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episode(16) 죽은 자들#9
촌스러운 추리닝을 입고선 중후함을 풍기는 사내.
유금필은 처음부터 길게 끌 생각이 없다는 듯, 자신의 기운을 방출했다.
김영광과 김도은도 긴장감 흐르는 표정으로 자신들의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마우이의 나무 방망이와 아르테미스의 달의 장궁.
두 사람도 느끼고 있었다. 일 전에 봤던 마초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강함이라고.
김영광이 말했다.
“도은 씨, 죽어도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제 뒤에 계십시오.”
“헛소리 말고 집중이나 해요. 벌써 죽을 생각부터 하는 거예요!? 제 몸은 제가 지킬 테니, 죽지 말아요.”
김도은의 일갈에 김영광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유금필은 자신 앞에서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남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인자한 미소를 풍기고 있었다. 모든 기운을 방출시켜 마초와 같이 갑옷을 전신을 뒤덮었다. 유금필이 말했다.
“자네들은 알고 있는가?”
뜬금없는 유금필의 물음에 앞장서 있던 김영광이 답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죽은 자들은 각자의 목표가 있어 항우를 따를 뿐, 진심으로 그를 모시는 자는 없다네.”
“그걸 왜….”
잠자고 듣던 김도은과 김영광의 표정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자네들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네. 날 이기면 좋은 정보를 주도록 하지.”
“그 약속. 지키셔야 할 겁니다.”
유금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설은 그만하고 시작해보세.”
김도은과 김영광은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결국은 싸워야 할 상대임에는 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투의 개시는 유금필이었다.
까강!!!!
유금필의 검과 김영광의 방망이가 거세기 부딪혔다. 두 사람 주변의 흙먼지가 파도처럼 밀려 나갔다. 방어에 특화된 김영광이 방망이를 사용해 유금필의 검을 막아냈고 저 멀리 떨어진 김도은의 화살이 유금필의 급소를 향해 날려져 왔다.
후웅-!!
두 사람을 상대하는 페널티를 안고 있음에도 유금필은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김영광은 묵묵하게 전투에 임할 뿐이었다.
김도은과 김영광의 맹공에도 치명상은커녕, 여유를 보이는 유금필이었다.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김영광의 방어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단한 근육엔 자상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김도은은 그런 김영광의 모습에 불안함이 맴돌기 시작했다.
김도은이 혼잣말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대로는 안 돼…!! 빨리 끝내고 다른 분들을 도와줘야 하는데….”
자신의 강함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김영광의 강함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유금필이라는 고대의 무장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일까 싶었다.
그 순간.
까강!!!!
유금필의 검이 김영광의 방망이를 강하게 내리치자,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자, 김영광이 인상을 찌푸리며 거리를 벌렸다. 숨을 헐떡이는 김영광.
그런 김영광의 모습에 유금필이 말했다.
“대단하군. 시스템의 도움이 있다곤 해도 몇백, 몇천 년을 수행한 죽은 자들의 강함에 다다르다니.”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고작 멸망이 시작되고 시스템을 이용한 성장이 있을지라도 불과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 강함을 따라잡다니.
유금필은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보아하니, 자네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편에 속하는 것 같네만. 맞는가?”
유금필의 물음에 김영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예의 있게 답했다.
“글쎄요. 이 세계에 강한 분들은 많습니다만….”
김영광의 대답에 유금필이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겸손함은 넣어두게. 강함의 척도는 구분할 정도는 되니까 말일세.”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업니까?”
“자네들을 도와주고 싶네. 물론, 조건은 있네.”
유금필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는 김영광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곤 곧바로 다가온 김도은이 대신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봐요, 조상님. 잘 싸우다 갑자기 도와준다는 건 무슨 말이죠?”
김도은이 사나운 표정으로 물었다.
“말 그대로일세. 자네들이라면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니까 말을 제대ㄹ…”
“조용.”
그때였다.
유금필이 말을 잘라내자, 동시에 다른 전장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풍겨왔다.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기운임은 물론이고 느껴지는 기운으로 봤을 땐, 다이아나와 권지훈이 향한 방향이었다.
유금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김도은과 김영광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에게 나쁜 제안은 아닐걸세. 내 조건은 한 사람과 싸울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난 최후의 1인 같은 건 관심이 없다네.”
“그 사람이 누구죠?”
“아아, 사람은 아니지. 이미 성좌에 오른 인물이니. 어떤가? 들어주겠는가?”
“그게 저희 마음대로….”
“될걸세. 자네들에겐 이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힘이 있으니까 말이야.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선택했으면 좋겠군.”
시간이 없다는 유금필의 말에 감지를 펼쳐낸 김도은이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이아나와 권지훈이 위험했다.
김도은이 급하게 말했다.
“조건은 그거 하난가요?”
“물론이네. 그자와 만나게 해준다면 다른 목적은 없다네.”
“좋아요.”
유금필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겠지. 난 지금부터 그 사내와 만날 때까지 자네들 편이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조상님이고 뭐건, 죽여버릴 테니 그리 아세요.”
김도은의 가시가 돋친 발언에도 유금필은 호쾌하게 웃을 뿐,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웃음을 멈춘 유금필이 말했다.
“난 저쪽으로 가볼까 하는데 괜찮겠는가?”
유금필이 말한 방향은 ‘내부지구’의 이 종족 대표들이 향한 방향이었다. 그들의 상대가 용사였던가.
