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episode(17) 상생의 이유#13
차정우를 등지고 뛰쳐나간 요시키는 아주 천천히 아무것도 없는 두 손을 일직선으로 내리그었다.
아니, 천천히라는 말이 옳을까?
보는 사람 누구나 느려 보이는 그의 행동은 황풍 마왕도 반응하지 못했다.
“이따위 느린 공격을 맞을 것 같으냐!!”
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두 팔의 마력을 집중시키는 황풍 마왕.
하지만.
서거거걱.
“으응?”
요시키의 무형검이 베어지는 순간, 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을 본 황풍 마왕은 이미 한쪽 팔이 달아난 뒤였다.
“이, 이런…!! 고작 현계의 인간이 감히 나를!!!”
분노한 황풍 마왕은 인간과는 색이 다른 액체를 한 쪽 팔에서 뿜어내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황풍 마왕의 분노는 당연했다. 손오공이나 칠 대성만큼 강한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 또한 강함에 있어서 결코 약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현계의 인간이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자기 팔 한쪽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차정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건 내가 이루지 못한 경지….”
차정우는 금방이라도 자괴감에 빠져들 듯, 자신이 한참은 약하다는 생각에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자기 나름의 반성이었고, 자기 나름대로 주제를 파악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차정우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안에게 휘둘리는 것도 화가 치미는데 같은 용사라는 그러니까, 이미 죽은 용사였던 사내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경지를 보이는 것에.
전투력으로 요시키를 이기라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것은 각종 지원을 받은 용사의 혜택과 시스템의 발현으로 가능한 것. 순수한 힘의 경지는 요시키가 한 수 위라는 소리였다.
“제기랄…. 그동안 나는 뭘 한 거지…?”
차정우의 중얼거림에 어느새 다가온 이지은이 말을 걸어왔다.
“정우야, 넌 잘하고 있어. 날 구하려고 무리해서 강해진 거잖아.”
“……”
“그러니 얻을 것도 못 얻고 건너뛴 부분들과 놓친 것도 많을 거야. 안 그래?”
이지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정우는 요시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해. 기본부터 다지자. 욕심부리지 말고….”
금방이라도 화가 터질듯한 차정우는 금세 마음을 다잡고 이지은이 하는 말을 충고로 받아들였다. 자존심이 강한 사내인 건 분명했지만, 아닌 건 아닌 것. 차정우는 자기 잘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내였다.
솔직히, 잘못한 건 없지만.
그 모습에 이지은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내 남자친구지. 어서 가서 도와줘야지?”
“물론이다.”
“난 여기서 성흔으로 도울게. 그래야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잖아.”
“다녀오겠다.”
파앗!
순식간에 엄청난 높이로 도약한 차정우는 허공에서 요시키를 향해 소리쳤다.
“비켜라!”
“으응? 갑자기 뭔…. 으악!!”
갑작스러운 고속 낙하에 요시키는 거리를 벌렸고.
천화난영참.
차정우의 검에서 붉은 에너지가 발아하더니, 그것은 곧 검기로 변했다. 수십 개의 검기는 황풍 마왕을 찢어발기듯 날아갔고.
콰콰콰콰콰!!!
“끼끼익…. 이, 이럴 수가…!!”
엄청난 공격에 황풍 마왕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네놈의 도움이 없어도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괜한 자존심에 한 마디를 툭 내뱉은 차정우. 그는 등을 돌려 조용하게 말했다.
“네놈이 보여준 경지는…. 금방 따라잡을 것이다.”
타탓!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차정우를 멍하니 바라보던 요시키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참, 솔직하지 못한 놈이네.”
* * *
이미 신공표가 데리고 온 요괴는 셋이나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런데, 대진운이 잘못되었기라도 했을까. 다이아나와 임해든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이 새끼 왜 이렇게 강한데?”
“마왕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건 아닌 듯합니다.”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자, 혼세 마왕은 두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공격을 무효화하고 있었다.
혼세 마왕의 특기였다. 자신보다 마력이 낮은 자의 공격은 모든 것을 혼돈 속으로 빨아들이는 자신만의 기술. 즉, 다이아나와 임해든은 그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혼세 마왕보다 약하다는 소리였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사실 전승되는 이야기 속에 혼세 마왕은 약한 편에 속했다. 등장하자마자 손오공에게 당해 죽고 말았으니. 하지만, 지금 이것은 현실. 손오공이 감정안과 화안금정 두 가지 눈을 가지고 현계의 인간들과 싸우듯, 혼세 마왕도 이야기 속과는 달랐다.
혼세 마왕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의 공격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무슨….”
“설마…!”
단순한 물음이었지만, 두 사람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협공을 진행하면서 브레스를 더불어 용언 마법, 서클 마법을 난사한 다이아나와 임해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퍼부었기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은 혼세 마왕의 한마디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보아라. 무지한 현계의 인간들아.”
혼세 마왕은 오른손을 하늘 높이 들더니, 곧 무언가 알 수 없는 소리에 칠흑같이 어두운 무언가가 허공에 생겨났다. 동그란 것이 빨려 들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저것은 마치, 블랙홀과 비슷해 보였다. 혼세 마왕은 칠흑같이 어두운 혼돈을 만들어내고도 무언가 부족한지, 왼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스스스스.
혼돈과 크기가 비슷한 새하얀 무언가가 생겨났고.
혼세 마왕은 다이아나와 임해든을 향해 말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지. 크큭, 안 그러나? 자, 받아 보거라 이것이 네놈들의 최후니.”
