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episode(19) 단 하나의 게이트#10
헤르메스의 음성에 곧바로 누구인 줄 알았던지, 사내는 몸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너 이놈, 아픈 건 싫다고 전장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것이냐?”
훤칠하고 듬직한 등판을 가지고 중후함을 뽐내는 사내.
헤르메스는 넉살 좋은 웃음 지어내며, 사내를 향해 말했다.
“볼 일이 있어서요. 형님과 대척 중인 <대륙>의 성좌가 누구요?”
“그것을 네놈이 알아서 무엇하려는 게냐?”
헤르메스는 나를 사내의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이 자는 137군단의 군단장이오.”
“…… 그 군단은 강하기는 하나, 그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죄인 집단이 아니냐? 그런 집단의 군단장이 이곳에 무슨….”
사내는 헤르메스의 말에 그제야 몸을 돌려 냈고. 정확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혀, 현계인이 아니냐! 헤르메스, 나는 한참 전쟁 중이다. 여기까지 와서 장난질할 셈이냐!”
“아이,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 형님아! 이 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은 강자요. 137군단의 이전 군단장도 이 자를 인정했다고.”
“이전 군단장이라면….”
내 옆으로 다가와 사내를 빤히 쳐다보는 크로노스. 그 모습에 사내는 기겁을 하고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크, 크로노스…?”
본래라면 아버지의 아버지이니, 사내를 포함한 헤르메스의 할아버지나 다름없었지만, 만난 적도 없었고 제우스에 의해 죄인 취급받던 크로노스였기에, 존칭은 없었다.
크로노스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손주가 분명했음에도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형님도 알잖소, 137군단은 크로노스 말고는 아무도 이끌지 못했다는 걸. 그건 형님도 마찬가지였지, 아마?”
“그, 그건….”
사내 또한 12 주신 중, 한 명으로 전쟁에 있어서는 치우와 비교해도 그 강함이 밀리지 않는 이였다. 그런 사내가 제우스의 명으로 137군단을 통제하려 했을 땐, 당연한 소리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몇만에 달하는 성좌들 그중에서도 티탄족 성좌들은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그 강함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을 이끄는 크로노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전 세대의 주신. 전투를 벌이거나 강압적으로 그들을 이끌려는 시도도 해보았지만,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무리라고 생각해 137군단을 포기했던 그였다.
그런 그들에게 인정받고 나아가 이 전장까지 크로노스를 움직이게 하는 현계인이라니. 사내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크게 당황했다.
“저, 정말 크로노스 당신이오?”
크로노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거 보시오, 형님. 이쯤 하면 믿고 좀 도와주쇼. 이 자를 돕는 것이 우리 <올림포스>를 위한 일이니.”
헤르메스가 대신 나와 크로노스의 말을 대변해주었다.
그제야 사내는 평정심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 그래. 알겠다. 무엇이 알고 싶은 거냐?”
“형님, 우리는 항상 그때를 기다리지 않았소?”
“……!!”
갑작스레 장난기가 사라진 헤르메스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사내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아주 잠시 적막이 흘렀다.
적막을 깬 것은 사내였다.
“헤르메스, 확실하냐?”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내가 보증하지.”
무언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저들끼리 하는 대화엔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신 <올림포스>는 헤르메스 혼자만의 뜻이 아닐 터. 즉, 사내 또한 그것을 바라는 이 중에 한 명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단순한 나의 예측일 뿐이었지만, 이곳도 제우스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두 성좌는 애써 말을 아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좋다, 네놈이 보증한다면 확실하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무어냐.”
사내는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듯 말했고.
“별거 아니오. 형님이 고전하는 <대륙>의 지휘관은 ‘치우’가 맞소?”
“고전하는 것은 아니다.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치하는 것일 뿐.”
“큭큭,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맞다는 말이오?”
“그렇다만….”
헤르메스는 다시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천하의 아레스도 이 자를 인정하게 될 거요. 지금부터 잘 들으쇼.”
헤르메스의 말에 의아함을 보이는 아레스. 이 자는 전쟁의 신중, 하나로 그 강함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였다.
제우스와 헤라의 직계 자녀로 그 힘을 제대로 부여받은 이. 다른 12 주신도 제우스의 자녀가 대부분이었지만 어머니가 헤라인 것은 12 주신 중,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뿐이었다.
헤르메스는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내가 말한 계획을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기 시작했고, 중간중간 아레스는 기겁하며 당황했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계획을 전부 전달한 뒤.
나를 포함한 헤르메스와 크로노스는 ‘치우’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옮겨냈다.
* * *
<대륙>의 최전선
<올림포스>를 정면으로 엄청난 대군이 포진하고 있는 <대륙>의 병력. 그 수는 137군단에 비교하면 몇 배는 많아 보이는 인원이었다.
병사들을 포함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좌가 그들을 뒷받침해 주었고 <올림포스>도 너무 많은 <대륙>의 병력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고작 세 명이 그런 <대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쿵쿵! 쿵쿵!
<대륙>의 경비병은 의문 가득한 우리에게 큰 북을 쳐대며 맞이했고.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누구냐!!”
헤르메스와 크로노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계획 실패하면 이곳에서 죽겠군.”
“솔직히 조금 쫄리는데…?”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어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같은 생각입니다. 그자를 만나지 못하면 계획은 시작도 못할 테니까.”
내 말에 헤르메스와 크로노스는 마른침을 집어삼켜 냈고.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 ‘전쟁의 요괴신’이 있습니까?”
내 물음에 경비병은 인상을 한껏 찌푸리곤 내게 말했다.
