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episode(17) 상생의 이유#6
차정우와 이지은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는 소풍이라도 나온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차정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검을 꺼내 들었다.
문답무용(問答無益)
차정우의 입장에서 강하냐는 물음은 곧, 누가 더 강한지로 판가름 난다.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고 강하지 않으면 무시당했기 때문. 차정우가 말했다.
“시비를 건다면 받아주겠다.”
“호오…. 강한 놈 맞구만?”
사내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턱을 긁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내는 전혀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자신의 병장기를 꺼내 들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차정우는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조금씩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기운이 차정우의 전신에서 용솟음치자, 사내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쯤 하자고. 지금 싸우면 스승께 혼나는 건 나니까.”
“무슨 말이지?”
“지금 이곳은 신선들과 천인 그리고 요괴들의 삼파전이 진행 중이야. 최후의 기록자들이 되기 위한 시험이지.”
“……?”
“이 시점에 들어온 네놈은 모르겠지만, 우리 신선들에겐 아주 반가운 상황이지.”
차정우는 도무지 사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자신도 모르게 이지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모르는 건 이지은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시비를 걸려던 건 아니었어. 미안하다. 하하하. 내가 강한 놈만 보면 싸우고 싶어 근질근질하거든.”
“핵심만 간단히 말해라. 네놈들이 우리를 기다렸다고 말한 것인가?”
“그렇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간의 힘이 꼭 필요해. 그것이 천존께서 바라본 미래니까.”
“그걸 나에게 말하는 이유는 뭐지? 내가 신선이 아닌, 요괴나 천인들의 편에 설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럼….”
사내의 기운이 일순간 변하기 시작했다. 차정우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지 않은 그런 기운. 그렇다. 이곳은 성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존재들이 개미 떼처럼 많은 장소였다.
심지어 이 사내도 차정우보다 약하지는 않을 터.
사내는 발산하던 기운을 멈추고 차정우를 향해 말했다.
“안타깝지만, 죽일 뿐이다.”
사내의 기세에 이지은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청난 기운에 겁을 먹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의 관점에서 사내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사내는 다시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 시점에 현계의 인간들이 들어올 것이라는 건 천인과 요괴를 포함해 우리 모두 알고 있었어. 근데…. 누가 힘을 쓴 것인지, 모두 흩어져 버렸다는 거지.”
“모일 장소쯤은 알고 있다. 그들은 알아서 모일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차정우의 말에 사내는 한숨을 깊게 내쉬기 시작했다.
“거참, 앞으로 돌격!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놈인가…?”
차정우가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현계의 인간들이 이곳에 방문했다는 건,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런데…. 신선을 포함한 천인과 요괴들의 강함을 모르는 거냐?”
“그들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하, 잘 생각해봐라. 네놈에게 내가 접근했듯, 다른 현계의 인간에게도 다른 요괴나 천인 그리고 신선들이 접근했을 거다.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순간적으로 차정우의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이 안이 신신당부했던 그 말.
「“절대로 그곳의 주민들과는 전투를 벌여선 안 돼. 모두가 흩어졌다면 반드시 모인 후, 다음을 기약해. 알겠지?”」
별일이야 있을까 싶어 무시했던 말이었다. 차정우는 이 안은 무언가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간 것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놈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미룬 것 같은 느낌….
“일단…. 이동하지. 삼파전이라고는 해도 우리를 적대하는 건 천인들 뿐이니까.”
“그건 무슨 말이지?”
“요괴들의 왕은 우리와 동맹을 맺었다. 이곳에 올 현계인의 사형이라나.”
“……”
“이동하자고.”
사내는 엄청난 소리로 휘파람을 불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보는 동물들이 사내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걸 타라. 현계인들이 모이기로 했던 장소는 필히 저 봉우리겠지.”
차정우는 어떻게 알았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애써 질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안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더니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이 안 덕분에 의문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놈.”
“정우야, 가보자. 우리 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그건 그렇지.”
이지은의 말에 쉽게 이해한 차정우는 사내가 소환한 동물에 올라탔다.
“그럼, 빠르니까 조심들 하라고.”
사내의 말과 함께 출발한 동물은 엄청난 속도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이동했다.
* * *
동승신주(東勝身洲) 화과산(花果山)
다이아나와 임해든은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일행들과 떨어진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심지어 친하지도 않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거대한 쇠기둥에 묶여있었다.
“그냥, 이걸 부숴 버리는 건 어때?”
“글세…. 안이 씨는 그걸 바라지 않을 텐데요?”
“아이이!!! 그래도!!”
다이아나는 내내 여유로운 표정의 임해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안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은 좋았지만, 처음 보는 생물들에게 잡혀 쇠기둥에 묶인 신세라니. 이세계의 최후룡인 그녀는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만 같았다.
임해든은 그런 그녀를 달래며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이 씨의 친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지….”
“친구가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건, 정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후….”
