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episode(20) 신과 함께#6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듯한 크로노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제 자유입니다. 시간이 지나 먼 미래에는 <올림포스>를 차지할 수 있을 텐데요?”
크로노스는 제 수염을 어루만지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냈다.
“자네는 알지 않는가? 성운의 수장을 지내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것은 한가지일세.”
“……?”
“우주의 끝을 보는 것.”
크로노스의 말이 맞았다. 제우스처럼 발버둥을 쳐봐야 최후에 남는 자가 아니라면 우주에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한히 반복될 뿐, 끝을 보지 않으면 기억을 잃고 다시 태어날 뿐이었다.
물론, 손오공처럼 필마온을 거쳐 제천대성이 되고 투전승불의 자리까지 오르며 전 우주에서의 삶보다 나아가는 이들도 존재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크로노스는 이미 여러 번, 제우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137군단에 속해져 장기 말로써 죽어갔겠지.
“제가 끝을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 목표는….”
크로노스는 내 말을 끊어내곤.
“자네는 나를 뭐로 보는 건가? 이래 봬도 제우스 이전에 <올림포스>를 이끌었느니라.”
“그렇겠죠. 그래서….”
“보는 눈은 충분하네. 지금은 부족하지만, 심장에 박힌 번개가 없으니 힘은 언제고 회복할 것이야.”
“약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만….”
제 아들을 몰아낼 결정적인 제공을 한 현계인. 그 현계인 덕분에 <올림포스>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크로노스는 자존심을 버리고 입을 연 것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 자네와 끝을 보고 그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이겠네. 그렇게 해주겠나?”
“……그 결과가 좋지 못해도요?”
“모시기로 한 이상, 끝까지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좋습니다.”
이 이상 거절하기에는 크로노스의 비장한 표정 덕분에 무리였다. 훗날 그의 말대로 힘을 되찾으면 제우스 삼 형제보다 더한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 목표는 결코 모두가 행복한 삶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시작이지, 형 거의 다 왔어….
* * *
137군단도 크로노스를 따라 내게 편입되었고, 나는 중소 성운에 맞먹을 듯한 막강한 군세를 이끌게 되었다. 그런 내게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관리자 A
일 전에 관리자의 미세한 힘을 건네며 계속된 이변에도 별다른 터치도 하지 않는 이.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삶의 이유는 전 우주에서 환생해 ‘재미로 삶을 반복하는 자’를 살리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오랜만이군요.”
[그렇지,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내가 찾아온 이유는 알고 있지?]
관리자는 조금은 안쓰러운 미소를 지어냈다.
어째서 그런 미소를 지었는지는 이미 기억이 되돌아온 나는 알고 있었다. 우주가 끝나면 누군가는 창조신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고, 그 업을 이룬 자 중 한 사람은 관리자로 편입되었다. 그것이 곧 우주의 규칙이었다.
즉, 관리자 A는 지금까지 조금씩 도움을 준 이유는 간단했다.
형의 동료였음에도 이제는 그 이름을 잃고 관리자라 불리는 이. 사내는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이었다. 생명체는 환생하며 그 기억을 잃는다. 하지만 관리자는 무한한 우주를 반복하면서도 그 기억을 잃을 수 없다.
하나의 우주 그 자체의 모든 죄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불사를 가진 이.
관리자들 전부가 사라진 우주의 망령이라 봐도 무방했다. 누군가는 희생을 위해, 누군가는 방관을 위해, 누군가는 영생을 위해서. 각자가 관리자가 된 이유는 달랐지만 눈앞에 존재하는 이 사내는 우리를 위해 희생을 감수한 이였다.
“물론이죠, 아담….”
[하하, 그 이름 오랜만이군. 슬슬 기억이 가물가물했었는데.]
형이 본격적으로 강해지게끔 수행시켜준 장본인이었다. 아담은 형에게, 하와는 한민성에게.
따라서 EX+ 게이트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한민성을 수행시켜준 하와의 힘 덕분이었고 ‘해동의 천왕랑’과 게이트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담의 힘 덕분이었다.
‘외부세계’의 조율자 아담.
‘내부세계’의 조율자 하와.
조율자는 결국, 방관자임에도 그들도 목적이 있기에 형인 이민혁과 외부의 용사인 한민성을 도왔다.
[약속대로…. 할 수 있겠나?]
아담이 불안한 듯,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가능성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에야말로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지만 모두와 살아갈 수 있으니.
“지켜보세요, 아담. 그동안 보았으면, 뻔히 아시면서.”
[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야. 어서 빨리 하와를 보고 싶기도 하고….]
“곧, 함께 할 수 있을 겁니다.”
[부탁하네, 그때가 되면 자네들의 목적도 완벽히 이루겠지.]
“그렇길 바라야죠.”
아담은 불안한 눈빛을 내보이면서도 쓰게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나를 믿고 있는지, 형을 믿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없다. 나와 형이 그의 목적을 이루어주는 것밖에는.
아담과의 이야기를 마친 뒤, 사람들이 금세 모여들었다.
‘해동의 천왕랑’을 비롯해 게이트에서 나온 한민성 일행들 그리고 이제는 오롯이 내 편이 되어 준 137군단까지.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해동의 천왕랑이었다.
“난 이만 가볼까 하는데.”
“벌써 가게요?”
“이제는 <안락국>을 위해 힘써야지.”
“……”
해동의 천왕랑
그의 진명은 해모수로 형인 이민혁과 한민성 그리고 나와는 형제와 같은 자였다. 그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기는 했지만, 그의 본래 소속은 <안락국>으로 결국, 이번 우주에서 살아남는다면 <안락국>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기로 약속하고 우리를 도운 것이었다.
