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episode(17) 상생의 이유#23
전쟁을 끝내겠다? 강자아는 인상을 쓰는가 싶더니, 이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안 본 사이에 오만해진 건가.”
아무런 악의도 없는 의문. 그 의문이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강자아는 내가 강해질 초석을 쌓아준 스승이나 다름없었으니.
“글쎄요. 그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듯싶습니다만.”
“그렇군. 제자의 성장은 언제나 기쁜 법이지.”
강자아의 말에 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천존과 강자아는 ‘명’을 부여받았고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나 또한 이들을 이용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일행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게, 손오공을 비롯해 이 장소에 있는 모두는 내가 책임 질 테니.”
“듬직하시네요. 그럼….”
[스킬, [축지(縮地) LV.1]를 발동합니다.]
사삭.
* * *
축지라고 이동하는 것에 있어서 만능은 아니었다. 먼 거리는 여러 번 사용해야 했기에 마력의 소모가 상당했고 무엇보다 거리를 접어서 이동하는 것일 뿐, 순간이동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드 스토어’에서 구매할 수 있는 이동 스킬 중 진화만 잘 이루어진다면 최상위급의 스킬임은 분명했다.
“이쪽인가?”
강자아가 가리킨 방향으로 이동하자, 시야에 보이는 건 천인, 요괴, 신선들의 시체였다. 지독한 상황에 인상을 조금 찌푸린 나는 천존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옥황을 잡아라!!”
천존의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지자, 신선들은 일제히 천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오공이 무엇 때문에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부재로 요괴들은 이미 몰살당한 뒤였다.
전투는.
이미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천존.”
“자네 왔는가?”
“상황은요?”
천존이나 나나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명’을 따라가듯, 질문을 하거나 내가 전장에 난입한 것은 묻지 않았다. 나 또한 궁금한 것은 그다지 없었고.
“신선들이 승기를 잡았네. 적은 몇몇 대장군과 옥황이 남아 있지.”
“그렇습니까.”
멀리 보이는 신선과 천인의 전투를 바라보던 나는 천존을 향해 물었다.
“제가 이 전장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당신의 ‘명’에서 제가 필요한 시점은 지금이고요?”
“……알고 있으니 솔직히 말하겠네. 맞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유리하려면 협상의 승기를 잡아야 했다.
“그렇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군. 말해보게, 내 힘닿는 것은 도와주겠네. 자네의 형이 그랬던 것처럼.”
“……”
형이라……
아주 잠시, 고민한 뒤. 나는 천존을 향해 터놓고 말했다. 더이상 서로 감출 것은 없었기 때문에.
“좋습니다. 조건은 두 가지.”
“말해보게나.”
“첫째, 다음 미션으로 나아가려면 현계인들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전쟁 후, 최후의 기록자가 된다면 모든 현계인들을 숨겨주시지요.”
첫 번째 부탁의 이유는 간단했다. 외부, 내부, 죽은 자들이 상생하려면 누군가 힘을 써 감춰야만 했다. 즉, 이번 미션에서 최후에 남는 것은 나 혼자가 돼야 한다는 말이었다.
천존은 잠시 고민하더니 나를 향해 답했다.
“간단하군. 알겠네.”
“두 번째, 이곳의 시간 괴리는 현계와 다릅니다. 해서…. 숨겨둔 현계인들을 수행시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내보내는 것은….”
“그것도 쉽지. 알겠네.”
두 가지 부탁의 이유는 간단했다. 나와 일행들의 격차는 너무나 많이 벌어졌기에, 다음 미션으로 진입 시 무참히 살해당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미션을 넘기고 그와 동시에 일행들을 수행시켜 다시 보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물론, 일행들의 수행이 끝날 때까지는 나 혼자서 버텨야 하겠지만.
천존은 별거 아니라는 듯, 호탕하게 웃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곤 인자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자네는 무엇을 해줄 텐가?”
“이 전장에서 싸워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요?”
“허허, 자네보다 강한 이들이 널리고 널렸거늘.”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전투의 승기는 우리 쪽에 있네만, 단 한 명의 대장군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네.”
천존이 손짓하며 말한 방향엔 홀로 신선들을 상대하는 강자가 있었다.
삼안…? 삼첨창…?
한눈에 봐도 그자가 누구인 줄은 대략적인 신화와 ‘명’을 보았기에 알고 있는 사내였다. 손오공과 버금가는 강자였지만 단 한 번도 손오공을 이기지 못한 사내.
“양전, 그러니까 이랑 진군 맞습니까?”
“허허허, 자네는 알 거라 생각했네. 저자만 무너지면 이 전쟁은 신선들의 승리로 끝날걸세.”
“직접 하시면 편할 텐데요.”
