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episode(15) 세계의 문#4
세계의 문.
지금까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나의 ‘명’ 이후의 이야기였지만, 레비아탄을 처치한 이 시점엔 세계의 문이 열린 이 시점이 인생의 2막이라 할 수 있었다.
거대한 문이 개방한 장소엔 수십만에 달하는 이세계인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제각각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의 외형부터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외형을 가진 이들도 존재했다.
나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아낸 후, 가장 선두에 있는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왔냐?”
사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내 주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엄청난 성장을 이룬 사내. 이 사내의 이름은 ‘외부지구’에서 불려간 자, ‘차정우’였다.
금방이라도 나를 베어내겠다는 감정이 그의 칼끝에서 느껴졌다. 지금부터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난 부상 덕분에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없었으니까.
한참을 둘러보던 차정우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살아있었군.”
“오랜만에 만났는데, 첫 마디가 그거냐?”
나름대로 반가움의 표시였건만,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차정우의 반응을 보니, 아주 조금 섭섭한 마음이 생겨났다. ‘정령의 둥지’에서 같이 싸우고 나름대로 같은 시련을 받아서였을까. 오랜만에 만난 동료라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배후성이 같고, 같은 지구 출신에,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생사를 나에게 맡긴 것으로 나 혼자 착각한 것 같았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 차정우의 입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 있지? 네놈에게 내 기억을 넘기고 왔을 텐데?”
인사도 없이 첫마디가 ‘이지은’의 행방이라니. 차정우의 기억을 훑어봤기에 알 수 있었지만, 내심 짜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차정우의 대답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게 나는 동료도 친구도 아닌, 그저 경쟁자라는 것을. 괜스레 심통이 난 나는 차정우를 놀리듯 입을 열었다.
“글쎄. 네가 기억을 맡겼다고 내가 그걸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나?”
“그렇군. 맞는 말이다.”
차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대장! 내가 할게!!”
“아니, 내가 할 거야!!”
차정우의 곁에선 두 사람이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챙-!!!
부상만 아니었으면 버프를 사용해도 지지 않을 상대들이었지만, 단 한 번 막아낸 공격에 복부의 통증이 강하게 일어났다.
“큭…!!”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자, 권지훈이 말했다.
“뭐야, 이거? 전보다 약해진 거 아니야?”
“야이….”
입을 열어 권지훈의 말에 반박하려는 순간.
“어머. 강하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별거 아니잖아? 대장! 이거 죽여도 돼?”
나를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라고 치기엔 기분이 상당히 언짢아지는 중이었다. 공격을 막아내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차정우가 말했다.
“상관없다. 그녀를 구하지 못한 시점에 저놈은 나의 적이나 다름없으니.”
“오케이!! 이번엔 내가 이긴다!!”
“아니, 내가 잡을 거야!!”
차정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이 기운을 방출시키고 있었다. 권지훈이 후방을 선점에 나에게 화살을 날렸고 근접엔 어린 꼬마의 외형을 한 여성이 나를 향해 붉은 검을 휘둘렀다.
깡!!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남극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조그마한 충격에 복부에 둘린 붕대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순간적인 분노에 버프를 사용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내가 버프를 사용하기 바로 직전에 배리어가 나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파앙-
레비아탄의 공격에서 나를 지켜주던 이지은의 성흔이었다. 괜찮을 거라며 저 멀리 두고 온 이지은이 성흔의 유효범위까지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기다려왔던 ‘차정우’를 1분 1초라도 보고 싶었겠지.
당황하는 두 사람이 공격을 멈추자, 나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번에 붙어봐서 알잖아? 넌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실제로 권지훈은 전력을 다하지 않은 내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목을 쳐낼 수 있는 존재였다. 그걸 모르는 권지훈이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무엇인지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때의 내가 아니라고!!”
“알 게 뭐야?”
권지훈이 자신의 모든 기운을 방출시키자, 그의 전신에서 아우라가 일렁였다.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한 공격으로는 이 배리어를 깰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의 주변에서 사룡과의 전투에서 느꼈던 기운들이 강해지고 있었다.
“오호…. 대단한데? 이 정도면 수룡과 해룡 정도는 되겠어.”
본래라면 이 정도까지 성장할 수 없는 룡이었음에도 ‘차정우’와의 주종 계약으로 주인의 능력치를 일부 빌려 온 것 같았다. 내 눈앞에 어린아이의 외형으로 힘을 방출시키는 이 자는 이세계의 최후룡으로 사룡, 레비아탄과는 달리 존재하는 세계의 최후룡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이아나. 외형은 어린아이일 뿐일지언정 그녀는 이세계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최후룡이자 고대룡이었다.
“네놈들 대장도 고생 꽤 했겠네.”
계속해서 여유를 부리자, 권지훈과 다이아나는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차정우가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둘 다 나와라. 내가 하겠다.”
“하, 하지만…!! 대장! 내가 할 수 있어!!”
“대장이 그렇다면야….”
쉽게 받아들이는 다이아나와는 달리 권지훈은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자신이 대장으로 모신 차정우에게 인정이라도 받고 싶었던 걸까. 조용히 시켜보던 나는 권지훈을 무시하곤 차정우를 향해 말했다.
