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episode(18) 흑아(黑兒)#4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지만, 안재훈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 강함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지만, 그것은 강제적인 힘일 뿐, 진심으로 자신을 따라는 자는 없다는 것을.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안재훈을 향해 말했다.
“해주면 넌 뭘 할 건데?”
“아니, 이제 정말 개기지도 않을 것이고….”
“또.”
안재훈은 나와 임아린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체념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내, 내가 이분을 지켜줄게!!”
“큭큭, 알았다.”
“아저씨!! 왜 내 의견은 안 물어보는 데에!!”
“아린이는 좋겠네. 지켜주는 사람이 많아서.”
“쳇. 아저씨 미워.”
지켜줄 사람을 한 명 늘려줬는데, 뭐가 미운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안재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다며, 이제는 나만 믿으라는 무언의 말이었다.
상황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수장이 배신했다는 생각에 흑아의 최상위권 강자들은 지나치게 강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안재훈은 괜찮겠냐며, 어느새 임아린 곁에서 자신의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지금부터 선택하는 것은 나였다. 이미 ‘명’을 통해 이후의 내용을 알고 있다. 안재훈이 빠진 자리를 자연스럽게 흑아의 이인자가 차지하고 그들은 나와 안재훈을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그 이후, 너무 많은 인원을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부상을 무릅쓰고 절반 이상의 흑아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결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이들 모두를 곤륜산으로 보내 생존을 위한 상생을 시킬 것이고 더 나아가 수행과 함께 훗날 나의 힘이 되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아, 아저씨…!!”
걱정스러운 투로 임아린이 나의 옷깃을 잡아당겼고.
“혀, 형님. 핀치 아닙니까!?”
어느새 다가온 히로시가 이런 상황까지 벌어질 줄은 몰랐는지, 두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왕…. 미, 미안해….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갈 줄은….”
임아린에게 반한 안재훈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현시점에 우리의 전력은 나와 임아린 그리고 안재훈과 히로시 그가 이끄는 고작 몇백여 명의 인원들 뿐이었다.
그 누구도 안재훈을 진심으로 따른 적이 없다는 것에 크게 낙심한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에게 인자한 미소와 함께 괜찮다며 환히 웃어주었다.
“걱정 마, 내가 누구냐.”
“대왕마마지.”
“그럼 됐다.”
“뭐, 뭐가 됐다는 건데!! 흑아의 인원은 어림잡아 오십만이라고!!”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는지, 내내 표정이 어두운 안재훈.
나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포탈을 열어 곤류산으로 이들을 유인하는 것.
두 번째는 ‘명’에서와 같이 흑아를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것.
세 번째는 어떻게든 차정우와 연락을 취해, 신선들과 함께 이들을 갱생시키는 것.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방법들 뿐이었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첫 번째와 세 번째였다. 두 번째만큼은 실행에 옮기기 싫은 나였기에….
어쩐다?
나는 계속해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첫 번째의 경우 곤륜산 내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자칫 일행들이 다칠 경우가 생긴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떠넘기기만 할 뿐이니 좋은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세 번째의 경우가 그나마 가능성이 컸지만, 곤륜산과 연락을 취하기엔 그곳과 현계는 확실하게 단절된 세계라는 것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닿는다고 해도 차정우가 과연 받아들일지….
강자아가 결계를 펼쳐 이들은 통제하고 갱생시키는 것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연락이 문제였다.
흑아는 조금씩 우리를 포위하고 다가오는 중이었고. 생각을 멈춘 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린아?”
“네, 아저씨.”
“지금부터 아저씨가 하는 말 잘 들어.”
“네? 네…!!”
임아린은 금세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내 말에 경청하기 시작했다. 계획은 간단하다. 임아린이 포탈을 열어 강자아를 비롯한 일행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로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다시 한번 포탈을 열어 이들을 곤륜산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인원이 인원인 만큼 포탈의 크기는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들이 포탈을 넘어섰을 시, 십이 대선과 신선들의 힘으로 이들을 가두고 그곳에서 갱생시켜 결국엔 일행들과 같이 수행을 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말은 그럴싸했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두 번째.
