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episode(15) 세계의 문#3
그동안 왕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내가 모든 이들의 왕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인격을 지켜주기 위해서.
하지만 눈앞에 나를 죽이려는 이 아이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멈칫.
맹렬한 기세로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안재훈이 자리에 멈춰 섰다.
“큭…. 몸이…!!”
‘왕의 권능’이란.
한국의 왕이 되면서 한국인을 상대로 절대적인 명령을 부여할 수 있는 사기적인 힘.
권능을 사용하는 페널티도 없을뿐더러,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는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물론, 한국에 한해서지만.
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자, 안재훈의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 설마 그 힘을 사용한 거야? 비겁하잖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분한 표정을 짓는 안재훈이었다.
이 아이를 구제할 방법은 단 한 가지.
나의 ‘명’에서 본 방법뿐이었다.
지금 당장은 상황을 넘기는 수밖에 없었지만, 훗날 ‘명’에서의 방법처럼 안재훈이 정신을 차린다면,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겠지.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재훈을 바라보았다.
“형이 미안하다.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 세계의 문이 열리고 일곱 번째 미션이 시작되면 그땐 날 죽이러 와라.”
나의 말에도 씩씩거리는 안재훈이었지만, 나는 말을 이어갔다.
“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안재훈에게 명령한 것은 두 가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 것.
일곱 번째 미션이 시작되기 전에는 나에게 덤벼들지 말 것.
단순한 이유였지만, 이 아이는 나로 인해 더욱 강해질 것이다.
나 하나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물론 안재훈 마음대로 되지 않겠지만.
‘왕의 권능’을 사용한 나는 안재훈을 향해 말했다.
“해산.”
그 순간.
나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면서도 안재훈은 자리를 벗어나는 중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백남광이 말을 걸어왔다.
“저대로 보내도 괜찮은 거야?”
“응.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오히려 나에 대한 분노로 저 아이는 강해지겠지. 그때 다시 만난다면, 저 아이는 내 힘이 되어 줄 테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너에 대한 분노로 강해진 놈이 힘이 되어 준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백남광이었지만,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지켜보라고. 내 말대로 될 테니까.”
“뭐, 알아서 하겠지. 이쪽은 어떻게 할까?”
백남광이 가리키는 장소엔 네팔인들과 그들의 중심에 ‘쿠마리’라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내가 이야기해 볼게.”
침상에 누워서 요양해도 모자란 상황에, 이리저리 나다녀서 그런지 나의 복부에 감은 붕대가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빨리 정리하고 쉬어야겠다.
네팔인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몸을 움직인 나는 쿠마리를 지키는 사도에게 말을 걸었다.
“무사하셨군요.”
세계의 대표를 모았을 때 만났던 사도였다.
사도는 경계하면서도 이미 나와 만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은 침착하게 답했다.
“덕분입니다.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희의 역사는 저물었겠죠.”
“별말씀을요. 쿠마리는 무사합니까?”
“네. 저분이 아니었다면….”
사도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들이 전멸할 뻔한 순간을 떠올렸다.
백남광이 돕지 않았다면 안재훈의 흑아가 네팔을 집어삼켰을 테니.
나는 그런 사도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행이군요. 아직도 저희와 함께할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사도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모든 것은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께서 결정하십니다. 저희는 ‘쿠마리’를 지키는 사도일 뿐이죠.”
사도의 말은 거절과 다름없었다.
쿠마리는 감정을 통제하고 모든 판단은 그의 주변인이 결정했기에, 발언권조차 없을 터.
나는 그런 사도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운이 좋았던 거지,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당장 다음 미션만해도 당신들은 전멸하기 딱 좋은 세력이니까요. 그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전멸이라는 말을 보태며 협박식의 말을 하자, 그제야 사도는 한숨을 푹 내쉬기 시작했다.
조금은 생각이 변했겠지. 본인들도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나의 말에 사도는 아주 잠시 생각을 이어가더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는 건 어쩔지요.”
“말씀해 보세요.”
“저희는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를 모시는 몸. 누군가의 세력에 흡수되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시겠다?
“해서 단 한 번. 당신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저희를 불러주십시오. 마찬가지로 저희도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그것이 최선일까요? 단 한 번을 넘긴다고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저희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쿠마리를 향해 말했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하렴. 그렇게 힘든 짐을 억지로 지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당신 무슨 말을…!!”
“가보십시오.”
나의 말에 ‘쿠마리’의 눈빛에 조그마한 생기가 돈 것은 우연이었을까.
당장 필요한 세력은 아니었기 때문에 몸을 돌렸다.
“가자.”
백남광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일행들의 진영으로 몸을 움직였다.
* * *
나름대로 상황은 잘 풀렸지만, 여전히 찜찜한 부분은 남아있었다.
‘명’의 흐름대로 안재훈과 흑아를 살려 보낸 것.
