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episode(17) 상생의 이유#11
천존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게 변해갔다. 운명이라니, 천존의 말대로라면 이 안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차정우는 천존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모습에 백학과 손오공이 기운을 방출시켜보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였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지금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안 그놈은 미래를 알고 우리를 이용했다는 것인가?”
차가운 그의 시선이 천존을 향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순간, 천존은 입을 열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세.”
“그게 무슨 말이지?”
“그자의 명은 ‘죽음’이었네. 그런데…. 죽음을 이겨내었지. 즉,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운을 바꾼 것이야.”
“...!?”
차정우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조금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천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자는 명 자체를 바꾸어 버렸어. 지나쳐도 무방한 어린아이를 구했고, 위기에 빠진 여성을 구했지. 그 이후로도 비슷한 행보를 계속해서 이어갔지.”
천존은 자신이 이런 부분을 말해도 되는지, 이 안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천존 또한 ‘운명’을 부여받은 자. 자신의 ‘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미래에는 없었던 자상하고 든든한 아군을 들였고, 거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존재를 거둬들였지. 그 이후도 계속해서 그자는 운을 바꾸어 나갔네. 죽음이 정해진 이를 살리고 반대로 어떤 자는 죽음을 맞이했으니.”
천존이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리에 존재하는 현계의 일행들이었다. 천존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요마계의 왕 손오공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선의 제자가 되었지. 그렇게 운을 바꾸던 그 사내는 모든 것을 바꾸고 미래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자들을 동료로 삼았다네.”
“……우릴 이용하려던 게 아니었나…?”
차정우가 조금은 풀이 꺾인 표정으로 천존을 바라보았다.
“그렇네. 자네도 그자의 미래대로였다면 외부와 함께 멸망하고 말았을걸세.”
“정령의 둥지에서 만나지 못했다면.”
“이후의 미션에서 죽었을 테지.”
천존이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에게 희망이었고 누군가에겐 감출 수 없는 당혹감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충격에 빠진 사람은 임해든이었다.
“원래는…. 민재 씨가 아닌, 내가 죽는 거였다는 건가…?”
“그렇네.”
천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모든 것이 자신이 살기 위한 행동이었네만, 그자는 미래의 동료를 이용하지 않고 새로운 동료를 받아들였네. 본래라면 이곳에서 살아남은 자는….”
쿵!
허공에 붕 떠 있는 지팡이를 지반에 강하게 찍은 천존이 모두를 한 명씩 흘겨보며 말했다.
“없었다네.”
현계인들은 모두가 충격을 받은 듯 표정들이 제법 볼만했다. 살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이 세계의 끝을 보기 위해 달려왔다고 생각했건만, 이 안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운명이라니.
장내에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해서, 자네들은 이 안 그자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것이나 다름없네.”
흔들리는 두 동공이 차정우의 심정을 말해주었다. 내부로 불려가 용사가 되어 ‘미래 예지’를 보았고 이지은을 구하기 위해, 내부세계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건만. 모든 것이 이 안을 위해서라는 말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차정우는 천존을 향해 물었다.
“그놈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애써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유가 뭐지?”
무언가를 짐작한 듯 묻는 차정우.
“자네는 현명하군. 간단한 답이니 말해주겠네.”
천존이 뜸을 들이자, 모두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향했다. 강자아와 손오공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그자의 운명을 위해서 움직여야 하네. 그것이 자네들의 운명이니, 모두가 살 방법은 그뿐이네.”
장내에 존재하는 모든 이가 천존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 모습에 차정우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임아린이었다.
“아저씨는 부모를 잃고 마물에게 먹힐 뻔한 절 구해주셨어요. 전 그걸로 충분해요. ‘운명’이라는 걸로 아저씨가 그렇게 힘들다면…. 전 아저씨한테 힘이 돼주고 싶어요! 그래서 그 힘든 수행도 이겨낸걸요!”
가장 어린 임아린의 입에서 이 안을 지지하는 말이 나오자, 그 뒤를 이어서 김영광과 김도은이 임아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전, 겁탈당할 뻔한 위기에서 구해졌죠. 그 이후는 당연하게도 마물들에게 먹혀 죽음을 맞이했을 테고요. 항상 모든 것을 알고 움직이는 듯한 안이 씨였는데…. 이제야 그 의문이 풀렸네요. 전 안이 씨를 믿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안이 씨는 파티가 없는 저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해주셨습니다. 자신의 ‘명’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절 믿어주셨죠. 제가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안이 씨와 도은 씨. 그리고 아린이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시키와 유금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고 있었고. 임해든은 조금 충격을 받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입을 열었다.
“안이는 내 친구야! 그걸로 충분해!!”
차정우가 다이아나를 바라보았으며, 이지은이 입을 열었다.
“정우와 만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전 그 사람을 믿습니다.”
모두가 이 안을 지지하는 상황에도 차정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강함이 이 안을 위한 것이라니. 모두를 지킨 것은 자신이 아닌, 이 안이었다니.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차정우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명을 이겨내기 위해 싸우는 이 안의 행적을….
“난…. 그놈을….”
모든 것이 변했고 모든 것이 바뀌었어도 변하지 않는 건 하나였다. 이 안이 운을 바꾸고 명을 다른 방향으로 진행했기에, 모두가 살 수 있었다는 것. 즉, 이 안은 모두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내 삶의 목표를 구해준 그놈은….”
