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138
나는 스컬 대검이 아닌 천마검을 들고 당차게 앞으로 뛰어갔다.
‘쩝, 봉인이 풀렸다면 더 확실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천마검의 봉인은 아직 풀지 못했다.
그럼 그 봉인을 풀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는 불가능하다.
봉인을 풀 수 있는 조건 세 가지 중 한 가지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은 다음 아닌 본인보다 레벨이 100 이상 차이 나는 상대를 사냥하는 것과 홀로 사냥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인간형 몬스터야 한다는 것이다.
눈앞의 오크의 왕의 경우 레벨 차이와 홀로 사냥한다는 조건은 충족되지만 인간형 몬스터가 아니다.
‘조금 아쉬워.’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
사실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는 것도 웃긴 일이다.
아무래도 회귀 전의 스텟의 몸이라 그런 것 같다.
처음 보았을 때 사냥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우리 애들이 당했을 때 분노했던 내 심장이 지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뭐라 할까. 지금의 나는 베스트 상태라는 것이다.
‘조건도 비슷해.’
심지어 회귀 전과 비교해서 스킬도 부족하지 않다.
부족한 게 있다면 도발이라든가 방어력을 올려주는 스킬이 없긴 하다만, 어차피 혼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네 가지 스킬로도 충분하다.
“오러.”
우우웅 하며 순식간에 검에 오러가 피어올랐다.
“오호! 제법.”
그런 내 오러를 본 오크의 왕이 흥미롭다는 듯 시선을 주었다.
마치 기대하지 않았던 장난감에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는 듯한 시선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어디, 그 시선이 언제까지 이어지나 보자고.
빠르게 접근한 나는 검을 휘둘렀다.
스킬이 아닌 순수한 내 근력 스텟을 기반으로 한 베기였다.
까앙!
내 검은 오크의 왕의 도끼에 막혔다.
히죽.
오크의 왕이 웃었다.
여전히 불쾌하기 그지없이, 어림도 없다는 듯한 시선이다.
그 시선 아래 나는 아무렇지 않게 검을 들고는 또 한 번 휘두를 뿐이다.
깡!
왼쪽 허벅지를 노린 내 검이 도끼의 날에 막혔다. 하지만 이 공격은 다음 공격을 위한 공격이다.
도끼의 날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무게를 실어 허벅지를 베었다.
서걱.
처음 노렸던 왼쪽 허벅지가 아닌 오른쪽 허벅지를 베며 가랑이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이동했다.
충분한 거리를 두기 위해 뒤로 세 발자국 물러난 내가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제법. 잔재주는 있구나.”
오크의 왕이 뒤를 돌며 나에게 말했다.
방금 내가 베고 간 허벅지에는 피나 고름이 흐르지 않았다. 오러를 머금고 있기에 피와 고름이 그 자리에서 타 버렸기 때문이다.
오러에 의한 공격을 받으면 불로 지진 듯한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언데드가 되어 버린 오크의 왕은 그러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대신 얼굴에는 아까보다 더욱 짙은 호기심을 피웠다.
“살아생전에 내 몸에 수많은 상처를 입혔던 기사가 있었다. 모조리 내 손에 찢어 죽였다만……. 그들은 내 몸에 상처를 내지 못했지.”
과거를 회상하는 오크의 왕.
“홀로 나에게 덤벼 처음으로 상처를 입혀준 두 번째 인간이여. 이름을 말해라.”
갑작스럽게 내 이름을 물어봤다.
두 번째라니 그것도 신비한 일인데, 이름을 물어보는 게 더 신비했다.
그 순간, 나는 얼마 전 크루트가 말해 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 크루트가 말했던 것이 진짜였을 줄이야.
놀라 오크의 왕에게 대답해 주었다.
“시저다.”
“좋아. 시저.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해 주마.”
양손에 들린 도끼를 고쳐 잡더니 나를 향해 진득한 살기를 뿜어냈다.
“영광으로 알게. 오직 한 존재를 위해 투기(鬪氣)를 사용하는 것은 두 번째니.”
그와 동시에 오크의 왕의 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졌다.
심장 부근에서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나와 오크의 왕 주변을 감싸듯이 휘감았다.
그 기운이 두 자루의 도끼에 모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마치 기사들이 사용하는 오러 블레이드와 흡사한 형태로 두 자루의 도끼에 머물렀다.