정말로 나의 ‘명’대로 안재훈이 갱생에 성공할 수 있는지는 그 상황이 와야 알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후….
짧은 한숨을 내쉰 나는 ‘세계의 문’이 열리기 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레비아탄과의 전투에서 나에게 도움을 여성. 이지은을 찾아야 했다.
‘왕의 권능’으로 불러보기도 했지만, 이지은은 응답이 없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은 왕이 없는 무법지대의 생존자라는 소리.
직접 찾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어디 가서 찾는담…?
당장 3시간밖에 남지 않았기에 마음은 초조해져 갔다.
초조함? 아니다. 이건 살기 위한 몸부림.
실제로 나의 ‘명’에서 이지은의 존재를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결과.
엄청난 피해로 이어졌다. 이 말은, 이지은의 존재가 나를 포함한 모두를 살릴 길이나 다름없다는 것.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레비아탄과의 전투에서 최전방에 선 이들에게 수소문을 한 결과.
이지은의 위치는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선인의 기운’을 한국 내부로 펼쳐낸 후, 이지은의 기척을 느끼기 시작했다.
파앗!
찾았다.
기척 감지를 그대로 따라가 도착한 장소는 거대한 싱크홀의 앞이었다.
싱크홀의 앞에서 어쩐지 슬퍼 보이는 뒷모습을 한 이지은을 발견한 나는 입을 열었다.
“무사하셨네요.”
뜻밖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이지은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 당신은….”
“레비아탄과의 전투에서는 고마웠습니다.”
갑작스레 등장에도 침착함을 유지한 이지은은 거대한 싱크홀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무나도 깊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싱크홀.
나는 이지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저에겐 의미가 큰 곳이죠. 갑작스러운 싱크홀에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곳.”
“……”
울먹이는 이지은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차정우는 이곳으로 빨려 들어가 이세계의 용사가 되었을 테고.
이지은은 그런 차정우를 그리워 수십, 수백 번씩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을.
“여러 번 찾아왔지만, 그를 찾을 방법은 없었어요. 그리워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죠.”
“그래서 절 찾아온 겁니까?”
“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당신의 도움이 있으면,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레비아탄과의 전투에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날 찾아온 이유.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차정우를 찾기 위해서였다.
슬픈 눈으로 싱크홀을 바라보는 이지은이 입을 열었다.
“제 욕심으로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건 싫어요. 그래서 전투가 끝나고 자리를 피했죠. 크게 다친 당신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죠?”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가 왜….”
이지은이 나를 돌아봤다.
“차정우를 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 * *
세계의 문이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전투가 가능한 모든 인원이 ‘남극’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안이 씨,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글쎄요. 당장 전투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죠.”
“상처는 괜찮은 거예요?”
“아니요. 더럽게 아픕니다.”
당장 벌어질 상황에 걱정을 표하는 김영광과 나의 상처를 걱정하는 김도은이었다.
그리고. 내 곁에 이지은이 서 있었다.
“정말….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거예요?”
“네. 그리고 당신이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어요.”
나는 이지은을 데리고 오면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차정우가 살아 있는 것부터, 이세계에 간 것까지.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은 차정우의 인격이 상당히 마모되었다는 것.
차정우는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죽고 죽이는 전투의 여파로 그 인격이 상당히 마모되었다. 아니, 감정 없는 로봇 같다는 것이 옳았을까?
이지은의 생사도 모르는 차정우가 택한 것은 감정을 버리는 것일 테니.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스템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시간의 줄어듦을 알려왔다.
1분. 하늘이 어둑해지더니, 곧 천둥 벼락이 지상에 내리꽂혔다.
문이 열리기 전의 징조 현상.
나는 몸을 공중에 띄워 이지은을 향해 말했다.
“가시죠.”
“네…!!”
공중으로 날아든 우리가 향한 곳은 ‘남극’ 깊숙한 곳에 있는 문이었다.
[세계의 문이 개방됩니다.]
시스템의 알림과 동시에 거창한 땅울림이 시작되었다.
쿠구구구.
지진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거대한 문이 지상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
한참을 솟아오르던 문이 그 위용을 뽐내더니, 곧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문 건너편에서 수많은 종족의 눈빛이 번뜩였다.
가장 먼저 문을 넘어선 자는 이세계의 용사, ‘차정우’ 그 뒤를 이어 차정우의 곁에 어린아이의 외형이 보였고, 일 전에 만났던 사내가 눈에 보였다.
싱크홀에 빨려 들어가면서 차정우와 같이 떨어진 사내, 권지훈이었다.
동시에 내가 위치한 반대편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계의 문은 두 곳.
한 곳은 내부세계라는 이세계였고, 다른 한 곳은 ‘죽은 자’들의 고향인 지옥이라 부르는 장소였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세계와 죽은 자들을 상대하며 살아남아야 한다.
거대한 문을 등지고 있는 차정우가 나를 발견하곤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성질머리하고는.
나는 차정우를 향해 말했다.
“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