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episode(19) 단 하나의 게이트#9
수만에 달하는 성좌가 있음에도 그 누구도 크로노스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모두가 제우스를 미워하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크로노스의 말은 137군단에서 법이나 다름없는 것 같았다.
크로노스가 말했다.
“이 자는 현계인으로 우리들의 오랜 염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죽을 테고 누군가는 영광을 맞이 할 테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모두가 크로노스의 말을 들으며, 적막이 흘렀고.
“우리는!!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우와아아아!!!!]
137군단 모두가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들의 숙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죄인으로 남겨지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크로노스의 말에 환호성은 거대하게 울려 퍼졌고. 크로노스는 동시에 내 오른팔을 들어올 환호성을 받아들였다.
“자네 차례네, 지금 당장 그들의 인정을 받기는 힘들겠지만. 앞으로는 자네 하기 나름이겠지.”
크로노스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마친 뒤, 그가 했던 것처럼 앞으로 나섰다.
“이 안입니다. 성좌도 아닌 현계인이죠.”
현계인이라는 말에 성좌들이 수군거렸다. 크로노스는 내게 눈짓을 보내왔고. 그 눈짓이 알아서 잘해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크로노스가 먼저 군단장을 넘겨주었기에 반발이 없는 거지, 다짜고짜 현계인인 내가 137군단의 군단장이라 했으면 이들과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죄인이라 해도 성좌가 된 이들에겐 현계인은 자신들보다 그 급이 낮았으니까.
당장 인정받지는 못하더라도, 이럴 땐 확실하게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아직 버프가 종료되지 않았기에, 여기서 정령화를 사용한다면? 적어도 약하다는 인식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당장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뿐이었다.
[스킬, [정령화 LV.2]을 발동합니다.]
스스스스.
정령화를 사용하자, 없었던 왼팔이 마력으로 만들어졌고. 동시에 기운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처음엔 모두가 ‘고작 현계인이 우리를 이끌겠다고?’와 같은 표정과 시선을 보냈다면, 모든 버프와 정령화를 사용한 지금은.
웅성, 웅성.
힘을 잃은 크로노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힘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크로노스와 헤르메스도 마찬가지였다.
“오호…. 대단한데?”
헤르메스가 흥미로운 듯 내게 말했고.
“이 정도는 되어 주어야지. 하지만 제우스 그놈에겐 아직 부족하네.”
크로노스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폭발한 듯한 기운을 유지하며 좌중을 향해 말했다.
“지금의 전 약합니다. 주신 급에 다다르지 못했죠. 하지만 137군단이 저와 함께해준다면, 모두의 숙원을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당연히 힘든 길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촤르릉.
용광검을 꺼내,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저와 ‘시간을 집행하는 자’를 따라온다면!! 훗날 이곳에 존재하는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는 신화(神話)를 이룰 것입니다!!”
말을 끝마치자, 아주 잠깐의 적막이 흘렀고.
누군가 우레와 같은 소리로 외쳤다.
“새로운 군단장을 위하여!!!”
그 목소리는 곧 신호탄이 되어 번져가기 시작했고, 한 성좌를 시작으로 모든 이가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새로운 군단장을 위하여!!!]
쿵, 쿵, 쿵, 쿵!!
거인들의 발 구르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말은 크로노스도 만족한 미소를 지어낼 정도였다.
“자네, 제법이군. 내 말이 있었다고는 해도, 저들은 현계인을 따를 정도로 만만하지 않은 자들인 것이 분명했거늘.”
“일시적인 힘일 뿐입니다. 지금은 이 방법 말고는 없었습니다. 지휘관을 믿지 않는 병사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니까요.”
크로노스는 아주 기쁜 듯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것이 승리를 위한 우리들의 초석이길 바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장 먼저 이루어야 할 것을 이뤄냈다는 것에 기쁨의 미소를 지어낼 수 있었다.
* * *
137군단 지휘관 막사
헤르메스, 크로노스와 함께 다음 행적에 관해 이야기를 나는 중이었다.
헤르메스가 말했다.
“다음은 어쩔 거냐?”
“생각 중입니다만.”
마땅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헤르메스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
“너와 내가 ‘검은 날개를 가진 밤의 여왕’을 만나고 온 후, 아버지께서 의심이 가득해지셨다.”
“그렇겠죠.”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의심은 더욱더 커지겠지.”
“……”
헤르메스의 말이 맞았다. 그곳을 다녀온 직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고 나와 헤르메스를 부르지 않은 건 조금 더 지켜보기 위함일 뿐, 의심하지 않거나 아예 거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나는 지금부터 성운 전에 대한 실적을 눈에 보일 정도로 끌어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크로노스가 끼어들었다.
“여왕을 만났나?”
“네, 동료의 배후성이거든요. 인사차 잠시 만났습니다.”
“그 깐깐한 여인을 만나다니, 생각만 해도 피곤하군.”
“……?”
크로노스와 여왕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왕 또한 <올림포스>와 연관이 짙은 인물이니 아예 왕래가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을 마친 후, 두 성좌에게 말했다.
“어찌 됐건, 전쟁은 치러야 합니다. 지금의 전 약하디약한 현계인이니….”
“좋은 수가 있나?”
나는 크로노스의 물음에 ‘각성’과 그 조건에 대해 아주 짧게 일러주었다.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헤르메스가 말했다.
