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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성좌였다-157화 (157/206)

제157화

episode(17) 상생의 이유#9

은빛의 삼첨창을 쥔 이랑 진군. 가슴팍의 갑옷이 반으로 갈라져 맨살이 도드라져 보였고 그 사이로 검 붉은 액체가 엄청난 양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이랑 진군이었지만, 유금필의 일격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 단순한 상처일 리가 없었다.

이랑 진군은 흥미롭다는 듯 아주 천천히 유금필을 향해 이동했다. 하지만 자신의 검이 박날나고 모든 힘을 소진한 유금필은 숨을 헐떡거릴 뿐,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휘익.

이랑 진군의 삼첨창이 유금필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모습에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은 유금필.

이랑 진군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이랑 진군의 삼첨창이 목덜미까지 다가오자, 유금필은 그동안의 삶을 생각했다. 살아생전 태조를 도와 나라를 건국하고 무패의 장군이자 고려의 최강이었던 그.

이후, 수많은 생명을 거둔 죄로 지옥에 떨어져 벌을 받고 변방으로 쫓겨난 자.

유금필은 그 오랜 시간을 겪었음에도 태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눈물은 메마르고 지옥의 벌로 사람으로서 감정을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한 번쯤은 보고 싶었거늘.”

이제는 성좌가 되어버린 자신의 주군.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은 그를 만나고 싶었던 유금필이었다. 유금필은.

감은 두 눈을 뜨지 않고 목을 하늘높이 치켜들었다. 단숨에 베어달라는 의미였다.

“이만 끝내시지요.”

유금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랑 진군은 오랜만에 만난 강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삼첨창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휘두르려는 순간.

“그만.”

하늘에서 엄청난 빛과 함께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옷소매에 선녀 같은 우아한 자태. 기다란 검정 머리칼에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얼굴.

여인의 외침에 움직임을 멈춘 이랑 진군이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천궁의 병사들까지.

“다, 당신은…!”

당황한 이랑 진군은 손에 쥔 삼첨창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하다곤 해도 여인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한데….

“이쯤 하고 그를 보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여인은 커다란 눈을 가늘게 뜨곤 이랑 진군을 향해 말했다. 그 모습에 이랑 진군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그였지만 이런 상황에 나서다니.

이랑 진군은 떨리는 목소리로 여인을 향해 외쳤다.

“옥황과의 약속은 잊으셨습니까! 이런 상황에 당신이 개입하다니요!”

“약속은 지켰습니다. 반도는 잘 자라주었고 천궁 윗분들에게 바치면 그만이죠.”

“그, 그런…. 인제 와서 천궁을 떠나시겠다는 말입니까? 일 전에 자리를 비운 당신을 용서한 건 반도 때문이 아닙니다!”

“호호, 용서라니요. 제가 무어라고.”

순간적으로 기운을 내뿜자, 이랑 진군은 거리를 벌려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유금필이 아닌 자신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가 지킬 약속은 더 이상 없습니다. 반도는 충분히 남겨놓았으니, 알아서들 하시고. 이 자를 데려갈까 하는데 협조해주시면 고마울 것 같네요.”

“……”

갑작스러운 여인의 난입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랑 진군이었지만, 그녀는 곤륜산의 이인자였고 무려 여선들의 왕이었다.

이랑 진군은 긴장감을 풀지 않은 채, 여인을 향해 말했다.

“서왕모여, 윗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 모릅니다. 단지, 군인으로서 책임과 본분을 다해야만 하죠.”

“끝을 보자는 말이군요. 당신 사부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보내줄 생각이었습니다만.”

“스승님과 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당신을 피해서 도망친다면, 부하들은 절 비웃겠죠.”

“당신이 하는 행동은 객기일 뿐이에요. 이대로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당장, 요괴들의 왕 손오공이 나선다면 천궁은 쑥대밭이 될 텐데.”

“……”

손오공이라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거리는 이랑 진군. 서왕모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자와 같이 온 사내는 이미 곤륜산으로 보냈습니다. 저 또한 이 자와 곤륜산으로 갈 뿐이죠. 세 개의 세계가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는 이 순간, 쓸데없이 제 손에 죽을 생각이라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서왕모는 한순간에 기운을 끌어올렸다. 기다란 머리칼이 바람과 함께 휘날리는 것이 흡사 백색의 마녀를 보는듯했다.

“기, 기운만으로…. 이 나를…!!”

이랑 진군은 천궁을 포함해 신선들과 요괴들을 모두 합쳐도 그 강함이 절대 밀리지 않는 사내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이기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눈앞의 서왕모였다.

이랑 진군은 서왕모의 모습에 온몸이 부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압도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공포였다.

쿠구구구.

공포에 질린 이랑 진군과 천궁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서왕모가 말했다.

“수천의 병사와 이랑 진군이 죽는다면, 어느 쪽이 더 이득인지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선택은 존중해드리죠.”

서왕모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랑 진군은 아주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자신의 힘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 이 상황에 목숨을 버려가면서 현계인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이랑 진군은 삼첨창을 거둔 후, 서왕모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당신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모욕은 반드시 갚을 테니 그리 아십시오.”

“편하실 대로 하세요.”

공중으로 날아오른 이랑 진군은 병사들을 향해 손짓하며 외쳤다.

“전군, 철수하라!”

이랑 진군의 명에 천궁의 병사들이 일제히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윽.

유금필을 바라본 이랑 진군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유금필이오.”

“그렇군. 그대의 목숨은 다음에 거두지.”

