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58
벌써 몇 마리의 몬스터를 내 손으로 베어냈는지 알 수 없다.
내 시야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경험치 획득을 알리는 시스템창과 쌓여만 가는 경험치만이 내가 사냥을 하고 있음을 알려 줄 뿐이었다.
전신을 뒤덮고 있는 몬스터의 피로 이미 코가 마비되었다.
연이어 휘두른 검 때문에 팔뚝은 묵직해져만 가고 손목에서는 시큰한 감각이 올라왔다.
발끝에 걸리는 것은 전부 몬스터의 시체다.
성가실 정도로 많은 시체 때문에 자세나 균형이 무너질 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치워내고 싶어도 밀려드는 몬스터로 인해 차라리 앞으로 한 발 전진하며 시체가 쌓여 있지 않은 공간으로 밀어내는 것이 현명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있는 감각 전부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들이다.
“하앗!”
기합을 내지르며 손에 쥐고 있는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서걱.
검 날에서부터 타고 오는 살을 베는 감각은 억지스럽다.
날카로운 쇠가 몬스터의 살을 가르고 뼈를 베어내므로 뿜어져 나오는 몬스터의 진한 붉은색의 피를 보는 과정은 고작 1초의 시간이다.
고작 1초의 순간이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승리자에게는 보상을!
나는 그 승리자만 가질 수 있다는 보상을 위해 그저 검을 휘둘렀다.
그 보상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한 자리에서 죽인 몬스터의 숫자가 백을 넘겼습니다.
-업적 ‘일당백’을 획득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추가됩니다.
-몰려드는 몬스터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서 싸웠습니다.
-업적 ‘용맹한 자’를 획득했습니다.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 시 모든 능력치가 +10% 추가됩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다량의 경험치가 들어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줄지어 올라오는 시스템창에 나는 방금까지 미친 듯이 휘둘렀던 검을 검집에 넣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
돌발 퀘스트로 인해 몬스터 웨이브를 한 차례 막아 낸 흔적은 참혹하다.
바닥에 보이는 것은 코볼트 광부의 시체뿐이었고, 피로 질퍽해진 바닥엔 신체 일부나 장기가 뒹굴고 있다.
참혹한 광경.
하지만 이것은 승자만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광경이자 내가 얻을 전리품이기도 하다.
“둘 다 고생했어.”
이 광경을 나 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내 옆에서 함께 싸워 준 범이와 팅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냐앙…….”
“충!”
범이와 팅고의 모습은 나랑 비슷했다.
흠뻑 뒤집어쓴 코볼트 광부의 피와 살점으로 엉망이다.
범이는 어떻게든 몸을 흔들어 피와 살점을 털어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혀를 빼어 그루밍하려다가 화들짝 놀래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냐앙…….”
어떻게든 해 달라는 뜻인데 지금 당장 해 줄 방법이 하나도 없어 나도 모르게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 범이와 다르게 팅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드문드문 보이는 초록색의 피를 보니 코볼트 광부의 공격을 전부 피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절로 짠해졌다.
방패라도 있었다면 덜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하나 구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유의 빛.”
-스킬 ‘치유의 빛’이 팅고의 체력을 회복시켜 줍니다.
조금의 부상이라도 회복시켜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치유의 빛의 구슬이 팅고의 몸에 스며드니 숨소리가 아까보단 한결 편해졌다.
“고생했어. 범이는 이거 먹고, 팅고는 주변에 몇 마리 잡아먹고.”
나는 범이에게 먹을 것은 몇 개 던져 주곤 나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눈앞에 도축해야 할 몬스터가 수도 없이 많지만, 이걸 전부 다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돈이라 생각하면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얼른 인던을 클리어하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긋지긋하잖아. 이미 동굴만 4일 차다.
얼른 밖으로 나가 햇살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니 잠깐 휴식이다.
“냐앙?!”
이제 앉아서 휴식을 즐기려는데 갑작스럽게 범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쏜살같이 앞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 또한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이야. 어디 가!”
내 외침에 ‘냥!’하고 소리친다.
방금 주었던 먹이도 내팽개치고 달려가는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았다.
저 먹보 뚱냥이가 그럴 리가 없거든.
하는 수 없이 범이가 간 방향으로 달려갔고, 몇 걸음 가지 않아서야 나는 범이가 왜 뛰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졸졸졸.
어디서 들려오는 물소리.
범이가 이 소리를 나보다 먼저 듣고 달린 것이다.
“오!”
정말로 얼마 가지 않으니 그곳엔 물웅덩이가 있었다.
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바닥에 고여 있었는데, 완전히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한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니 썩어 있진 않은 것 같다.
범이가 그 흐르는 물에 들어가 몸을 씻어 내고 있었다.
“냐~앙. 냐~앙.”
뭐지. 내가 알기론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는 편이라고 들었다.
근데 지금 범이의 모습을 보면 물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같은 기분 들었다.
정말이지 어렵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자니 범이가 나를 향해 울었다.
“냥!”
얼른 와서 안 씻기고 뭐 하냐는 듯한 울음소리.
“네, 네. 모시겠습니다.”
어쩌겠는가? 난 범이의 집사인걸.
얼른 다가가 조심스럽게 범이의 몸에 묻은 코볼트의 살점과 피를 씻겨 냈다.
나도 거기서 몸을 대충이나마 씻어 냈고, 식사를 마친 팅고는 그대로 물웅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풍덩!
팅고의 무릎까지밖에 안 되는 물웅덩이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튀는 물.