“혼자서 가능하겠어? 넌, 날 죽이지 못할 텐데?”
“여전히 입만 살았군. 그때는 목적이 있어 함께 한 것일 뿐, 지금은 다르다. 같은 배후성이 있다고 한들, 네놈과 나는 경쟁자일 뿐이다.”
“경쟁자 좋지. 근데 말이야, 너도 알지 않나? 지옥의 군세는 하나의 세계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날 죽이겠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네놈에겐 죽음뿐이다.”
스르릉.
차정우가 새하얀 성검을 꺼내,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권지훈과 다이아나가 물러났다.
“기어코 날 죽이겠다?”
“말이 필요한가? 이지은을 데려와라. 그럼 살려주지.”
“그게 무슨 개 같은 똥고집이야?”
“약속을 어긴 것은 네놈이다.”
약속이라, 지나가는 말이긴 했어도 약속은 약속이지.
내가 성장했다는 것은 저놈도 성장했다는 것. 부상이 있는 나였기에 여차하면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선인의 기운’을 산개시켜 이지은의 위치를 파악했다.
조금 더 까불 수 있겠는데…?
솔직한 말로 이지은을 구했다고 바로 말했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이런 대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저놈들이 날 무시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레비아탄을 잡으며 능력치의 상승과 함께 8단계까지 성장한 용광검을 꺼내 들었다.
“어디 해보자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여차하면 이지은이 나의 위험을 느끼고 배리어를 전개해줄 테니.
그녀의 감을 믿을 뿐이었다.
휘익!
챙-!!!!
엄청난 속도로 밀고 들어온 차정우가 자신의 성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울컥. 피를 토하자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차정우가 말했다.
“고작 이 정도인가? 그때의 강함은 어디로 간 거지?”
남의 사정도 모르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 내 오판이었나….”
차정우는 혼잣말로 웅얼거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더니, 자신의 성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네놈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외부지구의 생존자들은 내가 맡겠다.”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하냐고 내뱉고 싶었지만, 나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였는지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후웅.
차정우가 나를 향해 성검을 내리그으려는 찰나. 내 전신에서 거대한 배리어가 또다시 생성되었다. 아무래도 이지은의 성흔은 배리어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내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배리어를 전개해주었으니까.
파앙-!!
쩌적. 쩌저적.
성검에 부딪힌 배리어에 금이 가는 순간, 차정우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과연, 믿는 구석이 있었나 보군. 내 공격을 막을 정도의 배리어라니.”
“아무렴. 내가 혼자 왔을까 봐?”
“네놈이 죽을 시간을 늘려주는 것뿐이다.”
후웅.
쾅!
차정우가 다시 한번 검을 들어 금이 간 배리어 완전히 벗겨내곤 말했다.
“외부지구의 모든 이를 이끌면서도 이곳에 혼자 온 이유는 동맹이겠지. 하지만 네놈의 판단은 잘못되었다.”
“왜지?”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면 이지은을 데리고 왔어야 했다.”
“……”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차정우가 자신의 성검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단순한 휘두름에도 배리어에 금이 갈 정도의 파괴력. 그런 그가 스킬을 사용한다면? 배리어와 함께 죽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차정우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무엇이 웃기지?”
“곧 알게 될 거야.”
“네놈이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죽어라.”
냉정하고도 차가운 눈빛의 차정우가 스킬을 사용했다. 성검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자 나의 몸에서도 얉은 진동이 느껴졌다. 태양 빛을 받아 고고하게 빛나던 성검이 나의 몸을 베어내려는 찰나. 배리어는 조금 더 두껍게 내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지은 씨, 나이스…!!
차정우의 시선이 저 멀리 한 여성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차정우에게 약 올리듯 입을 열었다.
“전투 중에 다른 곳에 한눈팔기 있냐?”
“……”
차정우는 말이 없었다. 그의 두 동공이 촉촉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차정우의 뺨을 타고 묽은 액체가 또르륵 흘러 내려왔다.
“살아있었구나…. 이지은!!!”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정우가 몸을 움직여 이지은을 향해 날아갔다.
“망할 새끼.”
* * *
정신 사나운 만남 뒤에 나와 이지은은 이세계의 진영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죽고 싶은가? 이런 장난을 왜 친 것이지?”
“장난 친 거 아닌데? 네놈들이 다짜고짜 덤벼놓고…?”
“네놈이 이지은의 생사만 확인 시켜줬어도 이런 일은 벌어나지 않았을 거다.”
약이 올랐다. 인사도 없이 이지은의 생사만 확인한 놈이.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내뱉으며 말했다.
“뭐, 장난이 조금 지나치긴 했다. 미안하다. 두 사람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사이인 걸 모르는 내가 아니었으니까.”
차정우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내게 쏘기 시작했다.
“다음은 없을 줄 알아라.”
“그러시든가. 대화들 나누라고.”
나는 두 사람이 대화를 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곤 남극과 반대되는 위치를 향해 ‘선인의 기운’을 펼쳐냈다.
스아아아아.
느껴지는 기운이 지금껏 느꼈던 기운들과는 사뭇 다른 기운들이었다.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기운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곤 조용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번엔 정말 어려울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