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episode(20) 신과 함께#9
멀찍이 떨어져 <안락국>의 성좌들이 죽는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소별왕. 사실, 어느 집단이건 우두머리만 처치하면 그 집단은 힘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전 우주에서 함께한 그들이 더 이상 죽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덤벼든다면 죽일 뿐이었지만.
그러나 소별왕은 여전히 묵묵부답일 뿐, <안락국>의 성좌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한 걸음을 떼어내며, 여섯 자루의 검이 성좌들을 찢어발겼고.
촤르르륵.
이제는 인간의 그것을 넘어선 파천신군의 무공이 성좌들을 재로 만들어냈다.
쿠쾅!!
만개의 벼락과 여섯 자루의 검만으로 이 정도의 강함을 보이는데도, 소별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지는 예측조차 가질 않았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신단수에 매달린 형의 영혼이 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신단수에 모여든 성좌들은 약했다. 대부분이 최전선에 있었으니,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들 중에 그나마 강한 이를 꼽으라면 삼족오와 소별왕 정도일까.
버프 시간을 체크하며 한참을 싸워댄 결과, 대부분의 성좌가 무로 돌아갔다. 남은 건 이민영의 배후성인 오늘이와 내게 성흔을 넘겨준 삼족오. 그리고 여전히 나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소별왕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무엇으로 보일까?
제 보금자리를 파괴하는 악마? 한반도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키워낸 성운 <안락국>을 멸망시키는 악귀? 아니, 사실 아무런 것도 알 수 없다.
그들의 죽음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소별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부 죽었는데도, 그 눈빛은 여전하군.”
“……”
삼족오의 한쪽 날개가 찢어져, 이제는 날지도 못하는 그.
이민영과 같이 버프를 줄 수 있는 성흔들 만으로는 내게 대항도 하지 못하는 그녀.
자신의 수하들이 죽어 나가는데도, 아무런 감정도 보이질 않는 소별왕.
계속해서 소별왕을 향해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가게 두지 않겠다…!!”
“……당신의 홍염은 제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은인이라 할지라도…. <안락국>을 멸하게 둘 수는 없네.”
“이게 당신들의 운명일 뿐입니다.”
삼족오는 내가 사용하던 홍염을 더욱더 거세게 발화시켰다. 오늘이가 버프를 사용하며 더욱 거세진 불길이었건만. 같은 홍염의 사용자인 내게, 더욱더 강해져 이제는 성흔을 내려준 본인보다 강해진 내게는 아무런 치명상도 입히질 못했다.
그렇게 걷기를 몇 걸음.
저벅, 저벅.
소별왕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화륵!!
삼족오의 홍염이 끊임없이 나를 막아냈고.
“제발, 이쯤 하세요…!!”
오늘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만났을 때, 나를 처음 보는 태도를 보였지만 결국 나를 도운 이들을.
<안락국>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내 편에서 도움을 주었던 이들을.
전 우주에서의 기억이 있었음에도, 나를 진즉에 죽일 수 있었으면서도 그저 지켜봐 줄 뿐인 이들을.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다.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죽을 테고, 형은 살아남지 못할 테니. 이것이 성운 <안락국>의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
[스킬, [칠정안(七情眼) LV.MAX]이 발동합니다.]
화안 금정의 발동이 취소되면서 칠정안이 양쪽 눈에 완전히 개화되었다.
“큭…!!”
이전에는 없었던 고통이 양쪽 눈에서 거칠게 일어나자, 나도 모르게 조그마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별왕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너라면, 내 속마음쯤이야 간단하게 읽어내겠지.”
“지금 뭐라고….”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은 후, 시선을 소별왕에게로 향했다.
‘미안하다, 안아.’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소별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의 첫 마디는 사죄였으며.
‘이렇게 해야지만 너희 두 형제가 살 수 있다.’
“지금 뭐라고!!”
미간이 좁혀져 찌푸린 인상을 소별왕만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는데,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다음 우주로 이어지면 그때 우리의 행동이 왜 이런 것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신…!!!”
소별왕을 향해 일갈하려는 순간.
‘우리의 선택이 올바른 길이었음을, 한반도와 성운 <안락국>은 너희 형제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갚는 은혜이니 받아들이거라.’
소별왕은 나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한쪽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알 수 없는 말들과 그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번쩍!
소별왕이 들어 올린 손에서 빛이 발아하며 이번에야말로 속마음이 아닌, 소별왕의 목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우리 <안락국>은 너희 두 형제를 영원토록 지켜보겠노라.”
소별왕이 만들어낸 빛은 곧, 소별왕 자신에게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신단수가 반응하니 둥그런 영체가 밑으로 내려오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삼족오, 오늘이는 듣거라.”
상처입은 두 성좌가 소별왕 앞에 섰고.
“지금부터는 <패러독스>가 곧 <안락국>의 의지니, 그들을 지켜주거라.”
두 성좌는 이유 따위 묻지 않았다. 그저 <안락국>의 의지라는 말이 그들의 의지나 다름없었기에. 소별왕은 그 말을 끝으로 먼지가 되어 산화했다.
스스스스.
알 수 없는 상황에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두 성좌에게 물으면 무언가 알 수 있을까? 아니, 두 성좌도 모를 것이다. 그들은 <안락국>의 의지 그 자체니까.
그렇다면….
신단수에 매달렸던 형이 영혼이 사라졌다는 건, 육체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말이고 지금까지 소별왕의 행동과 말들은 어쩌면 우리를 돕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었다.