“장군의 수식언을…!! 네놈은 누구냐!!”
당장 공격해오지 않기에, 치우를 만나는 것도 아주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이 계획은 치우를 처치하고 나아가 <대륙>의 병력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으니….
“현계에서 온 이 안이라 합니다. ‘전쟁의 요괴신’에게 제 이야기를 하면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뭐라, 현계인…?”
생각보다 경계심이 없는 경비대장은 현계인이라는 말에 반응하고 있었다.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은 금방 알게 되었다.
“이, 이거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장군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잠시만….”
경비대장은 급히 부하를 불러 귓속말을 속삭였고. 그 말을 들은 부하는 재빠르게 뛰어갔다.
이게 뭔…. 왜 이래?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나는 경비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경비대장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닌 채 입을 열었다.
“한눈에 알아보지 못해서 죄, 죄송합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당혹스러움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헤르메스와 크로노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이 상황에 대해서는 어이가 없었던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경비대장이 말했다.
“장군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이 아끼는 현계인이 곧 올 거라 하셨습니다!! 만약 그 현계인을 만나게 된다면 극진히 대우하고 자신에게 대하는 것처럼 행하라 하셨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하….
경비대장의 말에 상황을 파악한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군, 좋다. 네놈의 죄는 후에 묻겠다. 물러가라.”
“조, 존명!”
경비대장은 얼굴빛이 시퍼렇게 질려,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동시에 눈이 마주친 헤르메스와 크로노스.
“이거, 일이 쉽게 풀리겠습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큭큭, 역시 재밌는 놈이었어. <대륙>의 대장군을 상대로 이런 대접을 받다니, 하긴…. 아버지도 네놈을 얻는 것에 욕심을 부렸으니.”
크로노스와 헤르메스는 내게 한 마디씩 건네며, 어이없는 현 상황에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릴 줄 몰랐다. 치우와의 만남도 훗날을 위한 거짓말로 무마한 것이 분명했거늘, 진심으로 나를 기다렸다니.
멍청한 치우의 행동에 치가 떨릴 정도로 어이가 없는 나였다.
그 순간.
[대장군께서 오십니다!!!]
경비대 전원은 전장이 떠나가라, 한목소리로 외쳤고.
누군가가 나를 향해 홀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재빠르게 용광검을 꺼내 들어 허공에 띄워내었고, 검 끝을 다가오는 자를 향하게 했다.
신살의 힘이 담긴 용광검을.
전쟁의 요괴신
등륜에게 빙의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 은빛으로 빛나는 이마와 황소와 같은 두 개의 뿔이 솟아난 자. 곰과 같은 크기로 그 크기가 왜소한 거인족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헤르메스와 크로노스에게만 들리게끔,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조심하되, 확실하게 연기해주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고,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치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와 말했다.
“크하하하핫!! 역시, 왔구나. 내 오른팔이여!!”
“다시 뵙습니다. 대장.”
침착하게 인사를 한 뒤, 다시 한번 치우를 향해 말했다.
“그간 별 탈 없으셨습니까?”
“으하하핫!! 말해 뭐하겠나! 난 전쟁에서 절대 지지 않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역시!! 그 정도는 돼야 제가 모실 분이지요.”
자신을 한껏 치켜세우자, 치우는 하늘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이내 웃음을 멈춘 치우는 내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려 냈다.
“이 기운은….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아니냐! 네놈, 나와 한 약속을 어기고 <올림포스>에 붙은 것이냐!”
얼굴이 시뻘게져, 금방이라도 죽일듯한 기운을 내 뿜는 치우. 나는 침착하게 그런 치우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모시기로 한 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 한 분이었습니다.”
“그, 그러냐? 그렇다면 두 놈은 무엇이냐!”
금세 기분이 좋아졌나 싶으면서도, <올림포스>의 두 성좌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린 그대로인 치우.
나는 그런 치우를 향해 비릿하고도 사악한 미소로 답했다.
“대장을 모시기 위해 부하로 거둔 이들입니다. 나름대로 강한 성좌들이니 너그럽게 받아주시지요.”
“음?”
당혹스러움에 네 개의 동공이 거대해지는 치우. 그런 치우를 향해 정신없이 말을 몰아붙였다.
“남은 현계인은 사정이 생겨 몰살시키고 말았습니다. 해서, 대장께 도움이 되고자 두 성좌와 싸워 이겼고 부하로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현계인을 몰살시켰다는 말에, 안색이 변해갔지만 치우는 금세 표정을 풀고서 내게 말했다.
“으하하핫. 내 오른 팔에게 몰살당했다면, 그들은 장기 말로 쓸 자격도 없는 이들이겠지. 그래서 이 둘의 진명은 무어냐!?”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고, 재빠르게 앞으로 나와 치우를 향해 고개를 숙인 헤르메스와 크로노스가 자연스레 답했다.
“헤르메스라 합니다. 제 주군이 모시는 분이라면, 그 또한 제 주군.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크로노스입니다. 힘은 부족하나마, 전력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헤르메스와 크로노스 두 성좌가 제 소개를 하자, 치우는 입을 떡 벌리곤 나를 바라보았다.
“오, 오른팔이여. 이 자들은 <올림포스>에서도 그 강함이 최상위인 자들이 아닌가!?”
“맞습니다. 대장을 모시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하하하핫. 좋구나, 좋아!!”
치우는 기쁨을 못 이긴 채, 다시 한번 웃기 시작했고.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이 치우의 좌우로 이동했다.
“잘 모시거라, 앞으로 <대륙>을 이끌어갈 분이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