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episode(14) 인류 최후의 날#12
이지은이라….
용사, 차정우와의 만남 뒤에 억지로 떠맡은 일.
억지라고는 해도 결국 훗날 만나게 될 차정우와의 만남을 위해 찾으려는 생각만 했던 여성이었다. 물론, 이번 미션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당장 찾을 생각은 없었지만.
뜻밖의 등장에 당황한 나는 멍해진 표정으로 이지은을 바라보았다.
“뭘 봐요. 내가 그렇게 이뻐요?”
이지은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고 말하는 듯 뻔뻔했다.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아니구나.”
“네, 아닙니다.”
사실, 이지은의 외모는 그 누가 봐도 상당히 이쁘다고 할 정도의 외모였다.
그 잘난 차정우의 연인이니,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뻔뻔한 성격인지는 예상 못 한 나였다.
이지은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할 말 없으면 전투에 집중하시죠. 제 성흔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아, 그러죠.”
당장 차정우와 관련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전투는 계속해서 벌어졌고, 레비아탄의 브레스에 녹아내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레비아탄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레비아탄의 폭주가 시작된 것.
나의 ‘명’은 고룡까지의 전투를 보았을 뿐, 더 이상 참고삼을만한 내용은 없었다.
어쩌지? 무언가 방법이….
나는 급박해진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모두가 죽기 전에….
현재 가장 강한 인간은 나.
그렇다는 건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 나였기에 겁을 먹어서 몸이 굳었다거나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고자 머리를 굴리는 중은 아니었으니.
나는 레비아탄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멸망’의 핵심인 다섯 번째 미션을 클리어한 존재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모두가 죽고 만다.
방법이 없어도 살아남을 구멍은 반드시 있을 터.
용광검을 제대로 쥔 나는 이지은을 향해 말했다.
“제가 공격당할 때. 그때 배리어를 부탁드립니다.”
“기회는 단 세 번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단 세 번. 세 번의 일격 안에 레비아탄의 팔 한쪽이라도 잘라내야 승기는 우리 쪽에게 기울 것이 분명했다.
현재 레비아탄의 상태는 ‘카르마’를 사용한 내 일격에 날개가 상당 부분 파손되어 있었고 한쪽 팔마저 잘린 상태.
승기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고오오오.
나는 전신에 담긴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정령화의 종료로 한쪽 팔밖에 사용할 수 없음에도 나에겐 오른팔과 용광검이 있었다.
그리고 ‘카르마’를 사용한 힘이 남아있었다.
“갑니다.”
“네!!”
이지은의 우렁찬 대답과 함께 레비아탄을 향해 날아갔다. 이미 공격은 진행되고 있는 상태. 나는 이 빈틈을 노릴 뿐이었다.
내가 죽더라도 팔 한쪽은 가져갈 생각으로.
파앗!
순식간에 레비아탄의 뒤로 도달한 나는 용광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하찮은 인간들아, 네놈들이 이길 것 같은가!?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킨 나이니라!!”
레비아탄은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며 우리를 향해 외쳤다.
이를 아득바득 가는 레비아탄의 외침이 어째서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 모습에도 나의 용광검은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그어졌다.
서걱!
그때였다.
레비아탄의 등을 공격하려던 찰나, 잘린 그의 꼬리가 나의 복부를 향해 날려져 왔다.
수욱.
팡-!!!
순간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낀 나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지은의 배리어가 아니었다면, 내 복부엔 거대한 구멍이 뚫리고 말았을 테지.
후….
심호흡을 짧게 내뱉은 나는 레비아탄과의 거리를 벌려냈다.
남은 기회는 단 두 번.
시야를 벗어난 공격에도 레비아탄은 나를 죽이려 했다.
이 말은 정면 승부밖에 답이 없다는 소리였다.
제기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라, 생각해.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려던 중.
레비아탄이 말을 걸어왔다. 아직까지 여유는 충분하다는 듯한 그의 행동.
“크크큭. 가장 강한 인간이여, 그대의 행동을 살피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도마뱀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봐?”
“허세는 그쯤 부리거라. 네놈의 힘이 다해간다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고 있으니 말이야.”
한눈에 내 상태를 알아본 레비아탄이었지만, 나는 침착했다.
스킬, 냉정은 조금 더 차분하게 상황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었다.
이미 레비아탄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
도발은 의미 없다. 시야를 벗어난 사각지대에서의 공격도 의미 없다.
그렇다는 건.
정면승부뿐이다.
시간이 금이라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나의 버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한다.
후웅!!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레비아탄을 향해 날아간 나는 그의 목을 떨궈내기 위해서 그의 목을 향해 횡 베기를 사용했다.
챙-!!!
거대한 소리와 함께 용광검이 막히는 순간에 레비아탄의 브레스가 나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핑!!!
너무 근접해있어서 그런지, 눈 깜짝할 시간의 시간도 없이 브레스가 나의 몸에 닿을 때쯤.
이지은의 배리어가 다시 한번 나를 막아주었다.
남은 기회는 단 한 번 이것이 내 마지막 일격.
쩌적, 쩌저적.
레비아탄의 브레스에 배리어가 깨지는 순간.
나는 용광검에 홍염을 부여해 레비아탄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이놈이…!!!”
젠장, 얕았나?
나름대로 최후의 일격이었음에도 그의 상체에 조그마한 검상이 생겼을 뿐.
곧바로 레비아탄의 브레스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투투투투.
“마지막이에요!!!”
이지은의 외침이 나의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 더 이상 공격을 막을만한 스킬은 없었다.
