을 사용할 수 있다.
다섯 개의 구슬을 손에 쥐었고, 떠 오르는 시스템창에 나는 웃었다.
“하…… X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네.”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