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달랐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스무 살의 권민재는 목적 없는 삶 속에서 이안을 보며 강해지기를 바랐고.
권민재보다 20년은 더 살아온 황호는 강해진 삶 속에서 회의감을 느껴 지루한 삶을 끝내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달랐지만, 같은 창을 사용했고 무언가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이 죽어가는 권민재와 황호에게 마지막 순간 기쁨을 주었다.
달랐지만, 비슷한 두 사람이 죽고 난 후.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를 한 두 세계의 사람들은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만이 흐르고 있었다.
“이계인 들이여. 그대들이 우리 정찰대를 몰살시킨 것을 알고 있다.”
“……”
“하지만…. 검마와 백호의 주인이 바라던대로 네놈들을 보내줄 것이다.”
임해든은 알고 있었다.
치기 어린 복수심으로 덤벼들어봤자, 이 정도의 숫자엔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들은 그저 그런 무림인이 아니었다.
‘강하다.’
임해든은 애초에 권민재를 희생시켜 자신이 살아나갈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좋습니다. 다음엔…. 두 진영 중 누군가는 멸망에 빠져야겠죠.”
“생각이 바뀌기 전에 가라.”
고개를 끄덕인 임해든이 손짓하자, 50명의 정찰대는 분노에 가득 찬….
아니, 자신들의 강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분함을 못 이긴 채 그레이트 홀로 들어갔다.
임해든은 그런 그들의 모습과 자신을 희생한 권민재의 모습에 많은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난…. 항상 나만 생각했구나.”
임해든은 권민재를 들쳐 매고 그레이트 홀 앞에 섰다.
“나!!! 한국인 임해든이다!! 지금은 실력 차를 명확하게 알고 있어 이대로 도망가지만…. 반드시 네놈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네놈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상관없다. 누군가는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이다. 절대로 죽지 말아라. 네놈들은 내 손으로 죽여주도록 하마.”
임해든의 외침에 수천, 수만에 달하는 이계의 무림인들이 동시에 그레이트 홀 방향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외친 말에 갑자기 달려든다면, 되레 당하는 것은 임해든 본인이었다.
하지만, 임해든은 무섭지 않았다.
온몸이 덜덜거리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지만, 그뿐이었다.
임해든의 외침은 객기가 아닌 각오였다.
“좋다. 강해져서 오거라. 우리 또한 복수의 대상이 필요하니, 그 대상은 네놈이 좋겠군.”
고개를 끄덕이며, 황호를 들고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꽤 강해 보여 그의 강함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당분간이지만 황룡의 금안은 이미 한 번 사용했기에 두 번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대가 강해져 나와 겨룰 힘을 갖추면, 그때 내 이름을 알려주도록 하지.”
“흥. 이름 따윈 아무래도 좋다. 기다리라고.”
임해든은 자신의 각오를 수만의 병력 앞에서 외친 뒤, 그레이트 홀 속으로 사라졌다.
“대장. 당신의 창은 제가 갖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의지는 제가 이어가겠습니다.”
임해든이 사라지는 것을 본 황호의 부하는 ‘백호 오창’을 수거해 챙겼다.
훗날
이 사람은 ‘백호 오창’의 2대 주인으로 전장의 살성(殺星)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 * *
파앗!
“그나저나, 뭐라고 말합니까…. 민재 씨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자신의 헛된 욕망에 재능있는 사람을 죽게끔 등 떠민 임해든의 마음이 착잡했다.
저 멀리 수십 명의 무리가 보였다.
“돌아왔나?”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하루가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해든 씨. 오셨군요. 그나저나, 민재 씨는 많이 다친 겁니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전신에 피칠갑을 하곤, 축 늘어져 있는 권민재.
보통 상처는 아니었다.
“……”
“왜 말이….”
단순히 다쳤다면, 이 전에 용사, 차정우에게 받은 엘릭서를 사용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나 때문입니다. 내가…. 등 떠민 탓에 민재 씨가 희생당했습니다….”
“……”
“우리를 모두 구하고….”
마음이 착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명’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임해든과 권민재를 같이 보낸 것이었다.
‘명’에서는….
죽는 이는 권민재가 아니었다.
나의 ‘명’에서 죽는 사람은 ‘임해든’이었다.
임해든의 강함을 믿고 혼자 정찰을 보낸 나였고, 그로 인해 임해든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임해든을 포함해 권민재와 외 50여 명의 정예를 뽑아 이계로 정찰을 보낸 것이었다.
이번 일은…. 온전히 나의 실수였다.
젠장. 또 변했다.
“누군가는…. 죽었어야 하는 운명이었나 봅니다.”
“네…?”
혼잣말을 내뱉는 나에게 임해든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계의 무림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네….”
“민재 씨는 정예 분들과 이동해서 잘 묻어주도록 하세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크게 슬픔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권민재에 대해 미안함은 점점 커지는 중이었다.
권민재를 보내지 않았어도 됐다.
모두를 살릴 생각이었으면, 내가 가도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들을 믿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정찰을 보냈어야 했을까?
나는 이미 저들 대부분의 전력을 알고 있었고, 저들의 대표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
또다시 ‘명’이 변했을까, 두려운 마음에 정찰을 보낸 것이었다.
임해든의 죽음을 권민재와 정예들로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막기는 막았다.