쏟아지는 브레스에 이지은의 배리어가 깨지려는 순간. 레비아탄이 비릿하게 웃기 시작했다.
“크큭. 그 잘난 배리어도 이젠 끝인가 보구나.”
“넌 모를 거다.”
“무엇을 말이냐?”
“네놈과는 다르게, 나는 혼자가 아니거든.”
쩌적, 쩌저적.
계속해서 금이 가는 배리어를 보며, 레비아탄이 나를 향해 물었다.
“벌레가 여럿 모인다고 그들이 벌레가 아니게 되는가?”
레비아탄의 질문은 단순한 의미였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소리겠지.
나는 그런 레비아탄을 무시하곤, 전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확성기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외침은 전장에 뻗어나갔다.
그리고 내 외침을 신호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후웅-!!
김도은이 사용하는 성흔, ‘달의 정기’
쿠콰쾅!!!!!
김영광이 휘두른 마우이의 일격.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수십만이 사용하는 성흔이 레비아탄을 향해 쏟아졌다.
“우린 살아남는다.”
“크하아아악!!!! 벌레들이…!!! 감히, 감히!!!”
검은 핏물은 시원하게 게워내며 레비아탄을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금이지?”
“어. 한 방 먹이라고.”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백남광.
“갑시다.”
백남광은 비장한 목소리로 레비아탄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옆에는 네 명의 무림인이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무림 5대 기보. 그 주인들이었다.
“진 개방.”
백남광을 필두로 기보의 주인들은 ‘진 개방’을 사용해 기운을 한껏 방출시켰다. 개개인이 세계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함을 가진 그들.
현재 레비아탄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화력을 가진 그들이었다.
물론, 창의 주인은 바뀐 지 얼마 안 되어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지만. 그의 각오 또한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5대 기보의 주인들이 목숨을 건 일격이 쏟아졌다.
콰콰콰쾅!!!!!
기보의 거센 기운이 레비아탄을 집어삼켰고, 곧 공격의 여파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다들 축 늘어져 기진맥진함을 보였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레비아탄을 처치했기를.
하지만 간절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시스템의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무리였나…?
순간적으로 포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주인, 포기는 아직 이르네!!”
“안군!!”
영혼 상태인 두 사람의 외침에도 쏟아낼 무언가는 우리에게 없었다.
그 순간.
핑-!
약해질 대로 약해진 레비아탄의 브레스가 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커헉….”
“크하하핫. 아직이다, 아직이야!!!”
복부를 꿰뚫린 나는 검붉은 핏물을 공중에 뱉어내기 시작했다.
“망할 새끼가!!!”
레비아탄은 멈추지 않고 나를 향해 브레스를 날렸다.
핑-!!
핑, 핑!!!
가까스로 한 발은 용광검을 휘둘러 막아냈지만, 두 발의 브레스가 뒤이어 날려져 왔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나를 데리고 가려는 최후의 일격인 것 같았다.
아니, 최후의 일격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지막이길 바란, 두 발의 브레스는 나를 꿰뚫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파앙!
스킬, [기사회생 LV MAX]이 자동으로 발동합니다.]
스스스스.
죽을 위기에 처해도 단 한 번, 공격을 무효화 함과 동시에 절반의 체력을 회복하는 스킬이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크하하아!!!!”
체력이 회복되자, 레비아탄을 향해 돌진했다.
죽어라, 죽어!! 제발!!!
모든 스킬을 사용한 내게 남은 것은 없었다.
이제는 마력도 없었고 버프의 남은 시간도 1분.
할 수 있는 건 1분 동안 레비아탄을 공격하는 것뿐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 숨을 헐떡이는 사람들을 보자니,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레비아탄과 마주 선 나는 용광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레비아탄도 나를 향해 자기 발톱을 이리저리 그어냈다.
“헉… 허억…!!”
거친 숨을 내뱉으며 넝마가 된 나의 몸을 살폈다.
개판이네….
“크하하!!! 나와 함께 가자꾸나!! 강한 인간이여!!”
개판인 것은 나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내버려 둬도 죽을 정도의 상처를 앓는 레비아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외쳤다.
“죽어!!!”
“죽어!!!”
나와 레비아탄의 공격이 서로를 향해 교차해 나아갔다.
서걱!
푹!
“이럴…수…가….”
나의 용광검이 레비아탄의 목을 베어내는 순간, 레비아탄의 단단한 발톱이 내 복부를 꿰뚫었다.
레비아탄의 목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으며 날려져 가는 순간, 용광검을 손에서 놓쳤다.
빌어먹을. 이대로 죽는 건….
죽음이라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휘감을 때였다.
흐릿해지는 시야와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미션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해당 미션의 기여도 1위는 ‘이 안’입니다.]
[기여도 1위의 보상으로 100%의 능력치와 스킬 데미지가 상승합니다.]
[5일 뒤, 세계의 문이 개방됩니다.]
[남은 시간 119시간 59분 51초]
너무나도 흐릿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살아남은 것 같았다.
아니, 나는 죽는 건가…?
흐릿해진 눈을 감자, 시스템의 알림과 나를 부르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나의 귀에 맴돌았다.
“안이 씨!!!”
“오라버니!”
[당신의 ‘명’이 갱신되었습니다.]
[당신의 ‘명’을 강하게 되새깁니다.]
당신은 사망하였습니다. 같은 말은 아니겠지.
다들 무사한 것 같으니…. 다행이다.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웠던 나는 메시지를 보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