김도은이 답했다.
“저흰 이쪽이요. 이길 수 있겠어요?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김도은이 느낀 기운은 제대로였다. 권지훈과 다이아나가 상대하는 마왕이라는 존재보다 더욱 강한 기운이었다.
“글쎄, 그놈은 조금 힘들겠지만, 자네들이 해결하고 나를 도와주면 되지 않겠나?”
유금필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죽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으니, 잠깐은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뒤에 보자는 말과 함께 유금필이 자리에서 금세 사라졌다. 김영광이 김도은을 향해 물었다.
“괜찮을까요…?”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어요. 당장 위험한 분들부터 구해야 하니까요. 조건을 무시하고 싸워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잖아요.”
씁쓸하게 흘러나오는 김도은의 말이 무언가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김영광은 김도은을 오랫동안 봐서 그런지, 그녀가 자존심이 상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이 안처럼 싸우고 이겨서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금필을 비롯해 죽은 자들과의 전투는 그 누구와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김도은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니까.
고개를 푹 숙인 김도은을 향해 김영광이 말했다.
“당신은 강합니다. 너무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떤 말로 위로를 해줘야 할지, 김영광의 시선이 이리저리 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김도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풉. 애써 위로 안 해줘도 괜찮아요. 앞으로 강해지면 되잖아요! 누구보다 강하게!”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하하.”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김도은이 웃으며 말했다.
“늦은 사람 100만 시드.”
잽싸게 몸을 날린 김도은의 뒷모습에 김영광이 당황하며 외쳤다.
“으악! 도, 도은 씨 반칙입니다!!!”
두 사람이 권지훈과 다이아나에게 몸을 이동하자,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김도은이 말했다.
“죽을 수도….”
“어떻게든 해보죠.”
겁에 질린 채, 몸을 벌벌 떨고 있는 다이아나와 권지훈.
두 사람의 앞엔 엄청난 숫자의 괴생명체와 자연재해는 약해 보일 정도의 소용돌이가 지상과 땅을 휩쓸고 있었다.
김도은과 김영광이 앞으로 나서 말했다.
“벌써 포기하면 안이 씨한테 혼날 겁니다.”
“활 사용법을 알려드려야 하나?”
활과 몽둥이를 든 두 사람이 다이아나와 권지훈의 앞에 섰다.
“저 소용돌이는 제가 막아보죠.”
“그럼 꼬리 달린 괴물들은 내가.”
온몸을 벌벌 떨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다이아나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최후룡이나 되어서 포기라니. 김도은과 김영광에게 괜스레 자존심이 상하는 다이아나였다.
“빌어먹을…. 내가 죽일 거야. 저 빌어먹을 마왕 새끼.”
소용돌이와 악마들에게 달려드는 김도은과 김영광.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다이아나가 말했다.
“야, 정신 차려. 언제까지 대장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건데?”
“아….”
“그대로 죽던지.”
다이아나가 두 손에 마력을 담아 김도은과 김영광을 서포트하자, 권지훈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대장은 가능할까…?”
공포감에 휩싸여 판단이 흐려진 권지훈이었다. 하지만.
“난 병신이 아니라고…!!!”
퍽!!!
주먹에 힘을 실어 자신의 볼을 후려쳤다. 어찌나 강하게 쳤는지 입가에 핏줄기가 조금 흘러내렸다.
권지훈은 전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내가 간다!! X발!!!!!!”
* * *
유금필은 용사와 내부지구에 속한 이 종족의 대표들과 또 다른 세계의 용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장소였다. 전투는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어 있었다.
차정우와 같은 용사라는 칭호를 가졌지만, 끝내는 지옥으로 떨어진 자.
유금필의 등장에 용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이, 늙은이. 당신이 여길 왜 왔지? 설마 날 도와주러 온 건가?”
용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다소 건방진 모습에도 유금필은 인자하게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마초, 사묘아리 그놈들과도 붙어보았는데, 자네와는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지.”
“하, 지금 나랑 해보겠다고?”
용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차기 시작했다.
“노망이 들었을까? 아니면 미친 걸까?”
“긴말이 필요 없을 듯하네만.”
유금필의 전신에서 파도 같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김도은, 김영광과의 전투에선 보이지 않은 힘. 곧바로 이 힘을 사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지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유금필의 전력에 용사는 당황했다. 하지만.
푸욱-!!!
용사는 자신 발밑에 뉘어진 반인반수의 심장에 칼을 질러 넣었다.
“뭐, 이놈들은 다 죽어버렸으니, 잠시 놀아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미 이 종족을 몰살시킨 용사는 다시금 비릿한 미소를 지어냈다.
그의 주변에 엘프, 드라고뉴트, 오크 등 수 많은 이 종족의 대표들이 목숨을 거둔 후였다.
그 모습에 유금필이 인상을 찌푸렸다. 유금필이 말했다.
“자네는 여전히 살육을 즐기는군…. 지옥에서 그 많은 세월을 보냈음에도.”
지금껏 표정 한 번 구긴 적 없는 유금필의 표정에서 살기가 풍겨왔다.
용사는 한쪽 귀를 후비며 말했다.
“노인네가 죽을 때가 됐나? 아! 곧 나한테 죽을 거긴 하지. 크크큭.”
유금필은 그런 용사의 모습에 한숨을 쉬곤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자넨 교육이 필요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