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episode(16) 죽은 자들#2
단순하게 보면 그냥 싸우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번 미션의 핵심은 한 가지였다. 모든 세계의 정점에 서는 것. 즉, 하나의 세계가 남을 때까지 싸우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때문인지 미션창이 뜬 이후로는 구겨진 인상이 펴지질 않았다. ‘내부지구’의 용사, 차정우와 기껏 좋은 관계를 만들었더니, 생사를 건 전투를 하라니. 언제나 그랬듯 미션은 우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젠장….
김도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왔다.
“안이 씨, 이번 미션….”
“생각하시는 그대롭니다. 누군가의 세계는 멸망해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세계의 문이 열린 시점에 ‘내부지구’와 ‘죽은 자들’을 상대로 살아남아라. 아니, 그들을 몰살하라는 것이 이번 미션의 핵심인 걸까요?”
“네. 영광 씨의 말이 맞습니다.”
김영광이 핵심만 간단히 말하자,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유야 뻔하지 않을까. 다섯 번째 미션만해도 ‘룡’들과의 전투에서 절반에 가까운 사람을 잃었거늘, 이번엔 두 세계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니. 절망에 끝에서 또다시 절망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는 듯.
패닉이 와도 진즉에 왔을 사람들이었지만, 개중에는 기합을 내뱉으며, “올 테면 와봐라.” 같은 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을 시작으로 기세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렸던 사람들의 눈은 어느새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당장 두 세계와 살육전을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내부세계’는 저희와 동맹관계. 즉, 당장 신경 쓸 것은 ‘죽은 자들’이죠.”
그나마 다행이라는 사람들의 안심에 진선미가 끼어들었다.
“죽은 자들이라…. 성좌들과는 다른가요?”
“네. 다릅니다. 그들은 지옥에서 수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결국, 변방으로 쫓겨난 자들이죠. 그리고…. 다들 들어 보셨을 겁니다. 나라마다 지옥의 명칭이 다르다는 것을.”
“전 들어봤습니다. 니플헤임, 헬게이트, 타르타로스 등…. 신화별로 지옥의 이름은 달랐죠.”
“네, 그렇게 많은 지옥을 거쳐 변방으로 내쫓긴 자들. 그들이 바로 죽은 자들입니다.”
김영광의 동공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적을 마주 선다는 것은 이토록 공포에 잠긴다는 것. 본인 스스로가 이겨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김영광이 말을 이었다.
“그럼, 수많은 지옥의 군세와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하나이자 여럿인 그 지옥의 군세와….”
“아니요. 저희가 싸울 것은 변방으로 내쫓긴 자들입니다. 그 외…. 지옥의 수많은 이름은 참가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벌을 내리는 존재. 성좌들과 별다르지 않은 존재들이니까요.”
“아….”
무언가 알 것 같다는 듯, 김영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선미가 말했다.
“정리하자면, 수많은 지옥이 있고 그 지옥에서 벌을 내리는 자들은 성좌와 같은 위치에 있고 각 지옥을 돌며, 모든 벌을 받고 ‘환생’을 이루지 못한 자들은 ‘죽은 자들’로 변방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할 것은 변방으로 쫓겨난 ‘죽은 자들’이다. 이 말이 맞을까요?”
“네. 정확합니다.”
정확하게 정리한 진선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김도은이 궁금한 게 있다는 듯, 오른손을 번쩍 들어 말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해 보세요.”
“그렇다는 건 지옥의 성좌들은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소리인데, 변방의 ‘죽은 자들’이 그렇게 강한가요?”
김도은의 말에 잠시 고민한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네, 강합니다. 성좌들에 비하면 턱없이 약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 한명 한명이 역사 속의 투신과 다름없습니다.”
“……”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김도은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중이었다. 나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그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항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항우…. 그 ‘초한지’의 영웅 아닌가요?”
“네. 죽은 자 중 한 사람이죠.”
항우.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 라는 말이 돌 정도의 무력으로 하나의 세계에서 무의 정점을 찍은 자. 비록 ‘유방’에게 지긴 했지만, 그의 무력은 개인의 힘으로 만 명의 적을 상대한다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항우뿐만이 아닌, 멸망한 무림계의 ‘지존’ 혹은 귀환하지 못한 이세계의 ‘용사’등 수 많은 강적이 존재했다. 그들 모두 수 많은 생명체를 죽음으로 몰아붙인 죄업을 가진 자들이었다.
김영광을 비롯해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자, 팔짱을 끼고 듣기만 하던 광주를 지배한 협객, 우범혁이 앞으로 나섰다.
팡팡!
자기 가슴을 치며 호기롭게 나선 우범혁은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룡들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최정예 아니오! 다들 자신감을 가지라고! 과거의 망령들에 쫄 필요가 없다 이거야!!”
멸망 이전에 하나의 조직을 이끈 리더쉽이 지금 발휘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우범혁의 말을 들었다. 이 순간 필요한 건 무력이 아닌, 사람들을 한 대 모을 수 있는 강한 리더쉽이었으니.
한참을 연설하던 우범혁의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는 그 순간이었다.
콰쾅!!!!
모여든 사람들의 끝에서 갑작스레 폭음이 들려왔다.
설마, 벌써…?
당혹스러움에 몸을 움직이자, 저 멀리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 사람이 사람들을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움직여 그 사람의 공격을 쳐내며 말했다.
“혼자야?”
