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episode(16) 죽은 자들#7
지금의 나는 차정우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 항우는 우리 둘을 넘나드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세계의 멸망은 정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령화의 시간을 체크했다. 54초.
1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항우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기지 않았다. 차정우는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볼 뿐,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항우의 기운이 전장을 집어삼킬 만큼 커지자, 차정우는 나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라. 기회는 단 한 번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파앗!
엄청난 속도로 항우에게 달려드는 차정우의 뒷모습만 봤을 뿐이었다. 스킬, 냉정으로 감정을 추스른 나는 오른손에 용광검과 왼손엔 정령화로 인한 마력의 팔. 양손에 쥐어진 검에 성흔, 홍염을 가득 실어냈다.
스아아아.
내가 낼 수 있는 최상의 힘이자, 최대의 전력이었다.
차정우는 침착했다.
항우의 창이 자기 목을 겨누고 들어오면 미세한 차이로 목을 돌려 피했고 전력의 차이가 있음에도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새하얀 갑옷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조금씩 열세에 몰리는 건 차정우였다.
차정우가 말하는 틈을 찾다간 정령화가 끝난다. 이대로는…!!
몸을 움직이려는 그 순간.
번쩍!
차정우의 성검이 빛으로 휘감기더니, 항우를 향해 찌르기를 시전했다. 이전에는 보지 못한 공격에 몸을 멈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차정우가 성검을 단 한 번 찔러냈음에도 그것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항우를 향해 쏟아졌다.
파파파파팟!!!
화안 금정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공격의 횟수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무자비한 찌르기에 항우가 점점 밀려나자, 차정우는 일 전에 보였던 스킬, 용사의 일격을 사용했다.
서걱.
항우의 갑옷이 반으로 갈라져 그의 추리닝이 드러나는 순간. 차정우는 외쳤다.
“지금이다!!”
차정우의 목소리에 반응하자, 생각을 하고 말 것도 없었다.
찰나의 시간. 나는 항우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정령화의 남은 시간은 30초.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항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격은 점점 빨라졌고 온갖 스킬들을 사용했다. 파천신군의 무공부터 무쌍 난무를. 간간이 항우는 자신의 창을 나에게 휘둘렀지만, 그마저도 태극검을 사용해 궤도를 바꾸어냈다. 그리고.
나는 필사의 의지로 외쳤다.
“죽어어어어!!!!”
[스킬 [파천 만뢰공 LV MAX]을 발동합니다.]
홍염의 쌍검이 항우의 전신을 정신없이 갈라냈고 하늘에서 만개의 벼락이 항우의 머리로 쏟아졌다.
쿠콰콰콰쾅!!!!
서걱, 서걱!!
숨을 헐떡이면서도 차정우가 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정령화의 종료까지 3초.
맹렬하게 쏟아지는 나의 공격에 항우조차 움직임을 멈출 뿐이었다. 마지막 1초. 나는 항우를 향해 마력의 검을 질러 넣었다.
푸욱.
[스킬, 정령화의 제한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정령화가 풀리면서 나의 왼팔은 처음과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헉… 헉….”
차정우와 나는 파천 만뢰공의 여파로 일어난 희뿌연 연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둘 중 누구 하나 끝났나? 이겼나? 와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나와 차정우의 전력이 먹혀들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이안과 차정우가 죽은 자들의 대장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낸 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다이아나와 권지훈이었다.
그의 뒤로 이세계의 이종족들이 자리 잡았다. 하이엘프를 비롯해 드라고뉴트, 오크 대장군 등 엄청난 실력자가 두 사람의 뒤를 받쳐주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넋을 놓고 보던 ‘외부지구’의 사람들도 의욕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무림계의 대표 백남광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저들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신감을 가지세요.”
진예화가 없음에도 백남광은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시스템을 잃은 그녀를 지키겠다는 듯.
백남광의 말에 ‘외부지구’와 무림계의 모든 이가 소리치기 시작했고 어느새 친해진 ‘내부지구’의 이종족들이 소리에 반응해 외쳤다.
[우와아아아아아!!!!!]
당연하게도 수적인 우위는 외부, 내부 그리고 무림계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죽은 자들은 겁먹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전설과 같은 고대의 무장, 무림계를 평정한 지존, 이세계의 용사, 용사의 힘을 흡수한 마왕 등 말도 안 되는 괴물들 뿐이었다.
다대일의 전투는 오히려 그들의 특기나 다름없었다.
사묘아리가 앞으로 걸어 나와 말했다.
“대단하군. 이 정도까지 성장시키다니. 우리도 실패한 것을.”
사묘아이의 혼잣말에 백남광이 물었다.
“당신들의 부대는 결코 이 정도의 숫자가 아니라고 들었다. 어째서 열 두 명 뿐인 거지?”
누구나 궁금해할 질문이었다. 심지어 이 안조차도.
사묘아리가 답했다.
“대장은 걸리적거리는 걸 싫어해서 말이야. 처음에는 그들의 성장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
“그런데?”
“점점 싫증이 난다고 하더군. 겨우겨우 성장시키면 저들끼리 싸우느라 소멸에 빠져들었지. 대장은 생각했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고.”
“……”
백남광의 말이 없자, 사묘아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결국 남게 되는 건 한 사람뿐. 그래서 결정했지. 그렇다면 목적이 뚜렷한 이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만들자고.”
“그게 당신들인가?”
“그렇다. 우리는 ‘무신 집단’ 죽은 자들의 정점에선 열두 명만이 전부인 무신들이다.”
백남광이 자신의 기보, 백화도를 꺼내 들어 사묘아리를 겨누었다.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 이 안 그놈이라면 어떻게든 이겨내겠지.”
“대단한 자신감이군. 하나 더 말해주도록 하지.”