방금 깨끗하게 씻고 몸을 말리기 위해 열심히 그루밍하던 범이에게도 튀었다.
“냐앙!”
화가 난 범이가 그대로 팅고를 향해 다가가 주먹질을 했고, 팅고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미안. 사과한다.”
보아하니 서열은 범이가 더 위인 것 같다.
레벨만 따지면 팅고가 훨씬 높은데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뭔가 서열이 있는 것 같다.
“나만 모르는 소환수들의 공간 같은 게 따로 있는 것 아냐?”
아니겠지. 진짜 있겠어?
혼자 스스로 한 헛소리에 잠시나마 낄낄 웃었다.
“좀만 더 쉬고 있어 봐.”
나는 둘에게 휴식을 권했다.
그 이유는 아까 물웅덩이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가 이제야 발견한 새하얀 해골 때문이었다.
해골들은 한쪽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두개골을 제외하곤 다른 뼈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두개골 사이로 둥그런 물건이 하나 있기에 주워 보았다.
[신성 교단의 흔적을 획득했습니다. 1/10]
“아…….”
내가 주운 것이 뭔지 알게 되는 순간, 눈앞 두개골의 정체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부디 좋은 곳에 가시실.”
잠시나마 NPC들을 위로하는 말과 함께 두개골을 치웠고, 그곳에 있는 아홉 개의 물건을 전부 챙긴 다음, 땅을 파서 모두 한곳에 잘 묻어 드렸다.
그러자 퀘스트 창에 있던 서브 퀘스트의 내용이 이리엘을 찾아가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자, 그럼 이제 가 볼까?”
이제 남은 것은 바로 저쪽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이다.
내 말을 들었는지, 팅고와 범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자, 그럼 들어가자.”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인스턴스 던전에 입장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 입장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에 근접한 플레이어가 입장했습니다.
-인스턴스 던전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마신교의 비밀 기지에 입장했습니다.
[마신교의 비밀 기지]
난이도 : 매우 어려움
최대 입장 수 : 제한 없음
입장 조건 : 메인 퀘스트에 다다른 자.
공략 조건 : 마신교의 비밀 기지를 발견해라.
보상 : 연계 퀘스트
특이 사항 : 단 한 번의 기회뿐입니다.
이게 뭐냐.
내 눈에는 연이어 올라오는 시스템창이지만, 단 세 줄만 보였다.
첫 번째는 ‘마신교의 비밀 기지에 입장했습니다.’였다.
일단 마신교의 비밀 기지는 충분히 예상했던 범위 안에 있던 것이다. 회귀 전의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지금 받은 퀘스트로 추측이 가능했던 일이다.
“좀 놀랍긴 해.”
내 추리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는 게 많이 신비했다.
이 정도면 맨날 할아버지 명예를 팔아먹는 탐정이랑 마취총이랑 축구공으로 사람이나 괴롭히면서 자기가 탐정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꼬맹이랑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기분이다.
아니, 뭐. 그런 기분이라고.
그냥 한번 어깨에 힘 좀 줘 보고 싶을 뿐이다.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날 환장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공략 조건이다.
“이거 또 미궁이라는 소리잖아?”
설명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건 또 한 번 복잡한 미궁 속을 돌파해 마신교의 비밀 기지를 찾으라는 소리다.
설마…… 재수 없게 또 하루를 여기서 보내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닐 거다.
그랬다간 큰일 난다.
더 이상 범이의 투정을 받아줄 용기가 부족하거든.
“일단 가 보자.”
어쩔 수 있겠는가? 일단 가야지.
범이와 팅고를 데리고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한 10분은 충분히 걸었던 것 같다.
“역시나, 없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원래 이게 정상인지, 가는 길에는 몬스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미래 지식 그대로라 안심했고, 아마 저 모퉁이만 돌면 타미르가 반지를 획득했던 그 장소가 나타난다.
“쉿!”
나는 범이와 팅고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와 함께 조심히 걸었다.
이제는 진짜 조심해야 할 구간이니 말이다.
팅고는 내 제스처를 따라 하며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범이야. 뭐, 원래 조용히 걸었으니 문제가 없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았다.
“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감탄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놀라움에 튀어나온 말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내가 알던 미래 지식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장면이었다.
분명 작은 공간이어야 할 곳이 커다란 회랑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 기준이자 6시 방향이라고 쳤을 때 정면인 12시에는 커다란 동상이 있었다.
인트로 영상에서 볼 수 있었던 마왕 세지아르의 동상 말이다.
그 동상 아래 검은색의 로브와 대비되는 새하얀 백발에 수염을 기른 노인이 해골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위대하신 마왕 세지아르 님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의 중얼거림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다.
한마디 한마디 읊조릴 때마다 해골 지팡이에서 검은색의 물결이 뿜어져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그 검은 물결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회랑 한가운데 그려져 있는 커다란 마법진에 다다랐다.
회랑의 절반가량을 채운 마법진이었는데, 그 마법진을 중심으로 수십 명의 검은색 로브를 입은 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해골 지팡이를 들고 동상 아래 있던 노인과 같은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모습을 보면 딱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이건…… 누군가를 소환하는 의식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뭐 별건 아니다.
다른 게임이나 소설 속에 보면 꼭 저렇게 해골 지팡이나 무언가를 들고 마법진을 향해 주문을 외워 누군가를 소환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월오룰도 게임이니까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띠링!
내 예상이 맞는다는 듯 거기에 시스템창이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