휘릭.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자, 서왕모는 유금필에게 이동했다. 그녀는 갑작스레 손을 뻗었고 유금필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정신을 차리면 당신의 일행들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환한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외쳤지만, 그것은 서왕모에게 닿지 않았다.

파앗!

유금필이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야 서왕모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자에겐 당신들이 필요할 테죠. 후훗.”

* * *

곤륜산 가장 높은 봉우리.

이곳은 곤륜산의 우두머리이자, 신선들의 왕인 천존(天尊)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천존은 거대한 옥좌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명’에 대해서….

“슬슬, 그자가 올 때가 되었군. 자아는 잘 하고 있는 건지.”

천존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에 손을 그어냈다. 그러자 강자아를 비롯해 손오공과 임아린의 모습이 보였다.

“자아야, 너의 역할이 중요하니 선택의 순간은 반드시 올 것이야.”

다시 한번 허공에 손을 긋자, 세 사람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순간.

“천존이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백학인가? 들어오너라.”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며 등장한 사람은 다른 신선들에 비해 상당히 어려 보이는 이였다.

임아린 정도 되는 나이에 정갈하게 차려입은 법복을 입고서.

“그들이 왔느냐?”

“예, 스승님. 일단 두 분이 먼저 왔습니다.”

“그자는 아직인게로구나.”

“예, 스승님.”

백학이 말하자, 천존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불러오거라. 곧 다른 이들도 올 것이니, 직접 이야기하겠다.”

“예, 스승님.”

백학이 물러나고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르자, 거대한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자신이 기다리는 이는 아니었지만, 이들이 있어야 자신의 ‘명’을 이루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존의 ‘명’엔 이안이 필요했고 이안의 ‘명’엔 이들이 필요했다.

천존을 바라보면서도 의연한 자세를 취한 차정우와는 다르게, 이지은은 이곳에서 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당신이 천존인가?”

“야, 야! 어르신께 다짜고짜 반말하면 어떡해!”

이지은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존을 향해 말을 잇는 차정우였다.

“다시 묻지. 당신이 천존인가?”

이지은은 고개를 연신 숙이며 천존을 향해 사과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우리 애가 사람을 많이 못 만나봐서….”

“허허, 괜찮네. 개의치 말게나.”

백학이 인상을 쓰고 차정우를 노려봄에도 천존은 괜찮다며 웃을 뿐이었다.

“자, 그럼 그대들은 저쪽에 앉게나. 곧 그대들의 일행이 올 터이니. 이야기는 모두 모이면 그때 하도록 하지.”

천존을 중앙으로 양측에 놓인 열두 개의 좌석이 보였고, 백학은 차정우를 노려보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너, 한 번만 더 천존께 그따위로 말하면 뒤질 줄 알아. 알겠어?”

“꼬맹이가 입만 살았군.”

“야, 야야!! 그만해.”

이지은이 소리를 바락 질러대며 차정우를 막자, 백학 또한 두 사람을 안내하고 천존의 옆으로 이동했다. 다행스럽게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백학과 차정우가 부딪혔다면 현 상황에 차정우는 이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백학을 포함한 상위급의 신선들은 성좌와 비견해도 지지 않을 강함을 가지고 있었으니, 더욱더 강해지면 모를까 현재의 강함으로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장내는 계속해서 조용했다. 말없이 일행들을 기다리는 천존과 백학. 그리고 차정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혼자서만 다른 분위기를 내는 것은 이지은이었다.

“정우야, 너 자꾸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시비 걸 거야?”

“시비를 건 게 아니다.”

“맞거든…? 아직 안 죽은 게 신기할 정도라고.”

“……”

그녀의 말에 한쪽 눈썹이 꿈틀거린 차정우. 이지은은 말을 멈추지 않고 차정우를 향해 말했다.

이건 그러니까, 잔소리였다.

“존대가 어려우면 다나까 같은 말을 써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멸망이 이루어진 세상이어도 그런 식의 말투는 못된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알고 있다.”

“아는 사람이 그래? 앞으로 조심해. 알겠어?”

“알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는 이지은이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 순간.

거대한 문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존이여, 모두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너라.”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손오공과 강자아도 있었으니.

가장 먼저 천궁을 탈출한 김도은과 김영광이 선두에 서서 걸었고 그 뒤로 요괴들의 진영에 있던 강자아, 손오공 그리고 임아린을 포함해 다이아나와 임해든이 보였다.

무거운 분위기를 한순간에 깬 사람은 임아린이었다.

쪼르르 달려 나간 임아린은 천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천존 할배! 잘 있었어요!?”

“허허, 물론이지. 아린이도 잘 지냈느냐?”

“자아 할배가 잘 챙겨줬어요!”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신선들의 왕에게 할배라니. 백학은 또다시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강자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저, 계집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기운이 장내를 휘감자, 백학을 제지한 것은 강자아였다.

“사형, 절 봐서라도 봐주시지요.”

몸을 휙 돌린 백학이 말했다.

“알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손오공이 귀를 후벼파며 그들을 비웃었다.

“신선계와 요마계는 아린이가 접수한 것인가? 큭큭.”

그렇게 강자아와 백학의 안내에 현계의 사람들이 좌우에 배치된 열두 자리에 착석한 후.

“자, 이제 대화를 해볼까 하는데, 현계인들이여 괜찮겠는가?”

천존의 말에 무거운 긴장감이 흘러들었다. 현계인들은 저마다 어두운 표정으로 천존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콰쾅!!!!

거대한 문밖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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