이들을 어떻게 포탈로 들여보내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긴 알겠는데요, 아저씨 혼자 이만한 수를 상대하게요!?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아저씨 강한 거 알잖아.”
“아저씨이…!!”
임아린은 고집이라도 부리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내 말에 반했다. 그 모습에 씁쓸한 표정으로 안재훈과 히로시를 향해 말했다.
“이 아이를 지켜.”
“네, 형님!!”
“당연한걸.”
두 사람이 임아린을 데리고 멀어지는 동안, 나는 눈앞에 집단에 시선을 돌렸다. 버프를 전부 사용하면 이들을 죽이는 건 쉽다. 그렇지만 내 목적은 이들을 살리는 것.
죽지않게 적절하게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내게 닥치는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
저벅, 저벅.
흑아의 이인자. 아니, 안재훈이 빠진 후 자리한 일인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미성년자로 이루어진 집단답게 이 사내 또한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을 흡수하며 미성년자가 아닌 존재들도 있었지만.
화안금정.
화악.
금빛으로 빛나는 화안 금정에 보이는 사내는 19살 이름은 등륜. 이름으로 예측하건대, 이 사내는 중국인이었다.
나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그쪽도 피해가 클 텐데, 나 하나 잡자고 무리해야겠어?”
“흑아는 전 세계를 집어삼킨다. 수장 같지 않은 놈 때문에 잠시, 흔들렸을 뿐. 우리는 세계의 왕이 될 거다.”
“거참, 허황된 꿈을 꾸는 놈이네.”
“흥!”
등륜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며 자신의 기운을 한껏 뿜어내기 시작했다. 배후성의 수식언을 봐서 그런지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이 정도 강함이라니.
이놈은 크게 될 놈이네.
성운 전체에 지원받는 단일 배후성으로 성장의 천재인 안재훈에 버금가는 강자였다. 물론….
현시점에 나에겐 안 되겠지만.
그때였다.
- 어이, 주인 도와줄까?
- 이만한 숫자를 혼자 상대하려면 자네 혼자 힘들걸세.
- 많은 힘을 잃었지만, 이 정도라면….
나의 무의식으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의 힘을 회복한 화룡과 윤문, 이재신이었다.
“말해 뭐해? 간만에 날뛰어 보라고. 대신, 죽이면 안 된다.”
[영혼 소환]
스스스스.
투명한 무언가가 허공에 형성되더니, 곧 그것들은 두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룡으로 변모했다. 화룡은 그 힘을 크게 잃었지만 내가 성장함에 따라 대부분의 힘을 회복한 것 같았고 윤문과 이재신 또한 그 전과 완연하게 다른 기운을 뽐내고 있었다.
내 성장은 곧 이들의 성장.
“자, 꼬꼬마들 시작해볼까?”
허공에 뜬 용광검을 조종하며, 극에 달한 극‘파천 신공으로 무형검을 만들어낸 나는 마력의 형상으로 고고하게 빛나는 검을 쥐고 있었다.
다음은.
“재신 아저씨, 부탁해요.”
“음!”
이재신이 거북선을 소환해 포격을 시작했고.
“내 차례다!!! 으하하하핫!!!”
마찬가지로 강함이 극에 달한 천마가 전장을 뒤집고 있었다.
나는 멀뚱히 허공을 배회하는 화룡을 바라보았다.
“뭐합니까?”
“음, 브레스를 쏘면 재가 되어버릴 테고, 그렇다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사용하면 죽이지 않고는 안 끝낼 터.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었네.”
“아….”
화룡의 전투 방식과 스킬들은 대부분이 살상력이 높은 것들이었다. 브레스는 엄청난 고열로 상대를 녹여 버릴 힘이 존재했고 그가 사용하는 드래곤 슬레이어는 양쪽 날이 모두 날카롭기에 역날검도 무리였다.