그 기운의 색은 기사들이 사용하는 푸른색이 아닌, 마신교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은색도 아닌 붉은색의 기운이 두 자루의 도끼에 머물렀다.
“한번 받아보게나.”
그와 동시에 오크의 왕이 나를 향해 도약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투기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두 자루의 도끼가 동시에 나를 반으로 갈라 버릴 기세를 뿜어내며 휘둘러졌다.
“미친, 뭘 받아!”
나는 오크의 왕이 도약하는 그 순간에 바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오크의 왕의 투기는 피부로도 느껴진다.
저릿저릿한 것이 보통의 기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 기운을 머금은 도끼를 정면으로 받는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당연히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콰아앙!
두 자루의 도끼가 바닥에 떨어지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땅이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그냥 눈으로 보아도 엄청난 위력이다.
“하하하. 그렇다면 피해 보게나.”
오크의 왕은 재밌다는 듯 나를 향해 또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쾅! 쾅!
두 자루의 도끼는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일격 하나하나에 엄청난 힘이 실려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지면이 박살 나는 소리가 멎지 않았다.
지금 내게 위협적인 것은 두 자루의 도끼만이 아니었다.
쿠과가가.
흡사 덤프트럭이 나에게 정면으로 달려드는 듯한 위협감을 주는 오크의 왕의 거대한 몸이다.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신체가 위협적이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나를 더욱 압박한다.
그 때문에 몸뚱이가 자연스럽게 움츠러들었다.
근데 또 웃긴 건 움츠러들기 싫어 강렬하게 저항하는 중이라는 거다.
나를 쪼개기 위해서 휘둘러지는 두 자루의 도끼.
피하고자 바라보던 중에 피할 만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높아진 민첩 스텟의 영향으로 늘어난 동체시력이 두 자루의 도끼 사이를 발견했고, 충분히 그곳을 통과할 수 있으리란 걸 알았다.
탓!
지면을 박차고 달리며 순간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초인적인 집중력 때문일까. 빠르게 움직이던 오크의 왕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느려지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내 몸 또한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머리는 팽팽 빠르게 돌아갔다.
두 자루의 도끼를 바라보며 빈틈 사이로 내 몸을 구겨 넣었다.
“취익?!”
내 행동 때문인지 오크의 왕의 콧바람이 뿜어졌다.
뜨겁고 거친 콧바람이 내게 닿기도 전에 나는 이미 검을 앞으로 곧게 뻗었다.
그리고 외쳤다.
“찌르기!”
확실한 대미지와 정확한 공격을 위해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이 정상적으로 발동되었다.
푸우욱! 치이이익!!
오러를 머금은 검이 오크의 왕의 몸을 태워 갔다.
흘러나오는 피와 고름은 물론이고 썩어가던 피부까지, 태울 수 있는 건 전부 태웠다.
‘아직이다!’
아직 빈틈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크의 몸통을 찔렀던 내 검을 빠르게 빼내고 위로 번쩍 들어 아래로 그으며 외쳤다.
“세로 베기.”
스킬의 보정을 받은 내 검이 오크의 왕의 살을 가르며 아래로 휘둘러졌다.
그 시작 지점은 처음 사냥하기 위해 피이가 피워두었던 멸화가 있던 자리였다.
검 끝에 붙은 멸화의 불길이 검의 휘두름이 멈출 때까지 따라붙었다.
화륵! 화르르륵!
순식간에 멸화의 불길이 치솟았다.
미약하게 꺼져가는 불길에 기름이라도 부어 화력을 키워낸 것처럼 급작스럽게 불길이 크게 부풀어 올라 버렸다.
“어라?”
순간 엄청난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던 나조차 당황할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그런 나보다 오크의 왕이 더 당황했다.
“크아아악!!”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던 오크의 왕의 입에서 처음으로 끔찍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근처에 있는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 뒷걸음질을 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옆으로 던지고는 몸에 붙은 불을 끄려 했다.
쫘악! 쫘악!
저 두텁고 커다란 손이 가슴 부분에 타오르는 불길을 끄기 위해 몸을 두드렸다.
하나 멸화의 불길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손바닥에 상처가 점점 벌어졌고, 벌어진 상처에 멸화의 불길이 옮겨붙어 그 불길을 더욱 키워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알게 되었다.