“뭐지?”
“우리는 하나이자 여럿. 즉, 대장이 죽어도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건 당연한….”
그때였다. 저 멀리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땅의 진동이 거세졌다. 이안과 차정우 그리고 항우가 전투를 시작했다는 것.
백남광은 뒤로 물러서 김도은과 김영광에게 말했다.
“저놈은 강합니다. 저희 무림계가 맡을 테니, 다른 무신들을 상대하시죠.”
“괜찮겠습니까? 수적으로 우위로 밀어 붙이시는 게….”
김영광의 대답에 백남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들은 한명 한명이 집단과 같은 힘을 지닌 자들일 겁니다. 오히려 이런 전투에 능하겠지요.”
김영광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도은이 자신의 활을 꺼내 들었다.
“잘 부탁해요. 꼭 이기시길.”
“우리 예화 보러 가려면 빨리 끝내야겠네요.”
“후훗. 좋은 생각이네요.”
김도은과 백남광이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은 뒤, 몸을 이동한 백남광은 허공에서 사묘아리를 향해 말했다.
“네놈. 따라오거라.”
“호오, 그대가 날 상대하는 것인가?”
“비겁하지만, 그댈 상대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다.”
백남광의 뒤로 기보의 주인들이 섰고 사파의 지존, 천마까지 합세한 상태였다. 진예화의 부재로 그녀의 검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없었지만, 지금의 전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백남광이었다.
기보의 주인이 넷. 사파의 지존, 천마. 다섯이 사묘아리와 자리를 이동하려 하는 순간. 이민영을 비롯해 버프가 가능한 이들이 전장의 모든 이들에게 버프를 사용했다.
파앗!
버프의 효과로 전장이 환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백남광 일행이 사묘아리를 이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김영광과 김도은은 자신들이 누굴 상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무신 집단에 속한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저희가 상대해드리죠.”
사내는 무척이나 그립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사내가 말했다.
“그대들이 내 상대라면 나 또한 기쁘게 받아들이지.”
김영광과 김도은이 한 사람을 데리고 이동했으며, 마초와 마초의 부하 두 사람은 우범혁과 외부지구의 생존자들이 맡았다.
다음으로 다이아나와 권지훈이 이세계의 마왕을 콕 집어 자리를 벗어났으며, 이 종족의 대표들이 또 다른 용사와 마주 섰다.
각자가 상대할 적은 찾아 나섰고 남은 ‘무신 집단’은 다섯. 하위권에 속했지만 우리는 방심하지 않았다. 무림계의 천하오절과 세외 사천왕 그리고 이세계의 환생자들이 남은 다섯을 상대했다.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던 진선미와 임해든이 남은 다섯을 상대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렇게 각자의 싸움이 벌어지는 중. 가장 먼저 전투가 시작된 곳은 다이아나와 권지훈이었다.
권지훈이 말했다.
“빌어먹을 마왕 새끼들. 여기나 저기나 널브러져 있어서 누구 한 놈은 죽이고 싶었건만.”
마왕은 하찮은 벌레를 보듯, 권지훈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마왕이 말했다.
“그래, 그대는 다른 세계에서 마왕을 죽였는가?”
“그것이 중요하나?”
“크크큭. 중요하지 않지. 궁금했을 뿐이다. 다른 세계의 마왕이란 자는 얼마나 강한 자인지.”
마왕이 비릿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생김새는 인간과 다르지 않았지만, 얼굴의 외형이 일그러져 흡사 녹아내린 듯한 외형이었다.
“나의 이름이 궁금한가?”
뜬금없는 마왕의 질문에 답한 것은 다이아나였다.
“아니? 닥치고 죽어.”
푸화악!!
다이아나의 입에서 엄청난 크기로 브레스가 쏟아졌다.
마왕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죽을 위협은 전혀 없다는 듯, 오른손에 쥔 조그마한 지팡이를 내리그었다.
파앙-!
다이아나는 당혹감에 휩싸여 말했다.
“야, 꼬봉. 위험하겠다.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이아나의 말에 덩달아 당황하는 권지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내부지구’에서 가장 강한 자를 뽑으라면 차정우가 당연했고 그다음은 최후룡, 다이아나가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데 다이아나의 브레스를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파훼했다?
눈앞의 마왕은 당연하게도 엄청난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권지훈의 두 팔에서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기 시작했다.
“네 말 대로라면…. 저놈은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강자라는 거냐?”
“아니, 그건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전력을 다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한껏 진지해진 다이아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 모습에 권지훈은 단순하게 흘러넘기지 못하는 중이었다. 차정우가 없었다면 ‘내부지구’ 최강자가 이토록 겁에 질린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권지훈이 다이아나에게 물었다.
“그래도 승산은 있겠지?”
“글쎄.”
다이아나는 말을 아꼈다. 항상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대장과 자신을 놀리기 바쁜 다이아나. 그런 이가 강적과 마주 서자, 장난기는 저 멀리 날아가고 난 뒤였다.
다이아나는 이 전에는 없던 장난기를 모두 저버리곤 권지훈에게 말했다.
“어이, 권지훈 죽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다이아나의 말에 권지훈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단 한 번도 자신을 이름 그대로 부른 적은 없었기에. 이 상황은 위기나 다름없었다.
권지훈은 생각했다.
조금 더 많은 병력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같은…. 하지만, 다이아나가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소용없었을 거야. 저놈은 강해. 우리가 죽거나 저놈이 죽거나.”
권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아나는 마왕을 향해 물었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지? 곧 죽을 놈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은데.”
마왕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이름은 보르트몰트. 네놈들이 생각하는 마왕이 아니니라. 나에게 보여봐라, 네놈들의 강함을. 그리고 느껴보아라. 진정한 마왕의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