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episode(19) 단 하나의 게이트#8
크로노스. 시간을 관장하는 신으로 아내인 레아와 제우스 6남매를 낳은 성좌였다.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크로노스를 몰아내기 위해 6남매 전부가 덤벼들었기에, 그 강함은 단순하게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메노이티오스를 흡수하지 못한 시점에 내게 남은 카드는 ‘정령화’ 단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크로노스를 시작으로 EX+급 게이트의 봉인을 해제할 때까지.
크로노스가 말했다.
“새로운 군단장이라, 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냐?”
전 <올림포스>를 이끌었던 수장답게 그 분위기가 상당했다. 마주 선 것만으로도 빨려들 것 같은 기운 하며,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눈동자까지. 당장 이 자와 손을 잡을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이 자와 마주 섰을 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헤르메스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했고. 정신을 차린 나는 메노이티오스와 크로노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시간을 집행하는 자’입니까?”
“그렇네만, 자네는 성좌가 아니군.”
크로노스는 의아함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하나 말해준 것이 없음에도 많은 것들을 파헤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 기록자, 요마, 죽은 자 그리고…. 미세하지만, 관리자의 힘도 가지고 있군. 특이하구나, 정말 특이해.”
“그런 말 많이 듣죠.”
한순간에 대략적인 걸 파악한 크로노스는 미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기 위해 왔건만, 오히려 말려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제우스의 자리에 머물렀던 자이니.
“그렇군, 자네가 이번 우주의 이레귤러인가?”
“그게 무슨.”
“우주가 새로이 시작되면 그 우주에서는 항상 이레귤러가 존재했지. 전 우주에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현계인이었거늘.”
“……”
기억을 하고 있다…?
말하는 것만 봐도 크로노스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수식언답게 시간을 관장하는 성좌라 그랬던 걸까.
의문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고. 나는 긴장감 흐르는 표정으로 크로노스를 바라보았다.
“강하긴 하나, 아직은 부족하군. 그래, 아직 나를 이길 수 있는 강함은 아닌 듯하고.”
크로노스는 당장 기운을 뿜어내거나, 나를 공격할 만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내게 관심이 생긴 것이었을까.
“자네 같은 이레귤러가 죽으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정말로 제우스 그놈을 따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
크로노스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이곳은 <올림포스> 제우스의 권역(圈域)이지. 그가 지켜보는 한 쉽사리 말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크로노스는 나를 향해 손을 뻗어냈다. 당장 닿을 것 같은 위치까지 다가온 손바닥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스아아아아.
무언가 나와 크로노스를 휘감더니, 화안 금정에 푸른 투명막이 생성되었다.
“자네는 지금 나의 시간에 잡혀있다. 즉, 밖에서는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일 뿐, 정확하게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지.”
“후, 대단하시네요.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다만, 시간은 5분. 오래 버틸 수 없네.”
크로노스는 이야기해 보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애초에 나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메노이티오스를 보내 전투를 시킨 것은 단순하게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겠지.
“편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힘을 잃었어도 ‘시간’은 나의 편이니라.”
단순한 성좌는 아닐 거라 생각했건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제우스를 죽이고 싶습니까?”
“음…?”
“말 그대로입니다. 심장에 박힌 번개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걸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로 보이네만.”
“그래서 묻는 겁니다. 당신과 나는 제우스에게 맞설 수 있으니까요.”
크로노스는 소탈하게 웃으며,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작 그 정도의 강함으로…. 전 우주에서 최후의 1인이 된 현계인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 분명한 것을, 정말 자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스아아아아.
기운을 강하게 내뿜기 시작하는 크로노스. 마치 나를 시험해보겠다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면 받아줘야지.
스아아아아.
“호오.”
느긋하게 앉아있던 크로노스는 한껏 방출한 기운에 그제야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메노이티오스와의 전투에서 선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 전력이 아니었으니.
“원한다면, 더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만.”
“아직도 힘을 숨겨놓은 건가? 하긴, 이 정도는 되지 않으면 나와 대화할 자격도 없는 것이지. 그래, 자네는 무엇을 원하는가?”
“간단합니다. 137군단과 제우스를 몰아내는 것.”
단순하게 말하긴 했지만, 현 상황에 제우스는 1순위를 다투는 성운의 수장.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건 크로노스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 때문인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자네가 숨을 숨겨놓았어도 아직은 제우스 그놈에겐 발끝에도 못 미친다네. 나 또한 많은 힘을 잃어 상대가 되질 않지. 137군단을 자네가 이끌 수 있다고 해도 확률은 높지 않다는 말이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자가 어찌…. 그것은 객기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크로노스는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일관하였다. 하지만 나 또한 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37군단과 저 하나로는 <올림포스>를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올림포스>는 가능하죠.”
“설마….”
“맞습니다. 제우스의 자식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죠.”