임해든이 어르고 달래는 동안 요괴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현계의 인간을 잡아 저들끼리 잔치라도 벌이는 듯….
“그래서, 반쪽짜리 룡인 네 말은 가만히 저놈들에게 먹히자 이거냐?”
“아닙니다.”
“그럼 뭔데!”
“상황을 지켜보자는 거죠.”
“아니, 그러니까 왜!”
“저흴 먹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안이 씨의 말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아니, 기억은 나지.”
실제로 이 안은 이곳에 일행들을 보내면서 모두에게 말했었다.
「“만약, 요괴들의 진영에 떨어진다면 ‘손오공’의 이름을 파십시오. 설령 손오공이 여러분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제 이름 또는 ‘당나라의 고승’이라는 성좌를 파십시오. 그것만이 살길이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안의 말이었지만….
다이아나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현 상황에서 누구의 이름도 팔 수 없거니 손오공이니, 나발이니, 눈에 보이는 생물체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해결책이 있을 겁니다.”
“너…. 그 말대로 안 되면 그다음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알겠어?”
임해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아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당장 브레스를 갈겨도 모자랄 상황이었기에 분노를 참아내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엄청난 기운이 임해든과 다이아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스아아아아.
“뭐, 뭐야 이건…!!”
“아무래도 저들의 우두머리가 아닐까요…?”
숨이 턱 막힐듯한 기운이 다이아나와 임해든을 옥죄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이.
임해든과 다이아나가 묶인 쇠기둥에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바쁜 생물체들은 자신들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공중에서 구름이 모여들더니, 기운은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했다.
“오, 온다.”
“긴장하시죠.”
“닥쳐. 이미 하고 있어.”
쾅!!
엄청난 벼락과 함께 지상에 당도한 무언가는 희뿌연 연기를 가르며 나타났다. 황금빛 털을 가지고 갑주를 입은 사내. 아니, 사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저건, 그러니까 원숭이였다.
“비켜라, 이놈들! 이 몸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황금빛 봉을 휘두르며 요괴들을 뻥뻥 차대는 원숭이의 등장에 요괴들이 기겁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 저 원숭이 말을 하네요…?”
임해든이 어이없다는 듯, 다이아나를 향해 말했다. 이안처럼 모두가 손오공의 존재를 아는 것은 아니라는 듯….
다이아나는 그런 임해든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말했다.
“저거…. 말하는 원숭이인가 봐. 조심해. 원래 지능이 있는 동물은 위험한 거니까.”
“당연한 소릴 되게 심각하게….”
“닥쳐.”
아무튼. 황금빛 털을 가진 원숭이는 근방에 존재하는 모든 요괴를 저 멀리 날려버리며 다가왔다. 너무나도 강한 기운 탓이었을까. 다이아나와 임해든은 묶인 채로 사형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저흴 죽일까요?”
“몰라 이 새끼야.”
“지금이라도 브레스를….”
“넌 감이 없는 거냐? 저 괴물 원숭이한테는 브레스건 뭐건 아무것도 안 통해. 알잖아?”
“그럼 저흰 죽어야 할까요…?”
다이아나는 화가 났다. 임해든이 내뱉는 말마다 삶을 포기하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내뱉다니. 당장 도망가도 희망이 없을 텐데, 느긋하게 농담이나 던지는 모습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농담은 맞은 걸까? 삶을 포기한 걸까? 다이아나는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야.”
다이아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곤, 임해든을 향해 말했다.
“내가 브레스를 쏠 테니까, 그사이에 도망쳐.”
“당신은요?”
“몰라, 죽든지 말든지. 날개도 잘린 마당에 더 살아봐야 뭐해? 반푼이 네 날개 줄 거야?”
“제 날개는 탈부착이 아닙니다만.”
“개자식.”
엄청난 존재가 다가옴에도 두 사람은 쓸데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긴장감을 떨쳐냈다. 하지만, 황금빛 털을 가진 존재가 눈앞까지 다가오자, 두 사람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 그….”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다이아나였지만, 그가 내뱉는 단어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공포만이 가득했을 뿐.
황금빛 털을 가진 원숭이는 다이아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룡이구나? 내 사제 중에 백룡이라는 놈이 있는데…. 그놈과 같은 재질인가?”
“재, 재질이라니요. 무슨….”
다이아나는 겨우겨우 말을 내가 뱉으면서도 원숭이에게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당장, 브레스를 쏘아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래봐야 죽음만이 자신을 반길 것이 분명했으니….
다이아나는 이제야 애써 침착하게 원숭이에게 말했다.
“저, 저희를 죽일 건가요?”
단순한 물음이었지만, 다이아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이었다.
“응? 그게 뭔 헛소리야. 난 네놈들 데리러 온 건데?”
황금빛 털을 가진 원숭이는 귀를 후비며 답했다. 그 모습에 임해든은 무언가 깨달은 듯, 원숭이를 향해 말했다.
“혹, 안이 씨의 사형이 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