“방법은 크게 한 가지네. 네놈이 성장할 수 있게 성좌를 흡수한다는 것.”
“맞습니다.”
두 성좌는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내가 강해질 방법은 각성을 마지막 단계에 올려두는 것. 그 이후 EX+ 게이트의 봉인을 풀어내 편을 더욱더 많이 만드는 것이었다.
훗날 곤륜산에 머무는 동료들까지 합류한다면….
말없이 눈을 마주친 크로노스와 헤르메스. 그것을 시작으로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성좌 한 놈만 있으면 된다는 건가?”
“몰래 한 놈 잡아 올까?”
두 성좌의 말에 피식 웃은 후, 물음에 답했다.
“말 그대로 한 명의 성좌만 있으면 쉽게 해결될 테지만, 137군단이나 <올림포스>의 누군가를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죽여야 하니까요.”
“자네 말이 맞군….”
“그러려면 결국,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건가.”
크로노스와 헤르메스는 마땅한 답이 없다는 생각에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상당히 난감해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시적인 정령화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그건 이들도 모르지 않을 터.
더군다나 전쟁 중에 각성을 이루면 일 전에 그래왔던 것처럼 정신을 잃거나 몇 분간 육체의 재구성이 시작되기에, 많은 희생을 치를 가능성이 컸다.
헤르메스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바닥을 짝! 쳐대며 말했다.
“한 놈만 조지면 되는 거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아니,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데?”
“손뼉은 왜 친 겁니까…?”
“떠오를까 싶어서?”
“……”
이 성좌 놈은 관종인게 분명하다. 역시, 전쟁 말고는 답이 없는 건가….
사실, 제우스에게 인정받으려면 성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제우스에게 인정받으면서도 마지막 각성을 이룰 방법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고민하던 중, 크로노스는 답답한 듯 내게 말했다.
“자네, 설마 모든 이를 살리면서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
“무지하군, 무지해.”
크로노스는 답답한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의 말과 행동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건 조금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네가 그러질 않았나. 그들은 그리고 나는 신화(神話)를 이룰 것이라고.”
“그렇죠.”
“그러려면 자네가 성장해야 하네. 방법이 없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뿐. 죽은 이는 새로운 역사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 될걸세.”
“절 믿으십니까?”
크로노스는 나의 물음에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인제 와서 믿지 않는다면, 그 또한 좋은 방법은 아니지 않겠나? 나는 자네를 따라 앞으로 나아갈 뿐이네.”
“그럼 해보죠.”
마음을 굳건히 되새긴 나는 크로노스와 137군단을 믿고 나아갈 것이다. 지금은 그 방법뿐, 이들의 희생은 다음 우주에서 새로운 역사로 쓰일 테니.
헤르메스를 향해 물었다.
“현재 남은 성운은 몇 군데나 됩니까?”
“음…. 내가 알기로는 여덟 군데 정도지?”
“그곳에서 가장 약한 곳은요?”
“이미 수없이 많은 성운이 멸망을 금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성운이라면 약한 곳은 없을 거다.”
“그럼,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딥니까?”
“<대륙>이지 않을까?”
<대륙>이라…. 나는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두 성좌를 향해 말했다.
“두 분, 저와 갈 곳이 있습니다. 137군단 없이 저희 셋만 가시죠.”
“음? 어디를….”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냐?”
“네, 현계에서 만난 성좌가 있습니다. 그를 이용하시죠. 어차피 <대륙>은 그 규모가 크니 미리 줄여놓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치우. 현계에서 만난 성좌로 멍청하기가 극에 달한 자. 물론, 멍청함과는 다르게 그의 진체는 주신 급에 다다를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이용해 각성을 이루고 나아가 그 소식을 제우스에게까지 알린다면?
그야말로 내가 원하는 상황에 두 걸음 내디딜 수 있는 것이었다.
헤르메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그래도 <대륙>은 조금 그렇지 않냐? 그놈들은 강하기도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그렇겠죠. 그러니, ‘신들의 왕권’도 그들을 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걸 아는 놈이 그래?”
“강한 놈일수록 강한 맛에 빠져 있기 좋은 법이죠. 그걸 이용할 뿐입니다.”
“흐응…?”
여전히 내 말의 의중을 깨닫지 못하는 헤르메스. 그를 향해 현계에서 일어났던 대략적인 일을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듣자, 크로노스는 폭소를 금치 못했고.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놈은 그놈을 속이자 이거지?”
“맞습니다. 두 분이 제 부하인 척 연기 좀 해주셔야겠지만.”
“뭐, 잠시뿐이라면 상관없다. 치우 그놈을 처치하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테니.”
“나 또한 상관없네, 이미 자네가 군단장이 된 시점에 돕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좋습니다. 그럼….”
대략적인 이야기와 계획을 마친 뒤, 두 성좌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헤르메스는 치우가 위치한 장소를 알아보았고, 크로노스는 내 곁에서 만약을 대비한 전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치우는 최전선에서 <대륙> 하나의 군단을 지휘하고 있었고, 그 위치로 이동하는 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올림포스>와 <대륙>이 서로를 바라보는 최전선에 도착한 나와 두 성좌는 그곳의 지휘관에게 곧바로 이동했다.
헤르메스는 지휘관을 향해 말했다.
“형님, 오랜만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