“아주 미세한 확률로 내가 죽는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의미가 있겠는가?”
“…… 해야 할 것은 그거 하나뿐입니까?”
“물론이네.”
천존이 말하는 의미는 간단했다. 자신과 협상할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 전쟁의 승기를 잡겠다는 것.
능구렁이 같으니.
스릉.
나는 용광검을 꺼내 들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다대일보다는 어쩌면 이랑 진군 한 사람만을 처치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지쳤다고는 해도 강자임에는 변함없었다.
“조심하게. 자네가 살아야 나를 비롯해 자아, 손오공 그자들이 이루는 것이 많아질 테니.”
“웃긴 말씀을 하시네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 * *
순식간에 전장의 중심지로 이동한 나는 이랑 진군이 신선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것을 바라보곤 곧바로 용광검을 날려 보냈다.
쐐에에에엑!
까강!!!
거친 쇳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며, 용광검과 이랑 진군의 삼첨도가 부딪혔다. 당혹스러움에 거리를 벌린 그는 곧바로 자세를 고쳐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인가?”
눈을 부릅뜨곤 나를 노려보는 이랑 진군. 신선들의 시체를 배경으로 온몸에 피 칠갑한 그는 악귀와 다르지 않았다.
버프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니, 사용해도 확실히 이길지 모르겠는데?
문뜩 든 생각은 손오공을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현재의 나는 손오공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치고 지친 이랑 진군이었기에 아예 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이랑 진군의 물음에 답했다.
“인사가 좀 거칠었나?”
“크큭. 아니, 가벼웠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운을 보아하니 같은 편은 아니겠군.”
“뭐, 그렇지.”
이랑 진군은 재미난 것을 발견한 듯,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띄워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신선들은 당황스러워하는가 싶더니, 이내 천존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이탈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노인네. 혼자 해보라 이거지?
“시작해볼까?”
“음!”
나는 재빠르게 움직여, 이랑 진군을 향해 돌격했다. 공중이 아닌 지상전이라 그런지 축지를 사용하는 것에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챙!!!
검과 창끝이 부딪히자 공기가 터져나갔고.
단 한 번의 부딪힘으로 이랑 진군의 강함을 파악한 나는 곧바로 버프 스킬들을 사용했다.
[선인의 격 LV.2]
[만인지적(萬人之敵) LV.2]
[요선(妖仙)의 기운 LV.1]
세 가지 스킬의 조합으로 2,500% 강해지자, 너무나도 강대한 기운에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랑 진군도 갑작스레 강해진 나를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어냈다.
“허, 자넨…. 강하군. 내 가슴에 상처를 낸 그 사내보다 훨씬 더.”
사내? 이미 싸워본 적이 있는 건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나를 보며 저런 말을 했다는 건, 현계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차정우인가?
이제는 신선, 성좌들과도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나였기에 그다지 중요한 말은 아니었지만.
“다시 시작해보지.”
“좋네.”
파앗!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이랑 진군의 모습에 곧바로 금빛의 눈을 번뜩이며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화안금정.
손오공의 다른 한쪽 눈. 이들은 그러니까 천인들은 이 눈을 보면 대개 반응들이 비슷했다. 분노하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눈앞에 존재는 도망보다는 흥미를 느끼겠지만.
“그 눈은…!?”
당혹스러움에 공격을 멈춘 이랑 진군이었다. 나는 곧바로 용광검을 공중에 띄워 심검을 사용해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깡, 깡!!
“크흡…!!”
용광검은 ‘신살’의 기운을 가진 검. 최종적으로 성장을 이룩해 공격력과 방어 무시 90%라는 무식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공격에 당한다면 이랑 진군도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다음은.
홍염(紅焰)
화륵.
용광검이 마구잡이로 이랑 진군을 공격하자, 빈손에 홍염을 가득 실어 그를 향해 뿜어냈다. 엄청난 열기가 주변의 사체들을 집어삼키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확인 시켜주는 것 같았다.
“크하악!!”
이랑 진군은 무난하게 공격을 피해내는가 싶더니, 곧 홍염에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의 기괴한 신음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나는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 파천의 무공을 사용했다.
극파천 신공, 파천만뢰공
쾅!!! 쿠콰콰쾅!!!
곧바로 쏟아지기 시작한 만 개의 벼락은 이랑 진군을 향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너무나도 많은 숫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고통에 소리를 지르며 겨우겨우 버텨내는 이랑 진군.
“크하하하아아!!!”
나는 재빠르게 용광검을 거둬들여, 한 가지 스킬을 사용했다. 이 전이었다면 공격을 흘리거나 카운터에 능한 검법이었지만.