모두의 시선이 차정우를 향했다.
“그 빌어먹을 놈은 앞으로 내가 지키겠다.”
차정우의 말에 모두가 환한 미소를 짓는 순간. 임해든이 여전히 충격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전, 당연하게 그분을 지킬 겁니다. 민재 씨 대신 제가 할 일이죠. 하지만…. 왜 절 살렸는지는 정확하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모두가 이 안을 따르겠다는 모습에 손오공이 피식 웃음을 지어냈다.
“내가 사제 하나는 잘 두었군.”
강자아도 손오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제자일세.”
“시끄럽다.”
그제야 천존은 모두가 이 안을 따른다는 확답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조금 내뱉었다. 그 모습 자체가 자신의 ‘명’을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천존에게도 이들 모두가 필요한 존재였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지, 자네들은 ‘신공표’를 찾아야 하네. 지금 여기 있는 모두가 움직여야 하지. 자세한 이야기는 자아에게 듣도록 하고….”
천존이 손오공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계약은…. 반드시 이루어주겠네.”
“그래, 그것이 내가 당신을 돕는 이유니까. 요괴들은 전부 천궁으로 향하는 길로 집합했을 거다.”
“고맙네.”
“이야기는 이쯤하고, 백학은 날 따라오거라.”
천존이 백학과 포탈 너머로 자리를 비우자, 강자아가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무길이 있느냐?”
강자아의 부름에 재빠르게 달려온 무길이 인사했다. 처음 차정우와 이지은을 천존의 거처로 데리고 온 사내였다.
“스승, 불렀소?”
“요괴들의 진영으로 가, 그들을 지휘하거라. 손오공이 빠진 이 시점에 그들을 원만하게 통솔할 사람은 무길이 너뿐이다.”
“쳇, 이쪽이 더 재밌을 것 같았는데. 알겠소. 그럼, 살아서 다시 봅시다. 스승!”
자리에 남은 건 현계의 일행들과 강자아와 손오공이었다.
차정우는 그런 강자아를 향해 물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 거지?”
“간단하네. 죄를 짓고 도망친 나의 사형을 붙잡아야 하네. 봉인해서 풀려나 아린이를 포함해 이 안을 방해할 테니.”
“그렇군.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하군. 당신은 왜 이 안을 돕는 거지? 아무리 스승이라고 할지언정 당신은 신선이 아닌가? 천존을 따르는 자가 어째서?”
차정우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강자아는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자신 또한 천존과 이 안 외에 ‘운명’을 부여받았으니.
“미안하네만, 그건 말해 줄 수 없네. 분명한 것은 자네들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렇게 된다면 손오공 이자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물론. 우릴 방해한다면 내가 이놈을 찢어 죽일 테니, 건방진 네 놈은 조용히 따르거라.”
“……”
손오공이 가세해 말하자, 차정우는 망토를 펄럭이며 뒤를 돌았다.
강자아가 말했다.
“우리가 가야 할 장소는 반사동. 그곳에 사형인 신공표가 있을걸세.”
“확실해?”
“물론, 확실한 건 한 가지 더 있네.”
“뭔데?”
손오공은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강자아를 향해 물었다.
“우리가 갈 것이라는 건, 사형도 알고 있을걸세. 엄청난 군세를 모았겠지.”
“결국, 또 싸워야만 하는 건가.”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는 신선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네. 요괴들 또한 마찬가지.”
“전쟁 중이니까.”
강자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맞네.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자들로만 사형을 저지해야 하네.”
“뭐, 이 몸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자네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조심하게.”
“별걱정을.”
그렇게, 내부인 차정우, 다이아나가.
외부인 김영광, 김도은, 임아린, 임해든이.
죽은 자 요시키, 유금필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
내부, 외부, 죽은 자, 신선, 요괴 다섯의 세계가 뭉친 전설의 시작이었다.
* * *
동굴의 입구에 도착한 일행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가며 구경 중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조금 그리운 표정을 짓더니,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손오공이 말했다.
“오랜만이군. 이곳은 다시 오기 싫었건만. 신공표 그놈은 반드시 찢어 죽여야겠어.”
“허허,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무리하기 싫어도.”
화악!
동굴 속에서 엄청난 기운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각기 다른 성질의 두 개의 눈을 가진 손오공만이 느낀 것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것도 그 때문. 강자아는 뒤늦게 기운을 느끼고 거리를 벌려 결계를 쳐냈다.
“안으로 들어오게!”
강자아의 외침에 결계로 들어간 일행들은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동굴의 입구로 향하는 순간.
“온다. 죽어도 책임 못 지니, 너희들 목숨은 알아서들 챙기거라!”
손오공의 말과 함께 엄청난 기운의 요괴들이 동굴 밖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동굴 입구를 틀어막더니, 눈 깜짝할 새에 결계 주변으로 진을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포위당한 일행들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순간.
“잡것들은 물러가거라.”
분신술.
펑! 펑펑펑!
순식간에 다섯이 된 손오공이 결계를 포위한 요괴들에게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황금빛 봉을 요괴들을 향해 뻗은 뒤, 화안 금정을 개안하며 외쳤다.
스아아아아.
한쪽 눈이 금빛으로 물들고.
“커져라, 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