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나이도 나이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도와드리겠습니다. 손을 잡으시죠.”
“우리의 ‘신’은 우리가 지키겠다.”
쿠마리를 지키는 사도는 확고했다.
이들도 시스템의 각성자.
그런 쿠마리가 배후성의 도움을 받은 것은 내 눈에는 모순이었다.
신이라는 자가 신의 도움을 받고, 살아 있는 ‘쿠마리’라는 신을 모신다는 자들이 다른 배후성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나는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에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 아이만을 특별하게 보듬어 살릴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네팔의 쿠마리는 이탈리아와 오세아니아 전체의 대표와 겨룰 실력을 지닌 것은 확실했다.
그 확실함 때문에 미련이 조금 남기는 했지만.
“알겠습니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보도록 하죠. 가보셔도 됩니다.”
“우리들의 뜻을 이해해주어 고맙다. 그럼….”
쿠마리의 사도들은 쿠마리를 정성껏 가마에 태워 ‘전이의 깃털’을 사용했다.
나는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혹시라도 만난다면 그때는 꼭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이유?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쿠마리’라는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그저 ‘임아린’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린이는 잘 있으려나?
임아린의 걱정을 뒤로한 채,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은 6일 남짓.
이계의 무림인들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였다.
강해지는 것.
전 세계의 대표들과 계약을 진행했고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살아남아 통합을 이룰 것이다.
그렇다는 건, 우리에게 남은 일은 6일간 강해질 수 있는 최대치로 강해져 그들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었다.
“후…. 세 나라는 신앙심이 깊은 나라입니다. 각자가 모시는 신들이 존재하죠. 물론…. 그들의 신들도 성좌로써 존재하겠지만, 저희와는 연이 아닌가봅니다.”
나의 말에 김도은과 김영광이 쿠마리에 관한 생각을 못 잊었는지,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이제 저희는 뭘 해야 하나요?”
김도은의 물음이었다.
“도은 씨와 영광 씨는 이미 이계의 무림인들과도 전투가 가능할 정도로 강해져 있습니다. 더 강한 제가 있으니, 저희 세 사람이 지금 한계 이상으로 강해질 필요는 없겠죠.”
“그렇다는 건, 역시….”
“네. 애매한 강함을 지닌, 선미 씨나 여럿, 대표들을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방법은 간단했다.
남은 6일간 최후의 20인을 뽑아 그들이 게이트를 클리어하게 도와주는 방법뿐이었다.
내가 뽑은 20인이 이계의 무림인을 상대로 어디까지 보여줄지는 모르겠지만….
“움직이죠. 곧 그들이 저희 쪽으로 올 겁니다. 각자의 나라로 가기 전에 미리 말해 둔 것이 있으니.”
“오라버니. 저는…. 어쩌죠??”
“아…. 안 그래도 생각 중이었습니다. 선미 씨는 확실히 강합니다. 하지만…. 지구에서 선미 씨 배후성의 게이트를 찾는다는 게….”
“제가 물어볼게요! 혹시 모르잖아요.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진선미는 말 그대로 모호했다.
다른 세계의 무림인이 배후성인 진선미는 그의 게이트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곳은 지구. 진선미의 배후성은 사라진 세계.
그렇다는 건, 게이트가 남아있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나마 하나 있던 게이트는 천마인 윤문의 게이트였고 그 게이트는 나의 ‘영혼 흡수’로 인해 영원한 소멸에 빠진 상황이었다.
즉. 있어도 진선미와는 관련이 없는 게이트였다.
찾으면 없지는 않겠지만….
나의 ‘명’에서도 언급은 없었고, 어째서인지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성좌들의 메시지도 없었다.
짐작일 뿐이었지만,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성좌들도 아득히 먼 미션을 클리어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최후의 20인은 저를 포함해 도은 씨와 영광 씨 그리고 선미 씨. 확정 인원은 네 명입니다. 후보들은 뽑아두었으니, 그들을 강하게 만들고 남은 1일 전에 확정 짓는 게 좋겠네요.”
“남은 1일 전에 뽑는다면 너무 급하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시스템과 배후성에 따라 성장 가능성은 무한하니까요. 지금의 대표들이 따라잡히는 현상도 자주 일어날 겁니다.”
“그렇군요….”
나는 김도은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모여드는 각 나라와의 대표들과 성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 속속히 우리들의 앞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비장한 표정들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럼, 시작해보죠.”
그렇게 족집게 강의가 시작되었다.
* * *
정신없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와중에 5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치트키와 같은 수준.
클리어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다행인 것은 진선미의 게이트가 남아있었다는 것.
단 한 곳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최후의 20인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대장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모두 제 강함을 보셨으니 군말 없이 따를 거라 믿겠습니다.”
나의 말에 이탈리아, 네팔, 오세아니아 쪽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긴장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일단은 앞서 말씀 드린 데로 4명은 저와 도은 씨, 영광 씨 그리고 선미 씨는 확정이고, 남은 열여섯은 강함은 물론, 다인 전투보다 일대일 전투에 능한 사람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뽑으라고!!”
“동무만 믿겠네!”
하?
역시. 사람은 강하고 봐야 하는 건가…?
그 콧대가 높던 북한의 대표가 나를 믿어준다는 말에 무언가 찡함이 밀려 들어왔다.