나는 그런 화룡을 향해 말했다.
“마법은 사용할 줄 모릅니까?”
“마법? 음, 용언 마법은 아주 조금….”
“죽지 않을 정도로 얼리는 건 어떻습니까?”
“오오, 괜찮은 방법이군. 그럼 다녀오겠네.”
그제야 자리를 벗어난 화룡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작스레 소환된 두 명의 사람과 한 마리 룡의 등장에 등륜은 당황한 듯 나에게 물었다.
“지금 그것들은 뭐지?”
“비밀. 그것보다 안 덤비는 걸까? 네 부하들 꽤 고전 중인 것 같은데.”
“흥. 네놈 따위에게 지지 않는다!”
이놈은 뭐 때문에 이렇게 날이 섰을까.
아주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휘관을 무력화 시키면 적당한 인원들은 그 기세를 잃어버릴 터. 윤문, 이재신, 화룡이 전장에서 힘 써줄 때 제압해야만 했다.
하지만.
등륜을 제외하고서도 흑아에서 제법 지위가 있는 자들이 나를 포진하고 서 있었다. 그 숫자만 해도 몇백에 달하는 인원들. 한 사람 한 사람씩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었지만 죽이지 않고 강자 여럿을 상대하는 건, 조금 신경이 쓰이는 나였다.
쿠구구구.
흑아의 간부진은 저마다 자신들이 낼 수 있는 기운을 강하게 뿜어댔다. 그 기운이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이 되자 천재지변과 같은 지진이 일어났고.
쿠릉, 쿠르릉!!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검게 물들어 벼락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법인데?”
여유가 넘쳐 보이는 내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는지, 등륜은 간부진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전원, 적을 처단하라!!”
“짜식이. 적은 무슨, 내가 마물들도 아니고. 망할 놈들 같으니.”
등륜의 외침에 간부진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오십만에 달하는 흑아에서 강함만으로는 최상위권에 있는 자들이듯, 마냥 쉽지만은 않은 상대들이었다.
나는 화안 금정으로 그들의 공격 범위와 경로를 파악하기 시작했고.
사사사삭.
허공에 뜬 용광검으로 태극혜검을 사용했다.
그리고.
[무쌍난무 LV.MAX]
날이 없는 무형의 검으로 간부진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버프를 사용하지 않고 힘을 뺀 상태기에 초집중 상태에 들어선 후, 스킬을 사용해 전장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처음 스킬을 얻을 때와 같이 여포와 같았으며, 한 손이 없음에도 전장은 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림없다!!”
등륜이 자신의 배후성의 힘을 사용했는지, 두 팔이 등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흡사, 요괴와 같았다. 소환된 신기는 총 네 개의 팔에 쥐어졌으며.
마지막 한 자루는 입에 물고 있었다.
다섯 자루의 병장기를 다루는 등륜의 배후성은 화안 금정에서 보았듯, 그 모습만 봐도 예측이 갔다.
그의 수식언은 전쟁의 요괴신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고대 신으로 누군가는 요괴라 불렀고, 누군가는 마물이라 부른 전쟁 신이었다. 중화삼조(中華三祖)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다른 고대 신인 공공, 축융, 형천과 함께 염제 신농씨의 대장군으로도 불린 그.
그를 따르거나 섬기는 건 지역마다 달랐지만, 한고조 유방도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승리를 기원하는 등. 군신으로 치우 자체에 대한 신앙이 존재하는 자였다.
귀찮은 배후성을 두고 있구먼.
치우는 전쟁의 신답게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힘의 상승을 보여주는 배후성이었다.
내가 사용하는 스킬은 한낮 삼국지의 무신(武神) 여포의 무쌍 난무. 스킬의 효율만 놓고 보자면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등륜은 힘에 심취해, 자신이 치우라도 된 듯, 나에게 말했다.
“자, 내가 곧 전쟁의 신이니라.”
나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 쉬며 등륜에게 답했다.
“지랄 마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