성좌들의 약속은 어길 수 없는 세계의 규칙이나 다름없었으니.
“아직 형과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으면서.”
“곧 만나겠지. 그의 육체는 게이트를 벗어났고, 그의 영혼만 잘 정착한다면 금방 만날 거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락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는 건, 결국 우리와도 싸워야 한다는 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해모수는 그 힘과 카르마를 잃어 전 우주에서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는 하루살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안락국>이 전 우주에서 최후의 성운이 된 것은 형과 한민성 일행의 힘이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 상황이 달라진 현 우주에선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들은 단독으로 <아스가르드> 같은 성운은 이기지 못했으니까.
“정말 갈 겁니까? 이곳에 있으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됐다, 이놈아. 이 정도 했으면 난 최선을 다했어. 다음 우주에 어떻게든 되겠지.”
“형이 슬퍼할 거에요.”
“크하핫, 그놈 못 보고 가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러나저러나 성좌들의 말은 어길 수 없는 족쇄나 다름없잖느냐.”
“……”
해모수는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곤, 환한 미소를 지어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안아.”
“……”
“그럼….”
번쩍!
해모수를 포함한 <안라국>의 군세는 하나의 빛으로 변모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우리는 나아갈 뿐. 그렇게 해서 방법을 찾으면 좋겠지만 지금 당장은 해모수를 살릴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있기를.
한민성이 다가와 물었다.
“얼타지 말아라. 지금은 네놈이 이 모두를 이끄는 수장이나 다름없으니.”
“알아, 인마. 하여튼 용사 나부랭이들은 로봇도 아니고.”
“성운의 이름이나 생각해둬라.”
“아…. 맞다.”
사실, 현 상황에 우리는 방랑자들이었다. 성운에 속해있지 않으면서도 성운 전에 참가한 이레귤러들.
137군단은 <올림포스>를 탈퇴했다고 봐도 무방했으나, 게이트를 벗어난 한민성 일행과 모든 힘을 통달한 나는 우주의 변수였으니.
뭐가 좋을까.
허공을 향해 외치며 주변을 향해 씩 웃어냈다.
“관리자들이여, 듣고 있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이 자리에서 새로운 성운을 선언합니다.”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관심을 끈 한민성. 자리에 있던 모두의 환호성과 동시에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성운, <패러독스(paradox)>로 명명하겠습니다.”
우와아아아!!! 패러독스를 위하여, 새로운 왕을 위하여!!!
“작명 센스가 좋지 않군.”
한민성의 핀잔에도 환하게 웃었다.
137군단의 환호성과 게이트 속 사람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성운, <패러독스>가 신설되었습니다.]
[해당 성운은 성운전에 참가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모든 성운에 <패러독스>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시스템 로그와 함께 진정한 우리들의 성운이 개설되었다.
당장 머무를 곳도 없었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이미 멸망한 성운의 구역을 차지하면 그만인 것을.
“야, 용사 나부랭이.”
한민성이 눈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고.
“집 구하러 가자. 이 많은 인원이 노숙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군. 어디로 갈 거지?”
“음….”
잠시 고민을 한 후, 딱 떠오르는 하나의 장소가 있었다.
“이미 멸망했지만, 그곳만큼 편안히 보낼 곳은 또 없지. 영광 씨의 배후성이 살던 곳이니까.”
“영광 씨…?”
“아니야, 가자.”
* * *
성운, <헤이아우>의 성좌들이 살았던 곳으로 이곳은 작은 섬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우주의 한 부분이기에 섬 모양이라는 것도 인위적이었지만….
작은 성운답게, 성운전이 시작되고 금방 멸망해버린 곳. 이제는 아무런 성좌도 남아있지 않아 텅 빈 섬 만이 우리를 맞이했다.
영광 씨는 배후성을 금방 뛰어넘을 겁니다.
괜히 곤륜산에서 수행 중인 일행들이 떠올랐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동료들만큼이나 소중한 이들. 그중에는 내 동생 임아린도 존재하고 있었기에.
서둘러 구역을 장악하고 생활할 준비를 마쳤다. 이미 손발이 척척 맞았기에,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음에도 거주지를 짓고, 식자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성좌들이었다면,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우리는 ‘카르마’로 인해 생명이 연장되었을 뿐 인간들이었다. 물론, 137군단은 성좌였지만.
특성과 스킬을 이용해 금세 거주지를 만들어 낸 후, 형의 진체를 침상에 눕혔다. 아직도 눈을 뜨지 않았다는 건, 영혼이 진체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김희연과 형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냈다.
“형은 곧 일어날 수 있을까?”
“응, 민혁 씨는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을 테니까.”
“그렇겠지….”
스킬을 사용해도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제가 되었든 형은 분명 깨어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서 삶을 반복하며 ‘카르마’를 모아놨을 테니.
그 전에 성운들부터 정리해야겠지.
현재 남은 성운은 <안락국>, <타카마가하라>, <대륙>, <수메르>, <올림포스>, <아스가르드>, <마비노기온>, <왕가> 여덟 곳으로 특히 경계해야 할 성운은 한 곳이었다.
대부분은 그대로 두어도 자멸할 것이고, <안락국>, <대륙>, <올림포스>는 쇠약해졌다. 즉, 우리들의 최종 목표는 <아스가르드>였다.
“형,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왔으니까.”
* * *
20년 후,
“한민성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