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episode(17) 상생의 이유#25
지금부터는 앞으로 ‘명’을 위한 중요한 협상의 시간.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미 목적을 이룬 천존이었기에, 나를 죽이려 한다면 협상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나를 비롯해 현계인들은 다음 미션으로 나아가질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미 이랑 진군을 처치하면서 협상의 조건을 이룬 것은 분명했음에도….
이제 와서 칠정안을 제대로 사용한 것도 특수한 상황에 발동하는 그 기능을 믿은 것.
즉, 한쪽만 사용했던 그동안과는 다르게 양쪽을 모두 사용함으로써 특수한 능력을 더욱 정확하게 발동하기 위함이었다.
이마저도 도박에 가까웠지만.
천존은 변한 내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나는 그 웃음에 한껏 긴장한 채, 생각을 정리했다. 이 눈은 특별하디 특별한 눈. 기록자들의 왕이 이 눈을 얻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 나는 벌써 수 싸움에서 지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
스아아아.
내 생각이 짧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존의 눈이 무지갯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나와 같은 눈을 보이고 있었다. 기록자의 왕답게 천존은 ‘칠정안’을 얻었던 것이었다.
즉, 눈의 사용법은 천존이 더욱더 능숙할 것이 분명했다.
제기랄, 설마 했는데…!
천존은 소탈하게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무한한 삶을 반복하며 기록자로 살아온 천존의 앞에서는 감추거나 수 싸움이니, 협상이니 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순수하게 천존에게 조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천존 앞에서 나는 그저 약자인 셈이었다. 천존을 향해 물었다.
“역시 그 눈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허허, 이 눈은 특별하지. 전지에 가까운 특수한 능력을 지녔거든. 한데…… 현계인인 자네가 이 눈을 얻을 줄은 몰랐네.”
“그 말은 제가 아니라도 이 눈은 누군가 얻었을 거라는 말입니까?”
“그렇네. 중요한 것은 아니니 넘어감세.”
“……”
“아직 사용법은 제대로 모르겠지, 언젠가 자네도 깨달을 것이야. 이 눈의 진정한 사용법을.”
천존은 눈에 대해 말을 이어가면서도 때가 되면 알 수 있다는 듯, 칠정안을 거두었다.
금세 검은 눈동자로 변모한 천존의 눈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이야기를 해 보자고.
스스스슥.
칠정안의 발동을 취소하자, 천존이 희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자,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나?”
“좋습니다.”
그동안 나를 어떤 식으로 이용했든, 눈앞에 존재는 전투로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칠정안은 물론 화안금정도 아무런 쓸모가 없을 지경이니. 나는 그저 순수한 인간으로서 천존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말한 것들을 지켜 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내 마음속에 기록자를 향한 불신이 피어오르기에 그런 것일 게 분명했다. 나는 스킬, 냉정의 발동되는 것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허상의 공간에서 적막을 깨트린 것은 나였다.
“절 시험해보신 겁니까?”
“이랑 진군 말인가?”
“네.”
“물론이네. 내가 힘을 쓰게 한다는 것은 자네가 그만한 존재임을 증명해야겠지. 이미 지쳐 전투력이 하향된 이란진군이었네만, 그 정도도 이기지 못하면 자네는 다음 미션에 도달해봐야 죽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래서…. 마음에 드는 결과를 보셨습니까?”
나는 조용하게 천존을 향해 물었다. 마음에 드는 결과라.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천존의 마음은 날 돕냐, 안 돕느냐로 나누어져 있을 뿐.
“결과라, 예상은 했네만 역시 잘 해결해주었더군. 시간을 들였어도 우리 신선들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네만, 자네가 많은 시간을 단축해 주었지.”
천존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란 수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자네는 어째서 미션이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글쎄요. 짐작 가는 바로는…. 누군가의 변덕이지 않겠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어서 그랬을까? 순간, 미세하게 천존의 동공이 흔들거리는 것을 느낀 나였다.
정말 짐작일 뿐이었건만,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다는 듯.
“자네가 짐작하는 그 누군가도 예상해보았는가?”
“적어도…. 기록자인 당신들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관리자라 불리는 그들도 아니겠죠.”
“상당히 많은 부분을 헤아리고 있군. ‘명’을 부여받았으니 그 정도 예측하는 것은 간단했을 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이 모든 시작을 파헤치려 한 적은 없었지만 막연하게 ‘이래서 이랬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단순한 예측이었다.
아무래도 반은 맞았나 보군.
“그렇다면, 자네는 우주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천존은 또다시 이야기의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알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무엇을 알게 해주려는 천존의 의도였을까?
주인이라….
“이 넓은 우주에 그런 것이 존재합니까?”
“물론이네. 주인이라는 것은 말뿐인 허울이네만, 그 자녀로 인해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건 확실하니까.”
“허울뿐인 주인이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말들이 천존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 결과, 문뜩 스치는 누군가가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설마?
“누구인지 안 것 같은 얼굴이군.”
“글쎄요. 이마저도 제 예상일 뿐이니.”
“허허, 그런가? 좋네.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네. 다만, 확실한 건 나를 비롯한 기록자들은 자네를 도울 것이야.”
“그건, 어째서죠? 대가 없는 도움은 불신만 커지지 않겠습니까?”