“멸화의 불길을 직접 키울 수 있구나.”
멸화가 피어 있는 곳을 시작으로 상처가 생기면 그 상처를 따라 불길이 커진다.
이거라면 앞으로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더욱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원래라면 그냥 내버려 둬도 언젠가는 멸화의 불길에 영혼마저 다 타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몰랐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디버프용이라 생각했었다.
이제는 사용법이 달라졌다.
멸화의 불길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공격해 불길을 키우면 된다.
그것을 증명하는 뜻 실시간으로 오크의 왕 머리 위에 있는 HP 바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말이다.
멸화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영혼마저 빠르게 불태울 수 있게 된 거다.
자, 이제 멸화의 사용법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노려야 할 곳은 뻔했다.
“하앗!”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내가 상처를 낸 곳은 오크의 상체의 일부뿐이다.
그러니 저 상처를 전신으로 이어가면 그만큼 멸화의 불길이 번질 것이고, 그 효과로 HP가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뒤로 물러나는 오크의 왕이 다시 접근한 나를 발견했는지 소리쳤다.
“노옴!”
지금까지 나를 하찮게 바라보던 시선이 처음으로 달라졌다.
저 눈빛은 확실히 나에게 겁을 먹은 눈빛이다.
그렇겠지. 언데드가 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던 몸에 고통이라는 것을 새겨줬으니 말이야.
겁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크의 왕이 한 손에 남은 도끼를 나를 향해 휘둘렀다.
부우우웅!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하나 이전과 같은 날카로움이라든가 강력함은 전혀 없었다.
그저 몸에 붙어 있는 불길을 끄기 위한 발버둥이자 고통을 더 늘이지 않기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예리함이 사라진 공격에 집중력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쾅!
그냥 보고 피하면 된다.
오크의 왕의 공격을 피하며 나는 천천히 접근했다.
그런 나 때문에 화가 많이 났는지 버럭 소리치는 오크의 왕이다.
“뭔데 불길이 꺼지지 않느냔 말이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뒤로 몸을 날려 흙바닥을 한 바퀴 굴러 본다.
“허?”
왕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진 행동이다.
아무리 언데드라 고통을 느끼지 못하다가 느꼈다고 해도, 영혼까지 불태우는 불길이 붙었다 하더라도 지금 눈앞의 놈은 이곳 오크틴 산맥의 왕이었다.
하나 지금의 모습을 봐라. 왕의 위엄이라곤 하나도 없다.
지금은 그저 고통에 벌벌 떠는 한 마리의 몬스터일 뿐이었다.
“가치도 없는 놈.”
나는 사냥할 의욕이 확 줄었다.
이런 상태라면 더 이상 내가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애들아.”
내 부름에 내 소환수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오크의 왕을 상대하는 시간 동안 충분히 체력을 회복했는지 천천히 오크의 왕을 향해 다가갔다.
“피이!”
하늘을 날며 자리를 피해 있던 피이가 다시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오늘 최고는 피이네.”
“피이~”
손가락을 들어 머리를 긁어주자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낸다.
그런 피이 너머로 팅고가 먼저 움직이더니 오크의 왕이 던져두었던 도끼를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안 그래도 무기가 없던 팅고에게 무기가 생기는 순간.
오크의 왕에게서 남은 한 자루의 도끼도 뺏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끼에륵!”
갑자기 팅고 녀석이 크게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팅고의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이다.
이 기운은 불과 몇 분 전에 느꼈다. 그걸 느끼게 해 주었던 존재는 지금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서, 설마?”
나는 놀랍다는 듯 팅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는다는 듯 시스템창이 떠 올랐다.
- 소환수 ‘팅고’가 스킬 ‘투기’를 익혔습니다.
- 소환수 ‘팅고’가 투기를 머금고 스킬 ‘치명적인 일격’을 시전합니다.
- 추가 대미지가 상승합니다.
- 크리티컬 확률이 상승합니다.
- 기본 대미지가 상승합니다.
팅고의 손에 들린 도끼의 날에 엄청난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팅고가 오크의 왕을 향해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서걱, 콰앙!
도끼는 오크의 왕의 몸을 반으로 쪼갰고, 그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증명해 주는 듯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 오크의 왕을 쓰러뜨렸습니다.
저 말을 시작으로 시스템창이 밀려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