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최명규와 함께 나의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여러 번의 계절이 변했다.
나의 재산만을 사용해 한량 짓을 해왔기에 최명규는 자기 집안에서 크게 밉보이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몰래 가고 있었다.
그것을 모른 채, 최명규를 끌어들였다며 자만한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 계절이 지났다.
지나친 도박과 음주에 나에게 남은 재산은 거의 없었다.
최명규는 이때가 기회라 생각했는지, 나의 곁을 떠나 안보인지 한참이었고 나에게 남은 것은시중을 들던 하인, 복돌이뿐이었다.
“복돌아. 남은 식량은 얼마나 되느냐?”
“도련님. 재물은 다 팔아버렸고 남은 식량은 닷새 정도면 다 떨어질 겁니다….”
“하하….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만, 내 이리도 멍청했을 줄이야.”
“도련님….”
나는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거지?
너무나도 긴 시간을 놀고먹어서인지 이제 와 생각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복돌아. 인제 그만 내 너를 놓아줘야 할 것 같구나.”
“……?”
복돌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평생을 모신 도련님을 떠나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너에게 해준 것은 없지만, 이걸 가지고 가도록 하여라.”
나는 기방의 기녀를 꼬시기 위해 산 값비싼 비녀를 복돌이에게 쥐여 주었다.
“도련님…!!”
“아무 말 말거라. 조금, 쉬고 싶구나. 가 보거라.”
“……도련님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이 복돌이를 다시 찾아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평생을 함께해온 탓인지, 복돌이는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가거라!! 당장 가지 않는다면 내 너를 매질할 것이야.”
“……그럼. 꼭 다시 뵙겠습니다. 도련님.”
“그래. 잘 살거라.”
나름대로 상품의 옥비녀이니, 당분간 복돌이가 먹고 살아가는 것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것이 나를 평생 모신 복돌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렇게 복돌이를 보낸 지 닷새.
식량은 쌀 한 톨 남지 않았다.
“……곧 이 집도 빼앗기겠구나. 배가 고프군.”
빚을 지며 놀았던 탓인지, 쌓여가는 빛에 집은 빼앗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복돌이를 내보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가족, 하인, 집, 친구라 생각했던 최명규 모두를 떠나보낸 뒤, 나는 길거리를 노숙하는 신세가 되어있었다.
배고픔에 남의 논밭을 털다 매질을 당하기 일쑤였고 나를 알아보는 이들도 이제는 없었다.
지나치게 방탕한 생활이어서인지,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살아생전 인자하고 백성을 위했던 아버지였지만, 그런 아버지를 따랐던 사람들도 나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내가 어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는 친척들과 유학을 보낸 동생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맞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 그대로 내 쫓기기 바빴다.
“이 방법도 안 되는구나….”
그렇게 배고픔에 허덕이며 가족들에게 내쳐져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나와 비슷한 행색의 노숙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이보게, 젊은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에 고뇌가 가득한 것인가?”
“……”
말을 걸어오는 노인에게 할 말은 없었다.
이 노인 또한 나와 같은 노숙자.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돈이 필요해서 그런가?”
노인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다시 한 번 말을 걸어왔다.
“어찌 아셨습니까?”
나는 그런 노인의 모습에 콩고물이라도 조금 떨어질까 기대하며 노인을 향해 말했다.
“얼굴에 쓰여 있구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집요하게 말을 걸어오는 노인이어서인지,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노인에 말에 답했다. 그동안의 일과 어느 집안의 자식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잘못 한 부분들을 조금씩 덜어내어 재산을 탕진한 것까지.
“그런 일이 있었구먼.”
“네. 그래서 이런 처지가 되었군요.”
노인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 자네를 도와줌세. 얼마면 자네가 재기 할 수 있겠는가?”
“……? 참말이십니까?”
“그렇네. 말해 보게나.”
행색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먹을 것을 조금 나눠주는 정도겠지.
“금화 1만 냥이면 될 것 같습니다.”
뻔히 도와주지 않을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의 금액이면 장난질을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아니, 부족할 걸세. 솔직하게 말해 보게나.”
나의 말에 피식 웃은 노인의 모습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원하는 금액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담…. 5만 냥이면 될 듯합니다.”
“아니. 그것도 부족할 걸세.”
순간, 화가 났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와주겠다고 하는 노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렇담. 30만 냥이면 될 듯합니다.”
“흠…. 그것도 모자랄 걸세.”
계속해서 같은 말만을 반복하는 노인을 향해 ‘줄 수 있으면 줘봐.’라는 식으로 답했다.
“좋습니다. 도와주시겠다니, 거절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재기에 성공한다면 도와주신 것은 배고 갚도록 하지요.”
“알겠네. 편히 말해 보게나.”
“이 전과 같이 재기하려면 족히 300만 냥은 필요할 듯합니다.”
“흐음…. 좋네. 그 정도면 될 듯하구먼.”
노인은 그제야 나의 말을 인정하며 품에서 금전 한 꿰미를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지금은 가진 게 이 정도뿐이네. 내일 해가 뜨거든 이 장소에서 다시 보는 걸로 하지.”
노인이 금전을 건네며 이곳에서 다시 보자는 말에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인가 싶었다.
금전 300만 냥.
이 정도의 금전이면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지금 당장 300만 냥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이 노인의 기묘함과 나를 도와주는 모습에 정신을 차리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찌 나를 도와주는 것이지? 나의 이야기가 제법 기개가 있었나…?’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노인을 붙잡으려 했지만,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는 말과 함께 노인을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빨리도 사라졌네. 거참, 걸음하고는…. 그래도…!!”
기회였다.