나의 말에 귀를 후비던 사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인가? 아니면, 혼자로도 충분하다는 건가?”
나의 말을 들은 사내는 긴 창을 목 부분을 어깨에 툭툭 치고 있었다. 다소 젊은 모습에 은빛의 창,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내. 외모 또한 출중한 것이 잘생긴 영화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사내는 자기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곤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마. 다른 이는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야. 내가 온 이유는 그대들의 강함을 확인하기 위해서니까.”
강함이라. ‘명’에서도 봤지만, 이들은 역시….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언가를 느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네놈이 이곳의 리더인가?”
“뭐, 당신이 생각하는 강한 자를 찾는 거라면 맞을 겁니다.”
“호오. 제 입으로 그런 소릴 하다니. 재밌군.”
사내는 나를 향해 긴 창을 뻗어내곤 방긋. 웃었다.
한 판 붙자는 소리.
나 역시 바라던 바였다. 이자의 정체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현시점에 혼자서 이곳에 온 것은 자신 또한 그만한 강자라는 것.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지 않을 자신감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나는 용광검을 빼 들어 허공에 내리그었다.
후웅-!
“오…. 좋아 보이는 칼인데? 내 창이 더 좋겠지만 말이야.”
사내의 표정이 진지해지는가 싶더니, 그의 전신에서 금빛의 기류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임해든이 기운을 방출할 때와 비슷했지만, 다르다. 저것은 변방으로 쫓겨난 죽은 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사내가 말했다.
“네놈의 이름은?”
“그게 중요합니까? 당신은 제 사람들을 다치게 했는데?”
“아하하하. 그렇군. 미안하게 되었다. 강한 자를 불러들이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들은 모두 살아있다.”
“……”
사내의 말에 생각했다. 이들은 나의 ‘명’에서 보았듯, 강함만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죽은 자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말하는 투로 보아하니 확실했다. 이 사내 또한 자신의 강함을 추구하는 자. 다른 세계의 강자가 얼마나 자신을 즐겁게 해줄지 기대감을 가지고 온 것이 분명했다.
잠시 생각에 빠진 내게 사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가? 사내라면 싸우면서 성장하는 것이지.”
“그 무슨, 개 같은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십니까?”
“으하하하. 말을 재밌게 하는 청년이로군.”
사내는 호탕하게 웃은 뒤, 자세를 취했다.
“내 이름은 마초! 자는 맹기로 자네에게 일기토를 신청하네!!”
“마초…?”
이름을 듣자, 잠시간의 의문이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더니, 의문에 확신이 섰다.
마초(馬超) 자는 맹기(孟起).
촉한의 대장군 중 한 사람으로 관우, 장비, 조운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삼국지의 절대적 강자. 쉰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의 기록에선 이렇게 말한다.
西川馬孟起(서천마맹기) 서천의 마맹기는
名譽震關中(명예진관중) 명성이 관중에 떨치었는데
信布齊誇勇(신포제과용) 한신, 영포와 같이 자랑할 만큼 용맹하고
關張可竝雄(관장가병웅) 관우, 장비와 나란히 할 수 있는 영웅이네.
하나의 시대에서 이름을 떨친 창술의 대가라고.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서량의 금마초.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곤, 마초를 향해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촉한의 대장군이었다죠?”
마초는 아주 잠시, 숙연해지더니 한껏 진지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전생의 기억은 묻어둔 지 오래다. 난 이름만 기억하는 과거의 망령일 뿐이지.”
망령이라.
어쩐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수천 년의 시간을 지옥에서 보내고 더 이상 받을 죄가 없어진 시점에 변방으로 벼려진 불운한 자들. 그제야 자신의 무를 쌓아 올리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들.
그렇다. 이들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 속에 이름 하나만은 버리지 못한 과거의 망령들일 뿐이었다. 목적은 사라지고 환생의 미련은 버려둔 채, 오직 강해지기만을 바라는 자들. 이들이 바로 죽은 자들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껏 진지해지자, 이 장소에 있는 모두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함이 광화문을 강타했고 누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누군가 나와 마초의 앞에 섰고, 다섯 개의 창을 지닌 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지금 당신이 상처를 입으면 저희의 전력은 엄청난 손해를 입을 것이니.”
“당신….”
백남광과 무림 5대 기보의 주인 중, ‘백호 오창’의 2대 주인 ‘도진’이었다. 권민재와 1대 주인 황호가 죽고 그 뒤를 이어받았으며, 그 이후의 전투에서 수많은 활약 끝에 전장의 살성(殺星)으로 불린 자였다. 백남광이 말했다.
“그래, 인마. 너 혼자 다 해 먹지 말고 가끔은 우리한테 맡겨두라고.”
백남광과 도진의 말이 맞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마초를 향해 말했다.
“아쉽게 됐네요. 당신을 상대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그렇군. 자네가 가장 강해 보였지만…. 이 자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마초는 양손에 창을 쥐고 등 뒤에 세 개의 창이 창 집에 꽂혀있는 것을 보자, 흥미롭다는 듯 도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창이라. 처음 보는군.”
무림인 중, 기보의 주인으로 전장의 살성(殺星)으로 불린 도진과 삼국지의 장수 중, 창술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마초가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이, 형씨. 한 수 배우겠다.”
“건방진 꼬맹이로군. 좋다, 오너라!!”
파앙!!!
두 사람의 맹렬한 기운이 거세게 부딪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