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다시 한 번 도와주겠다는 노인의 말에 나는 그간 남은 자존심을 버리곤 말했다.
“어르신. 저는 어르신이 주신 금전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이 전에 한 말들은 모두 거짓이고 제 편의에 따라 있어 보이게 말한 것뿐입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가 필요하겠는가?”
“이미 연고도 없는 저를 한 번 도와주셨는데, 다시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노인의 말에 화색이 돌았다.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다는 기대감.
이 노인이라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그렇네. 하지만…. 이번에도 자네의 그 방탕함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생 지옥 같은 삶을 보낼 것이네.”
노인의 강단 있는 말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온전히 나의 탓이었다.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였다.
“어르신. 저는 그동안 삶을 방탕하게 잘못 즐겨, 이렇게 돈 한 푼 없게 되었습니다. 친척들이 호족임에도, 아무도 저를 돕거나 돌보아 주지 않았는데, 어르신께서는 두 번이나 저에게 큰 도움을 주셨으니, 어찌 이 은혜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진실성 있는 말에 노인은 크게 감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번에는 3,000만 냥을 주도록 하지. 하지만, 명심하게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야.”
“감사합니다. 어르신. 저는 이 돈으로 세상에 큰일을 하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이 입고 먹을 수 있게 하고, 나아가 나라에 보탬이 되겠습니다. 어르신의 깊은 은혜에 감화하여, 제가 말 한 일을 꼭 이루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허허허. 좋네. 더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노인은 나의 말을 기다리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일을 모두 이룬 뒤에는 어르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어르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해야 할 마지막 일입니다.”
“허허허. 좋네. 자네의 그 마지막 약속을 내 믿어보도록 하지. 마지막으로 자네가 일을 마치면 매년 오늘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이곳에 오도록 하게. 올해가 아니라면 내년. 내년이 아니라면, 내 후년. 자네를 기다리겠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노인은 인자하고 기분이 아주 좋은 듯,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내, 기필코 약속을 지키고 방탕함을 버리겠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노인의 도움은 마냥 주어진 공짜 돈이 아니었다.
나를 갱생시키려는 도인이 아닐까 생각만이 머릿속을 막연하게 맴돌았다.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방탕함을 모두 버리고 백성과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로.
시간이 흘러 가장 먼저 한 것은 기름진 밭을 샀고, 고아와 과부들이 살 수 있는 숙사 100여 칸을 설치했다. 모든 사람을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할 수는 없었지만, 방탕함을 모두 버려내고 베풀며 사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도박, 술, 여인. 돈을 펑펑 쓰던 못된 버릇.
이 모든 걸 고친 채 나를 위한 삶이 아닌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사니, 방탕할 때와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 다음…….
백성들을 돌보며 지낸 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고 틈틈이 무예 수련을 병행하던 나는, 나라에 큰 보탬이 되고자, 대장군을 목표로 걸어 나갔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대장군의 자리에 앉았다.
이 모든 것이. 나를 도와준 노인의 은혜였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뤄놓은 평판과 권력 덕분이었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닦아 놓은 길과 무예에 관해서는 희대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게 낳아주신 아버지.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노인의 도움.
이 모든 게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장군이 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많아졌다.
나라를 위해 싸웠고 막강한 권력과 부를 쥐었다.
그렇게 나의 부를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다.
나를 안 좋게 보는 시선들도 꽤 많았지만, 그것은 그저 견제일 뿐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 모든 것을 이루기엔 길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7년.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것을 최단기간에 이루어 낸 나는 더 이상 내가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왕의 자리를 노린다?
그 자리는 나의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욕심을 버린 채, 노인이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 생각이 났다.
모든 일을 마친 뒤. 매년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오라는 노인의 말.
“드디어 때가 왔구나. 행복한 7년이었다.”
노인이 어떤 것을 시킬 줄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동안 이뤄놓은 모든 권력을 내려놓았고 남은 재산은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 전과는 달랐지만, 같은 것은….아버지가 물려주신 이 몸뚱이 하나뿐.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경험했다.
나는….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돌아갔다.
노인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여정을 떠났다.
말을 타지 않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노인이 있는 곳으로.
* * *
몇 달간의 시간이 지나, 노인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달했다.
“이 장소는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무언가 감성이 돋아나는 날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방탕한 삶을 이어가던 나에게 도움을 준 노인과의 마지막 만남의 장소.
나는 천천히 노인과 만났던, 오래된 소나무의 아래로 걸어갔다.
그리고
저 멀리 사람의 형상과 함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노인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소나무가 있는 장소로 달려 나갔다.
“어르신!!!”
“허허허. 드디어 온 것인가? 내 자네를 기다렸네. 꼭 올 줄 알고 있었네.”
“어르신의 덕분에 제가 바란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사내대장부라면 자기가 한 말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전과는 다르게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군. 좋네.”
나는 노인에게 그동안의 일을 하나씩, 상세하게 전달했다.
“참으로 고생했네. 나는 자네가 꼭 해낼 줄 알았네.”