혼세 마왕은 높이 치켜든 왼손을 두 사람을 향해 뻗어냈다. 동시에, 그동안 다이아나와 임해든이 사용한 온갖 스킬들이 쏟아져나왔다. 그것도 더욱더 강한 위력을 뽐내며.
쿠콰콰콰콰쾅!!!
엄청난 위력이 한바탕 쏟아지고 난 뒤,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누구 하나 죽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죽을 것이 뻔한 상황.
“커, 커헉…. 숨 쉬는 것도 힘든데…. 당신은 괜찮습니까?”
“헉… 허억…. 말을 아껴라. 조금이라도 힘을 비축해야 하니.”
힘을 비축한다는 다이아나였다. 하지만, 이미 모든 힘을 소진한 이런 상황에 비축은 무슨, 죽을힘을 다해도 안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대장….”
다이아나의 외마디가 조용히 흘러나왔고.
“잘 먹어주마. 현계인이여.”
혼세 마왕은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해 스킬을 발동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혼돈이 두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순간.
촤악!
새하얀 검신이 혼돈을 두 갈래로 갈라버렸다.
“대, 대장?”
“네가 죽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차정우였다.
무심한 듯, 한 마디를 내뱉은 차정우는 말없이 걸어 나갔다.
터벅, 터벅.
이지은을 제외하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자를 뽑으라면 차정우는 거짓 없이 말 할 수 있었다. 오른팔이 되어 준 다이아나와 왼팔이 되어 준 권지훈.
두 사람만큼은 빌어먹을 미션 중에 결코 죽지않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차정우였다. 그런데.
그런 다이아나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차정우를 분노케 했다.
“네놈이 그런 건가?”
차정우의 물음에 혼세 마왕이 비웃듯 말했다.
“크큭. 먹이가 한 마리 더 늘었군. 오늘은 잔치인가!?”
“그렇군. 네놈이 맞다는 소리로 알아듣겠다.”
쿠구구구구.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 차정우의 전신에서 기운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황풍 마왕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칼날에 베인 그였지만 그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용솟음치는 기운에 다이아나와 임해든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낀 혼세 마왕이었다.
“무, 무슨….”
넘쳐나는 마력과 한눈에 봐도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기운. 그런 기운에 겁이라도 먹은 것일까. 혼세 마왕은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핫!! 이 몸은 할 일이 생각났다. 그, 그럼…!!”
뒷걸음질 치면서도 순식간에 몸을 돌린 혼세 마왕은 공중에 날아올라 재빠르게 이동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차정우는 인상을 찌푸리곤, 다이아나를 향해 말했다.
“고작, 저런 놈한테 당한 건가? 조금 더 정진해라.”
“미, 미안해 대장….”
“복수는 해주겠다.”
차정우는 멀어져가는 혼세 마왕을 향해 새하얀 성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신성 봉인, 봉인 검.
화악!
푹.
순식간에 날려져 간 차정우의 성검이 혼세 마왕을 꿰뚫었다. 동시에 고통에 몸부림치던 혼세 마왕이 뭐라 외친 것 같았지만….
말 그대로 악을 봉인하는 이 스킬은 순식간에 빛과 함께 검 속으로 혼세 마왕을 집어 삼켜버리고 말았다.
파앗!
일말의 신음도 내뱉지 못한 혼세 마왕.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차정우였다.
다이아나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 대장. 그건 수명을 깎아내는 스킬이잖아!! 그런 걸 쓰면 어떡해!!”
다이아나의 외침에도 차정우는 묵묵부답을 유지할 뿐이었다.
신성력을 소모하는 봉인 검은 자신의 수명을 깎아 악을 봉인하는 스킬로 봉인 당한 자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 수천 아니, 수만 년을 검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 정도로 차정우의 분노는 엄청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정우는 다이아나와 임해든에게 엘릭서 두 개를 던져주곤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온다.”
쿵!!! 쿠쿵!!
거인족이라 믿을만한 두 존재가 한 사람씩 들쳐메곤 전장에 난입한 것이었다.
“…… 그놈들 살아있는 건가?”
차정우의 물음에 그들은 들쳐멘 사람을 동시에 던져 버리곤 답했다.
“현계인은 맛이 없거든. 금선자의 환생 정도나 되야 먹을 법하지. 안 그렇소, 형님?”
“모처럼 동의하는 부분이다.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죽겠지.”
두 사람은 아니, 두 요괴는 이마에 거대한 뿔을 달고 각자가 금빛과 은빛으로 된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몸체는 평범한 성인 남성보다 세 배는 거대한 것이 흡사, 거인족을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차정우는 재빠르게 두 사람을 받아낸 뒤, 엘릭서를 입 속으로 들이부었다. 당장, 삼키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당한 두 사람이었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서 그런지 억지로 엘릭서를 삼켜냈다.
김도은과 김영광이었다.
차정우의 행동에도 멀뚱히 쳐다보던 두 요괴는 아직 할 게 있으면 더 해보라는 듯 여유를 부렸고.
차정우는 네 사람은 멀리 눕힌 뒤, 두 요괴를 향해 움직였다.
“기다렸나?”
“아니, 우리는 참을성이 좋은 편이거든.”
“아우야, 넌 참을성이 좋지 못하다.”
“형님이 할 소리요!?”
모든 기운을 끌어올린 차정우는 관심도 없다는 듯, 두 요괴는 말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도발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아주 잠시 들었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두 요괴는 차정우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냈다.
“나는 금각.”
“나는 은각.”
각자의 이름을 말한 금각과 은각 형제는 동시에 깊이가 보이지 않는 기운을 내 뿜으며 말했다.
“우리는 형제다. 우리를 상대하려면 제천대성이라도 데리고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