“역시 그렇군, 그런 낌새는 이전부터 느꼈지. 그 어려운 길을 자네에게 걸다니, 그들도 무지하군.”
크로노스는 이미 제우스에게 패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상황. 겁이 났을 것이다. 다시 한번 패하는 것은 영혼의 소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크로노스가 말했다.
“137군단과 <올림포스> 그리고 자네까지. 그래도 부족하네. 알고 있는가? <올림포스>와 137군단 모든 이들에겐 심장에 번개가 박혀있다는 것을. 그건 자네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죠.”
“말 한마디로 모두를 소멸 시킬 수 있다는 말이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 바보 같은 짓들을….”
나는 숨겨놓았던 비장의 수가 존재했다. 크로노스 또한 그 성좌의 수식언을 들으면 이해할 정도로 강력한 성좌가.
“137군단은 제우스를 몰아내기 위한 초석입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제안을 드리죠.”
“제안이라, 말해보게.”
“심장에 박힌 번개를 제거하고 나아가 137단을 <올림포스>와는 다른 성운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네….”
크로노스는 내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 알고 있는 듯 당혹스러운 듯 심연과 같은 두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올림포스>는 그들대로, 당신은 새로운 성운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시간을 집행하는 자’는 다시 한번 주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겁니다.”
“……!!!”
그제야 크로노스의 표정이 퍽 볼만했다. 심장에 박힌 번개 덕분에 어떤 행동을 취하지도 못한 채 수없이 긴 세월을 방관한 그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제우스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살아온 137군단.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유였다.
“기회는 한 번입니다. 당신들이 저를 따르지 않겠다면, 다른 이들을 찾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본인도 아시겠죠. 영원히 자유는 없다는 걸. 목줄에 걸린 개처럼 제우스에게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듣기 싫은 말만 콕 집어서 듣자, 한순간 표정이 일그러진 크로노스.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한 번 패배했다고 앞으로도 패배자로 남을 겁니까? 기록자들은 당신을 패배자로 기록할 겁니다. 그것도 상관없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지만.”
“……”
“역사는 승자의 기록. 단 한 번 마음을 고쳐잡는 것으로 당신은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올림포스>를 이끈 적이 있다지만, 그는 역사 속에서 항상 패배자였다. 승자라는 말에 눈빛이 일순간 변해가는 크로노스.
그 모습에 아무런 행동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이지만 시간은 흘렀고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내게 말했다.
“자네를 믿으면, 자네를 도우면…. 나는 레아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건가.”
레아. 제우스의 어미로 크로노스의 아내였다. 전투계열이 아니었기에 137군단에 편입되지는 않았지만, <올림포스> 깊숙한 곳에 유폐된...
“물론입니다.”
“내가 돕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건이 분명히 있을 터. 말해 보게.”
“제우스를 몰아낸 시점에 <올림포스>를 건드는 건 안 됩니다.”
“이유는?”
“그들도 위험을 감수하고 움직이는 거니까요. 서로 고생해서 자유를 쟁취했는데, 굳이 싸울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군…. 이번 우주에서는 제우스에게서 벗어나는 것뿐인가.”
“……”
“내가 노릴 것은 다음 우주겠군.”
이미 마음을 다잡은 크로노스였기에,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크로노스가 말했다.
“자네를 돕겠네. 하지만….”
“무슨 문제라도…?”
크로노스는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더니, 조금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레아는 반드시 구해주게.”
“아….”
아내 바보였군.
크로노스가 허공에 손짓하여 결계를 풀어냈고, 동시에 헤르메스가 다가와 말했다.
“무슨 대화를 그리 길게 하는데!! 들리지도 않게.”
“137군단은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제우스가 이곳을 바라보는 한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간결하게 이야기가 잘 풀렸다고만 전한 뒤, 헤르메스와 크로노스 두 성좌와 137군단으로 몸을 움직였다.
* * *
크로노스를 모시는 자들은 대개 제우스에게 패배해 ‘타르타로스’에 머물던 죄인들이었다. 그 수가 상당했기에 하나의 성운을 만들려면 못할 것도 없는 수였다.
그들은 거인족인 티탄족을 포함해 제우스 이전 세대의 성좌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크로노스와 같이 힘을 잃었다지만 결코 가볍게 볼 이들이 아니었다.
그런 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크로노스는 나를 옆에 세웠고.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말했다.
“나, 크로노스가 명한다. 지금부터 137군단은 이 자가 맡을 것이다. 이유는 묻지 말 것이며, 내 말을 거역하겠다면 지금 앞으로 나와 나를 죽이거라!!”
뜬금없이 군단장의 자리를 넘기는 모습에 당황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은 크로노스를 진정한 수장으로 생각했는지, 금세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그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거인들을 포함해 수많은 성좌가 크로노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크로노스를 위하여! 새로운 군단장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