“대가라….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네. 세계의 비밀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애초에 모든 걸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랑 진군을 막아서면서 처음 말한 두 가지만 들어줘도 충분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가는 없네. 아니, 대가는 이미 지불한 것이 옳겠군. 전 우주에서.”
“뭐…라고……?”
무언가에 머리를 강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전 우주에서 대가를 지불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형’이라는 존재와 무언가 얽혀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걸까.
천존은 갑작스레 인자한 미소를 풀고선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명’을 쫓아가면 그 끝에 알 수 있을 것이야. 아니, 잘하면 이 우주의 주인도 만나볼 수 있을 테지. 지금의 자네에겐 주인이 누구이건 중요하지 않겠지만, 언젠가 깨달을 날이 분명히 올 것이야.”
“……”
“허나, 자네는 한 가지 분명하게 선택해야 할 시간이 올 것이네. 이것만은 기억하게나. 자네가 무슨 선택을 한들, 결국 힘든 선택의 순간이 올 것이야. 그럼….”
화악!
천존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무엇을 말하려 했길래 공간을 만들어 이야기를 이어갔던 것일까. 모든 것이 의문으로 남은 시점에 공간은 사라지고 눈을 떴을 땐, 천존의 거처로 모든 이가 모여 있었다.
찝찝하네.
상처 대부분을 치유한 일행들이 기다리는 것은 나였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방향이 궁금해서겠지. 나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모두 고생했습니다.”
* * *
하루라는 시간이 흘렀고.
부상이 심한 일행들이 존재했고 무엇보다 손오공은 아직도 석상인 상태 그대로였다. 나는 바로 옆에서 임아린과 대화를 나누는 강자아에게 물었다.
“손오공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이대로 못 깨어나는 건….”
“걱정하지 말게, 지나치게 강한 힘을 단번에 사용한 대가이니. 원기만 회복되면 금방 깨고 나올 것이야.”
“죽지 않았다는 겁니까?”
“물론이네. 자네는 모르는가?”
“무엇을….”
“손오공은 불사라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생사부에 적힌 자기 이름을 지우고 태상노군의 약과 서왕모가 키운 반도를 훔쳐먹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듯….
“아….”
어째서인지 ‘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명’을 부여받은 강자아와 서먹서먹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승과 제자라고는 하나,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딱히 정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이들은 날 이용했으니 나 또한 그리하는 것쯤이야.
나는 저 멀리 연회 준비를 하는 일행들을 말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부상을 당해 전투에는 참여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천존의 명을 받은 신선들이 그들을 조금이나마 치료해주었다. 연회를 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테지.
먹기만 해도 능력치가 상승하는 음식들과 신선들이 즐겨 마시는 선주(仙酒)를 마시다니, 아무래도 멸망 이후에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큰 호강을 누리는 것 같았다. 본래라면 몇 번을 죽어도 맛볼 수 없는 것들을.
연회는 우리뿐만이 아닌, 전쟁에서 승리한 신선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곳은 신선, 천인, 요괴들 세 곳이 균형을 이루었지만, 그들의 미션이 기록자로 남아야 하는 것이 최후의 미션이었으니 연회를 여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균형을 하나로 통합한 이 우주의 기록자들이니.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냈다.
저벅, 저벅.
이제는 신선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모습을 뽐내는 임아린. 7살 때 만났지만, 시간 괴리로 이곳에서 12살이 된 임아린. 5년이라는 시간을 힘든 수행으로 보내고 나와 김도은, 김영광을 하염없이 기다린 아이.
어쩐지 그 아이를 바라보자,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임아린은 다가오는 나를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시간 함께 보낸 우리였건만, 이 정도로 나를 생각해주다니….
나와 함께한 시간보다 이곳에서 보낸 5년이 더욱 길었을 텐데.
나는 환하게 웃으며 임아린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많이…. 무거워졌구나?”
“아저씨! 숙녀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에!!”
“여자는 무슨, 아직 꼬맹이인 게?”
“에잇!!”
그저 어리기만 했던 아이가 어느새 성장한 모습에 신기하다는 생각과 머릿속이 조금 어지러워졌다. 어린 것은 여전했지만 나는 이 아이를 두고 이곳을 나가야 했으니까.
임아린을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일행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움직였다. 김도은과 김영광은 이 아이를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임아린을 모르기에. 앞으로도 이 아이를 잘 보살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다들 몸은 괜찮습니까?”
친근한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고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하기 시작했다. 가장 신나 보이는 것은 다이아나였고 김도은과 김영광이 울먹이며 말했다.
“고생은요…. 안이 씨 덕분에 모두가 살 수 있었습니다. 고생은 안이 씨가 했죠.”
“그건 그렇지만…. 어디 가서 그렇게 강해져 온 거람? 질투 나네.”
“하하….”
두 사람의 말에 쓰게 웃은 나는 차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할 거야.”
“……?”
갑자기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차정우의 표정.
“모두를 지켜줘. 너라면 할 수 있으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한참 연회 중에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벗어나 다음 미션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아주 간단한 이유지만 관리자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결국, 나의 일행들은 몇 년일지 모를 시간을 이곳에서 상생해야만 했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마음을 다잡은 후, 비장한 표정을 비추며 입을 열었다.
“저 먼저 다음 미션을 진행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