지금은 카운터가 아닌, 오직 순수한 검법으로 공격이 가능해졌다. 물론, 무림계의 스킬이었고 레벨도 낮아 큰 효율은 내지 못했지만 마무리하기엔 나쁘지 않은 스킬이었다.
[스킬, [태극혜검(太極慧劍) LV.1]을 발동합니다.]
스스스스슥.
원래 알고 있던 움직임이라도 된 듯, 스킬을 사용하자 춤을 추듯 움직이는 나였다. 검으로 태극을 그려내고 유려한 발동작으로 부드럽게 움직였으며, 내 움직임 끝에는 태극과 팔괘의 형상이 마력으로 나타났다.
그 중심.
파앙-!!
빠르게. 아니, 느리게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속도로 태극과 팔괘의 중심으로 검을 질러 넣자, 곧 공간이 일그러지며 이랑 진군을 향해 마력의 파동이 거칠게 쏘아졌다.
쿠콰콰콰콰쾅!!!!
미친, 이게 1레벨이라고?
일전에 장삼풍이 죽음을 각오하고 천마, 윤문과 싸울 때 썼던 것과 비슷했지만 위력은 완연하게 달랐다. 너무나도 강한 위력에 사용한 나조차도 온몸을 움찔거릴 정도.
태극혜검의 단 하나뿐인 공격식은 이랑 진군을 집어삼키며 지평선 너머로 나아갔다.
콰콰콰콰콰.
무자비한 검격은 전장의 모든 것을 갈라냈다. 그리고.
쿠구구구.
희뿌연 흙먼지가 이랑 진군을 비롯해 휩쓸고 간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
끝났나?
화악!
아니다. 아직이야.
갑작스레 이랑 진군의 기운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시야에는 안 보여도 요선의 기운으로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강해지고 있다.
위험이었다. 본능이 알려주는 위험.
나는 곧바로 속성부여가 진화를 이룩한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속성 마스터 LV.1]을 사용합니다.]
아직은 레벨이 낮아 고위 마법을 쓸 수는 없었지만, 이 스킬로 진화를 이룩할 때 나는 보았다. 부여하지 않아도 모든 속성을 가질 수 있고 더 나아가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휘이이이익.
바람 마법을 사용해 흙먼지를 거둬내자, 삼첨창에 기대어 쓰러지지 않은 이랑 진군이 보였다.
“훅… 후욱….”
한쪽 팔이 잘려 나가고 오른쪽 눈을 베였는지 이마의 삼안과 왼눈만을 겨우 뜨고 있었다. 이랑 진군은 그러면서도 나를 노려보며 기운을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대, 대단해. 아주 대단해. 내가 상대한 그 어떤 이보다 강하군.”
나는 괜스레 생각난 것에 궁금증을 못 이겨 물었다.
“손오공보다 대단했습니까?”
“손오공? 크하하핫. 솔직히 말하자면….”
이랑 진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긴장된 표정을 짓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솔직히 모르겠군. 난 그 자녀와 싸워보기는 했지만, 생사를 건 전투를 해본 적은 없지. 이 공격은…. 그래, 그 시절 손오공에게 받은 어떤 공격보다 강했네.”
“충분하군.”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물론 ‘그 시절’이라는 말이 앞에 깔리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손오공에게 닿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의 손오공은 제천대성. 현 상태의 손오공은 투전승불(鬪戰勝佛)이 되어 몇 배는 강해졌을 테지만.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이랑 진군을 바라보았다.
“이게 끝은 아니겠지?”
“물론!”
이랑 진군은 기다렸다는 듯, 삼안을 발동시켰다. 검고 붉은 기운이 이랑 진군을 집어삼켰고 곧 그의 모든 눈이 검게 그을렸다. 흡사 동공 전체가 검은 귀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사아아아.
이랑 진군의 기운은 더욱더 거대해졌고 검붉은 기운을 갈무리하자, 악귀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왔다.
“끄…. 끄끅…. 겨, 결판을 짓자. 현계의 이, 인간이여.”
날아가기 직전인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남은 한 손으로 삼첨창을 쥐어잡은 이랑 진군.
나 또한 질 수는 없었다.
[스킬, [정령화 LV.2]을 발동합니다.]
악귀의 기운과 정령의 기운이 서로를 찢어발기려 으르렁 대기 시작했고.
쿠구구구구.
땅의 진동은 더욱 거세졌다. 흡사, 세상의 종말을 보는 듯한 풍경.
스아아아.
마력의 형상으로 나타난 팔에 마력의 검을 쥐고.
신살의 기운이 담긴 용광검을 반대 손에 쥐고.
[스킬, [태극혜검(太極慧劍) LV.1]을 발동합니다.]
양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검을 쥔 나는 다시 한번 춤추기 시작했다.
태극, 팔괘를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