막연한 가능성일 뿐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누군가에 따지거나 물을 수 없었다.
두 성좌에게 물었다.
“같이 갈 겁니까?”
“물론, 우리는 <안락국>을 따를 뿐이네.”
“소별왕께서 하신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패러독스>가 곧 <안락국>이라는 말은 어쩌면.”
비장한 표정으로 답하는 삼족오와는 달리, 오늘이의 말은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일단, 전장으로 갑니다.”
* * *
전장으로 이동하자, 성운들이 한 곳에 뒤엉켜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민성과 137군단 그러니까, <패러독스>는 그 자리에 없었고 어째서인지 <안락국>의 남은 성좌들이 <아스가르드>를 포함한 성운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두 분은 이 상황에 대해서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까?”
“……”
“……”
입을 꾹 닫고 그저 전장만을 주시하는 삼족오와 오늘이.
소별왕의 행동만 보기 전에는 당연히 <안락국>의 성좌가 우리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한민성의 기억에서 ‘해동의 천왕랑’도 그랬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짐작은 대략적인 예측은 가능했다. 어째서 천왕랑쯤 되는 성좌가 굳이 한민성에게 그런 말들을 했는지를.
한 가지 가설일 뿐이었지만, 그 가설은 곧 눈으로 보이는 광경에 이어 볼 수 있었다.
천왕랑은 한민성에게 그런 짓을 함으로써, 일부러 우리 <패러독스>에게 반감을 산 것이고. 나아가, 자신들을 희생해 우리를 돕는 것.
설마….
전 우주에서 <안라국>은 최후의 성운이 되기에는 턱없이 약했다. 형인 이민혁과 한민성 그리고 전 우주에서의 지구인들의 도움이 컸으니까.
그런 <안락국>이 최후의 성운이 되어 이번 우주에서 우리를 돕고 나아가 우리가 최후의 성운이 된다?
간단한 말이지만 이다음 우주에서 <안락국>은 의지 그 자체로 우리 <패러독스>가 되어 그 맥이 끊기지 않을 것이다.
영원불멸의 삶
그것이야말로 성좌들이 바라는 것이기에.
우리 <패러독스>가 있는 한, 그들의 의지는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이기에.
전장을 한참 지켜보자, <안락국>의 성좌들은 목숨을 잃어갔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는 것은 소별왕의 형인 대별왕 뿐, 전장의 모든 이들이 하나의 성운을 멸하고 있었다.
삼족오와 오늘이는 눈물 흘리면서도 대별왕의 최후를 계속해서 바라보았고. 그 대별왕마저 목숨을 잃자, 고개를 푹 숙여냈다.
그리고 삼족오가 말했다.
“나와 오늘이는 <안락국> 최후의 성좌로 영원히 <패러독스>와 함께 할 것이네.”
“……”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이 전장이야말로 <안락국> 성좌들이 대부분 모여있었기에, 남은 성좌들도 금방 목숨을 잃을 것이다. 따라서 그 진실은 들을 수 없겠지만….
곤륜산에 ‘기록자들’이 있는 한, 언젠가는 이 이야기의 전말을 알게 될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되길 바랄 뿐이었다.
* * *
거점으로 몸을 움직이자, 침울한 표정들의 사람들이 보였다. 다치고 부서지고 상처뿐인 이들이 나를 발견하자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한민성이었다.
“늦었군.”
“어떻게 된 거냐?”
“설명하자면….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겠군.”
“그러니까, 설명을 자세히….”
그 순간.
한민성의 등 뒤로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는 이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스킬을 가지고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저벅, 저벅.
사내의 발걸음은 조금씩 나와 가까워졌고.
한민성에게서 시선을 떼어 사내를 향했다.
“너…. 너!! 이…!!”
당장이라도 한 대 치고 싶은 얼굴은 주먹이 닿을 만한 자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형, 말 잘 듣더라?”
“……”
휘익, 퍼억!
전신에 힘을 주먹에 쏟아부어 강하게 사내의 복부에 질러 넣었다.
“끅…. 제법 강해졌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냐!!”
미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내.
“후우…. 그래도 명치는 조금 아니지 않냐?”
“닥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한민성.
사내의 주변으로 몰려든 한민성의 일행들과 김희연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울음을 참고선 그를 둘러쌌다.
인간, 이민혁. 아니….
성좌, 재미로 삶을 반복하는 자.
내 형이자, 나의 배후성.
“잘 돌아왔다, 말할 형 새끼야.”
울먹이며 말하는 내 머리에 손을 올린 이민혁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손을 떼어내고 가장 처음으로 한 말은 한 가지였다.
“고생했다, 안아.”
“알아, 이 새끼야….”
한참을 욕을 때려 박아 줄까 생각했지만, 나와 형의 재회는 이어질 수 없었다. 한민성이 말을 잘라내고 끼어든 것은 물론이고, 형을 기다렸던 모든 이들이 다가왔기 때문.
앞으로도 함께 할 테니…. 뭐, 양보해주지.
한민성이 말했다.
“해후는 나중에 풀고,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 이것은 <안락국>의 이야기이며 또한 우리 <패러독스>의 이야기니까.”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과 137군단마저 한민성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금세 조용해진 장내에 긴장감마저 흘러들었다.
한민성은 심호흡을 한 뒤, 그간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안락국>은 우릴 배신 한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옳은 말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