다시 한 번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
나는 노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 * *
노인이 처음 건넨 금전으로도 오늘 하루 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가장 먼저, 배를 채웠고 근사한 도포를 구매해 입었다.
이제는 더 이상 거지꼴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재기에 성공한 황 대감의 첫째 아들 황인재였다.
“하하. 이 금전을 불려서 복돌이를 다시 데리고 와야 하겠군. 그놈 지금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배를 채우고 겉모습을 있어 보이게 꾸미니, ‘조금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 이 앞이 기방이군…. 그래, 오늘 하루는 괜찮겠지?”
나는 기방을 지나치지 못한 채, 몸이 빨려 들어가듯 그곳에 들어갔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맛보는 술맛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아름다운 기녀들을 보니, 이전의 씀씀이가 다시 되살아났다.
‘해가 뜨면 남은 300만 냥을 받을 것인데 뭐가 문제인가?’
나는 그렇게 노인에게 건네받은 금전을 이리저리 뿌리며 기분을 내었고 만족감에 휩싸여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겨우겨우 잠에서 깬 나는 헐레벌떡 채비해, 노인을 만난 장소로 이동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었지만, 노인이 정말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헉…. 헉….”
“조금, 늦었구먼. 안 오는 줄 알았네.”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볼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정말 오셨군요.”
기대감에 찬 나는 노인을 향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약속을 지켰으니, 약속대로 자네가 원하는 금전을 주겠네.”
무언가 수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내쳐졌기 때문에 찬밥 더운밥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금전을 건네받자, 노인은 별다른 말없이 자리를 떠나려 몸을 돌렸다.
“어르신. 이 은혜는 어찌 갚아야 할 줄 모르겠습니다. 내 꼭 보답을 할 터이니 어르신의 함자를 알려주시지요.”
나는 몸을 돌려 이동하려는 노인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노인은 손을 내 저으며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어제, 실컷 놀았으니, 지난날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수중에 큰돈이 들어오니 나는 값비싼 말을 구매하고 지낼 거처를 구매했다.
처음에는 이 돈을 어떻게 불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공짜나 다름없는 큰돈이 생기니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이전에 생활하던 방식대로 지내게 되었다.
놀고, 먹고, 마시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값비싼 말을 가장 먼저 팔아 자금을 마련했고 아직은 괜찮다는 생각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거지가 되어가는 나였다.
말과 집은 도로 되판 지 오래였고 나의 모습은 노인을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노숙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젠장. 개 버릇은 남 못 준다더니….”
후회가 드는 것도 잠시, 나는 남은 금전을 사용해 최명규의 위치를 확인했고 그를 찾아갔다.
탕탕.
“뉘시오?”
“최명규의 지인입니다.”
하인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나를 맞이했다.
최명규는 나와는 달리 관직에 올라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어가는 듯했다.
“뭐야? 이 거지는? 네가 우리 도련님의 지인이라고?”
하인은 나를 향해 다짜고짜 화를 내며 말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혼날 줄 알거라!!”
“정말이오. 황인재가 찾아왔다 하면 알아들을 것이오.”
나의 말에 어디선가 들은 이름이었다는 듯. 하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아니기만 해봐라. 넌 죽은 목숨이다. 이놈아. 기다려라!”
그렇게 기다리기를 수십여 분.
저 멀리서 아주 오래전에 봤던 최명규가 나를 향해 걸어 나왔다.
“아이고, 형님! 왜 이제야 찾아오는 것이오?”
“명규. 잘 지냈느냐?”
“그럼요. 전 관직에 올라 이전에 형님과 놀고먹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한 지 오랩니다!”
“그렇구나. 내 부탁이 있다. 명규야.”
“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재산을 전부 날리신 게 틀림없군요.”
최명규는 나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마치 내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걸 예상 했다는 듯.
“내 지금 상황이 조금 힘들어서 그런데…. 조금 도와줄 수 있겠느냐?”
“으하하하. 물론이오. 나의 형님이 아닙니까?”
“하하. 다행이구나…. 그럼….”
최명규는 나의 말을 자르며, 자신의 하인에게 말해 주먹밥을 하나 내왔다.
“형님. 이것이면 충분하오? 아니면…. 나의 하인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떻소? 내 이 주먹밥만큼은 하루에 하나씩 제공하리다.”
“……이놈이….”
텁.
최명규는 나를 비웃으며 주먹밥을 흙이 가득 한 바닥에 집어 던졌다.
“형님.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오? 어서 드셔보시오.”
계속되는 조롱에 화가 났지만, 지금 당장 최명규를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자존심을 버린 채, 바닥에 떨어진 주먹밥을 들고선 최명규를 한 번 쳐다보았다.
“……잘 먹고 잘살거라.”
“으하하하하. 잘 가시오. 형님!!”
당장 너무나도 배고 고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등을 돌려 나가는 나의 뒤에서 수군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고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나에겐 이렇다 할 방법도 없었다.
나는….
이전의 황인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흙이 묻은 주먹밥을 쥐고 한참을 걸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 앉았다.
“배가 고프니, 이런 것도 맛이 있구나. 내 신세가 어찌하다 이렇게….”
흙인지, 주먹밥인지 모를 것을 입에 욱여넣으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비참함에 통곡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먹밥을 다 먹어갈 때쯤이었다.
“이보게, 젊은이.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곳에서 흙 묻은 주먹밥을 먹고 있는 건가?”
노숙자 행색을 한 노인이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어… 르신…?”
“자네 같은 사람이 어찌 또 이런 상황이 되었는가? 참으로 이상하군…. 내 자네를 다시 돕고자 하는데. 이번에는 얼마면 되는가?”
이 전에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