“인제 그만, 어르신의 함자와 정체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인에게 마지막 도움을 받으면서도 항상 궁금했고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
이 노인은 누구일까?
왜 나를 도와주는 것인가?
이 두 가지에 대한 답은 아직도 나오질 않았다.
“아직은 말해 줄 수 없네. 하지만, 자네가 나를 따라서 온다면 본능적으로 알게 될 것이야. 따라가겠는가?”
“물론입니다. 어르신을 따라감으로써 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해내겠습니다.”
노인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근방의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을 걷자, 이곳이 단순한 산이라는 느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에는 집이 엄숙하고 깨끗한 것이 보통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닌 듯했다.
오색구름이 아득하게 덮여있고, 놀란 학이 그 위를 날고 있었다.
그리고 정당 안에는 높이가 9척 정도 되는 약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자줏빛 불꽃이 빛을 발하여 창문을 비추고 있고, 그 약 화로를 여인 9명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그 여인들을 지키는 것은 살아생전 볼 수 없었던 동물들.
상상 속에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동물인 해태와 사불상이 앞뒤로 지키고 있었다.
그 시각은 해가 막 저물려 할 때였는데, 노인은 곧 자리를 비우더니 허름한 옷을 벗어 도포를 차려입고 황색 관을 입은 도사로 단장했다.
저벅, 저벅.
“오래 기다렸는가?”
“아닙니다. 이런 모습이셨군요.”
노인은 나에게 걸어와 하얀 돌 7알과 술 한 잔을 가져와 나에게 주었다.
“이것을 먹으면 되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랑이 가죽 하나를 가져다 뒷방의 서쪽 벽 아래에 깔고, 동쪽을 향해 앉았다.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되네. 혹, 존신, 악귀, 야차, 맹수, 지옥이 나타나거나 자네의 친족이 괴롭게 결박되고 온갖 고난을 겪더라도 이는 모두 진실이 아닌 허상이네. 그러니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말게. 차분히 있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한다면 결국에는 아무런 해도 없을 것이니, 오로지 내가 말한 것만 기억하고 있게나.”
노인의 말에 긴장감이 흘러들었다.
노인이 나에게 한 말의 의중을 알아차리려 눈을 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만으로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노인은 사라지고 눈앞에는 절벽과 골짜기가 보였으며, 나의 눈 앞에 물이 가득 채워진 큰 항아리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깃발과 무기를 든 천군만마가 절벽과 골짜기를 가득 채우며 큰 소리를 내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가운데 대장군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고, 모든 말과 사람들이 황금 갑옷을 입고 있어 반사된 빛이 다른 사람을 비추었다. 그리고 친위병 수백 명이 모두 칼을 쥐거나 활을 당기고서 곧장 나의 앞으로 도달해 말했다.
“너는 누구길래 감히 대장군의 앞을 막는 것이냐!!”
‘이들은 도대체 누구의 군대인 것이지…? 내 대장군 생활을 하면서도 본 적이 없는 군대인 것을…!’
굳게 다문 나의 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생각하고 눈알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병장기를 든 병사들은 조금 더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네놈의 성과 이름은 무엇이지?”
“……”
“너는 뭐 하는 놈이냐!”
“……”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앙다문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자 병사들은 크게 화를 내고 죽이겠다, 베어버리겠다, 쏴 버린다며 앞다투어 우레와 같은 소리로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아주 잠시였을 뿐이었다.
나는 노인이 한 말을 되새기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나를 향해 윽박지르던 병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장군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아 나의 눈앞에는 맹호, 독룡, 사예(사자와 비슷한 전설상의 맹수), 살모사, 전갈 등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동물들과 처음 보는 것들이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동물들은 으르렁거리며 나를 붙잡았고 금방이라도 깨물거나, 큰 아가리를 벌려도 보았으나 나는 대장군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내대장부. 이런 것에 질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동물들이 사라지자, 그 뒤를 이어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둥과 번개가 치며 어두워지더니, 불 수레가 그 좌우를 지나다녔는데, 번갯불이 앞뒤로 번쩍거려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마당가의 수심이 불어났고 번갯불이 흐르고 천둥소리가 울리니, 그 기세에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제지할 수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 자연에 맞선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 파도가 다다랐으나, 나는 여전히 단정하게 앉아 돌아보지 않았다.
‘이것들은 전부 허상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해를 가하진 않았다.’
한 차례 자연재해가 지나가자, 곧이어 한 장군이 소머리를 한 기괴한 동물과 끓는 물이 담긴 커다란 가마솥을 나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성인 남성도 그 가마솥 앞에서는 작아 보일 정도였다.
기괴한 소머리의 동물은 두 갈래로 갈라진 긴 창을 들고서 주위를 돌며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순순히 성과 이름을 말하면 풀어주겠으나, 말하지 않는다면 네놈의 심장을 꿰뚫어 가마솥 안에 넣어 버리겠다!!”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며 장군의 창이 나의 심장을 꿰뚫으려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스킬 [냉정 LV MAX]가 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