“이번 전투는 일대일로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죽는 사람을 최소화한 나름의 방법이니 죽지 말고 이기도록 하세요.”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꽤 많은 숫자를 화안 금정으로 들여다본다는 것은 눈과 나의 몸에 피로를 불러들였지만, 내 몸을 사릴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는 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들이 수없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독고성, 리민혁 씨. 일본의 키와타 히로시, 러시아의 안젤리나 로마노프, 미국의 마크….”
한 명씩 나라와 이름을 부르자, 사람들은 저마다 환호하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죽을 수도 있는데, 왜 아쉬워하는 건데…?
“독고성, 리민혁 동무. 공화국을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위하여! 공화국을 위하여!”
“공화국을 위하여!”
……
아무튼.
“이것으로 최후의 20인은 뽑혔습니다. 남은 시간은 고작 하루. 하루 만에 특출나게 강해질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다들 쉬도록 하세요.”
나는 지구 전체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강자다.
하지만, 이들의 대표를 자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20인을 뽑은 후 몸을 돌려 휴식을 취하려 할 때였다.
[우와아아아아아!!!!! 이기자!!]
“이보게 동무! 한마디 하시라우!!”
“제일 강한 자네의 말이라면 모두가 들을걸세. 한마디 하게나!”
“형님!! 전 앞으로 형님만 따를 겁니다!!”
앞으로 나선 사람은 북한의 김정희와 미국의 마크. 그리고 일본의 히로시였다.
“뭐…. 원한다면 한마디만.”
아무래도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준 나의 강함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확성기’ 아이템을 사용해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을 이었다.
[전 여러분들을 지키기 위해 이런 식으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은 본인들이 지키세요. 당신들의 목숨은 스스로 지키세요. 저희는 이번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수도 있죠. 최선을 다하세요. 두 번의 목숨은 없습니다. 목숨을 거세요. 그래야 우리들의 세계를 나라를, 가족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리고 지켜낼 겁니다. 내 목숨과 내 동료들을.]
말을 끝마치자, 모인 사람들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마다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는 듯한 눈빛.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기자!!! 싸우자!!!”
[우와아아아아!!! 이기자!! 싸우자!!! 우리가 이긴다!!!]
목소리가 큰 한 사람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 소리는 곧 우리가 서 있는 장소를 뒤덮을 정도의 큰 환호성이 퍼져 나왔다.
소름이 돋는 장면이었다.
이 정도의 함성과 사람들이 모인 것은 2002년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럼, 다들 컨디션 조절을 하며 쉬도록 하세요.]
나의 말에 함성은 멎어 들었고 사람들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단 하루를 만끽하려 자신들의 나라로 이동했다.
남은 건 한국의 사람들과 나의 일행들이었다.
“모두 돌아가서 쉬도록 하세요. 여기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조용히 쉬고 싶었다.
이제 와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 사람이 북적대고 많은 것은 질색이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김도은과 김영광 그리고 진선미였다.
“왜 그렇게 쉬라고 재촉을 하시는 거예요? 이왕 모인 김에 친해지면 좋을 텐데.”
“아…. 진 빠집니다. 사람 많은 건 질색이라서요.”
“.... 안이 씨, MBTI 아시나요?”
“들어는 봤습니다만.”
“안이 씨는 분명히 I일거에요.”
“그게 뭐죠.”
“나중에. 우리 세계가 정상적으로 돌아온다면, 그때 알려드릴게요.”
“뭐… 그렇게 하세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김도은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을 때였다.
파앗!
“아저씨!!! 저 왔어요!”
“어?”
슬슬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빠르게 온 것 같았다.
이민영.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그 미소를 잃지 않는 강한 아이였다.
물론, 그녀의 아버지는 영혼 상태로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벌써 온 거야?”
“네! 제 도움이 필요할 거 같아서요! 이것 봐요!”
촤륵!
이민영은 게이트를 클리어하며 배후성의 ’신기‘를 얻어냈는지, 방긋 웃으며 나를 향해 펼쳐 보였다.
아름다운 문양의 부채는 별것 없어 보이는 외형과는 다르게 그 분위기가 꽤 무겁고 신비로워 보였다.
“이거 ‘신기’래요! 이것만 있으면 버프의 효율도 향상하고 시간도 증가할 거예요!”
“오…. 좋은데?”
신이 난 이민영은 부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했다.
하지만.
난 이제 좀 쉬고 싶었다.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아저씨! 영혼 어디 갔는데요! 대꾸 그런 식으로 할 거예요!?”
“야. 꼬맹이. 오라버니 괴롭히지 말아 줄래?”
“아줌마. 자꾸 끼어들지 말아요.”
“둘이 친해진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아닌데요!”
“아니에요!”
“아…아니구나. 그럼 쉬세요. 제발.”
“힝…알겠어요.”
달디단 휴식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동안 못 잔 잠을 몰아 잤고 일행들과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 * *
나와 전 세계의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레이트 홀.
이계의 무림인들이 넘어올 시간이었다.
강하다면 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였음에도, 전신에 긴장감이 흘러들었다.
나는 공중으로 떠올라 이계의 무림인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파앗!
“시간 약속은 잘 지키는 분들이시네요.”
“제가 할 말은 대신 하시네요. 계속 꼼수만 부리는 것 같아서 안 올 줄 알았더니.”
“호호. 허세는 여전하시구요.”
“저, 미친놈도 여전하네요.”
“뭐, 인마!?”
가장 먼저 그레이트 홀을 넘어선 사람은 진예화와 백남광.
그런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이계의 무림인 전체가 그레이트 홀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대전쟁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가시죠. 임시 필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