다른 이의 죽음으로.
권민재는….
나의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임해든의 탓을 할 수만은 없었다.
권민재의 죽음은 나의 탓도 있었다.
나의 ‘명’을 안다는 이유로 타인의 생사에 관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두 사람 다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했네….
“그나저나, 해든 씨가 이인자의 자리 때문에 욕심을 부린 건 조금 의외네. 군말 없이 내 편에 서준 것은 의심이 가긴 했지만…. 재훈이 그놈은 괜찮으려나.”
나는 잠시간 생각에 빠져들었다.
지금부터는 도은 씨와 영광 씨가 도움이 돼주었으면 하는데….
두 사람을 생각하며, 착잡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창술의 대가>가 자신의 후원자는 끝까지 남자답고 멋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항상 강해지길 바랐으니까요.”
[성좌, <창술의 대가>가 침울해합니다.]
“……”
해줄 말은 없었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창술의 대가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뿐.
많은 성좌가 인간들에게 카르마와 시드를 뽑아내기 위해 배후성이 되어 아등바등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모든 성좌가 그렇지 않듯, 창술의 대가의 말은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럴만한 성좌니까.
성좌들 중엔 인간을 아끼는 성좌도 많이 있었다.
“그럼….”
나는 곧 이어질 2차 침공에 대비하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 안이 씨.”
“민재 씨는 잘 묻어드렸습니까?”
“네. 미안합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제가 욕심을 부려 민재 씨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정은 대충 알겠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는 이유는 뭡니까?”
나는 궁금했다.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붙일 정도의 사내가 어째서 나의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지.
임해든은 모를 것이다.
내가 나의 ‘명’을 보고 움직인다는 것을.
그렇다면, 감추어도 될 문제인 것을….
“……이젠 안 그럴 겁니다. 나 혼자 산다고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죠.”
임해든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큰 힘이 되고 싶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세요.”
사람의 성장에는 크나큰 시련이 따른다고 했었다.
권민재가 죽고 임해든이 정신을 차린 것은 좋은 현상이었지만….
그 시련과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성장한다니.
“방법은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울 겁니다. 현 상황에서 침공을 대비해야 하는 문제가 있죠. 여러모로 해든 씨를 돕기 위해 병력을 빼낼 수는 없으니까요.”
“괜찮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임해든이 제대로 성장만 해 준다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상황.
나는 임해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미 ‘명’은 변했다.
그렇다는 건, 대략적인 정보를 가지고 나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여야 하는 게 맞았다.
“당신의 배후성은 ‘누런 오방의 왕’ 맞죠?”
“네. 맞습니다.”
“전 세계를 도셔야 할 겁니다.”
“네?”
앞뒤를 자르고 다짜고짜 전 세계를 돌라는 나의 말에 임해든의 표정이 한껏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누런 오방의 왕은 사방신인 백호, 주작, 현무, 청룡 위에 존재하는 황금빛의 용…. 그러니까 ‘황룡’입니다. 이와 관련된 게이트를 클리어하셔야 합니다.”
“그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네. 하지만, 말 그대로 황룡은 성좌 중에도 꽤 강한 급에 속합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더라도 신화 급의 게이트를 클리어해야겠죠. 최소한 다섯 번.”
“다섯 번이라….”
“혼자서 가능하시겠습니까?”
“해보겠습니다. 죽는다면, 전 거기까지인 사람인 것이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알려드리죠.”
임해든의 배후성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다.
단순히 그가 ‘황룡’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진명’마저도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게이트가 존재했고 임해든도 강해질 계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후성과 소통은 가능합니까?”
“네. 종종 말을 걸어오기는 합니다만, 허약한 애송이라며 무시하는 게 전붑니다.”
“아….”
성좌 놈들은 생각하는 게 다 똑같은가…?
“배후성과 대화를 해보고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찾아오세요. 쉽지 않은 길이 될 겁니다. 지금까지 중 가장 목숨을 많이 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각오는 됐습니다. 그럼.”
임해든의 두 눈에 깃든 각오는 진심이었다.
권민재를 잃은 것은 아깝고도 슬픈 일이었지만, 그에 따라 임해든이 잘 성장해준다면 나름대로 괜찮은 상황이었다.
물론, 권민재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후…. 어렵다. 어려워.”
* * *
조용히 시간은 흘러갔다.
폭풍전야와 같은 시간.
날씨와 무너진 건물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시선에 들어왔다.
지금 당장 느껴지는 건, 긴장감 뿐이었다.
“슬슬 오겠군.”
이계의 무림인들의 대표 ‘검마’가 다음으로 행할 움직임은 본래 2차 침공이었다.
그 때문에 준비가 되지 않은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지만….
지금은 달랐다.
‘명’을 바꾸어 임해든을 살리고 권민재가 죽었다.
‘검마’의 부하인 ‘황호’라는 무림인을 죽였기 때문에 ‘명’은 다른 방향으로 변했다.
나는 그 시간을 맞추어 그레이트 홀 앞에 섰다.
허전한 왼팔의 옷소매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햇빛을 받은 용광검이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2차 침공이 아니어도 오겠지.”
파앗!
긴장감이 흐르는 바람 속에서 나는 그레이트 홀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했던 나의 앞에 나타난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