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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성좌였다-69화 (69/206)

제69화

나와 차정우는 눈이 마주쳤다.

웃음도 없이 로봇 같던 차정우도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는지, 황당한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마치,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게이트 너머의 포진된 정령들.

수만의 정령들은 이그니와 아쿠아가 죽은 걸 알고 있다는 듯, 그 기운들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넘실거리고 있었다.

“너…. 자신 있냐? 난 없는데?”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됐는가?”

“이거 진짜 X신인가. 눈앞에 안 보여? 우리가 무슨 자살특공대냐?”

“……”

휙-!

차정우는 말없이 정령들을 살펴보더니, 인벤토리를 소환해 나에게 하나의 병을 던졌다.

“어? 이거 뭔데? 뒤지기 전에 차 한잔하자고?”

“엘릭서다.”

“엘릭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어떤 상처도 회복시키는 전설의 명약.

다만, 이 명약은 죽은 자를 살리지 못했고 이미 잘려 나간 나의 왼팔을 회복시킬 수 없었다.

그저…. 모든 HP와 MP를 회복시키고 쿨 타임마저 초기화 시키는 전투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최상품의 명약이었다.

그리고.

이 엘릭서는 ‘시드 스토어’에는 팔지 않는, 특수한 방법을 이용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아이템이었다. 나의 ‘명’에서도 언급만 있었을 뿐 이 아이템을 보는 것은 차정우가 건넨 엘릭서가 처음이었다.

“하…. 너 이런 걸 몇 병씩이나 들고 다니는 거냐? 이거 뭔…. 변태도 아니고 돈이 그렇게 많아?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몇 병씩이나 얻어서….”

“강해지려면 꼭 필요한 아이템이다. 지금 네놈의 강함이면 대정령은 눈 감고도 죽일 수 있겠지?”

“그렇지. 버프 중이니까.”

“좋다.

나에겐 오히려 좋은 상황이었다.

버프가 끝나기 전 정령왕을 만났더라면 차라리 가능성이 커지긴 했겠지만 엘릭서에는 쿨 타임 초기화라는 능력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이민영의 버프를 제외하고서도 다시 한 번 버프를 사용할 수 있었다.

“뭐, 간만에 레벨이나 올리지.”

“아니다.”

“뭐가?”

버프의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

차정우는 내가 강해진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나를 흘겨보며 자신의 하얀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가라. 길은 터주마. 나에겐 광역기가 있다.”

“나도 있는데?”

“……가라.”

믿어준다니, 좋은 상황이긴 했지만 길을 뚫고 간다고 해도 남은 두 마리의 대정령이 아닌 정령왕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혼자서는 힘들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정령왕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알았지.”

“표정만 봐도 알겠군.”

“그래? 하핫. 창피하네.”

잠시, 겁먹은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죽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너, 빨리 와라.”

나는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클리어한다면 나는 이 전보다 한층 강해져 미션들을 클리어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사는 곳을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게이트였다.

여차하면 엘릭서를 먹으면 되니까…. 괜찮겠지.

“알겠다. 네놈과 나의 강함이라면 정령왕도 괜찮을 것이다. 나 또한 비장의 수가 있으니.”

“그런 거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야. 내가 적이면 어쩌려고.”

“네놈은 나보다 약하다. 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재수 없는 새끼.”

“가라.”

차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자신의 망토를 펄럭이며 차정우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척.

자신의 하얀 검을 높이 든 차정우는 나를 향해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휙 돌리곤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왜 저래?”

“……인류의 시조여 답하라. 나는 불려간 자. 성검, 아르담이여 개방하라.”

”풉.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콰지지직.

파앗!

차정우가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자, 하얀 검은 조금 더 거대하고 길어져 더욱 화려한 형상이 되었다.

아름다웠다.

저게 검이라고?

하얗고 긴 차정우의 성검을 보니, 아주 조금…. 부러웠다.

나의 검, 용광검은 최종 성장한다면 ‘신기’에 가까운 강함을 지닌 검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4단계인 용괌검은 저 정도로 성장하려면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뿐이었다.

“근데, 스킬 사용할 때도 막, 주문 외우고 그러냐…?”

“아니다.”

“큭큭큭. 알겠어. 너 얼굴 빨개졌다. 그럼, 먼저 간다.”

자신도 이런 주문을 외우는 게 창피했는지, 귀까지 빨개진 차정우였다.

차정우는 개방한 자신의 성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콰드드드득!!!

쿠콰콰쾅!!!

대정령 이하의 정령들은 나와 차정우의 상대가 되질 않는다고는 하나, 그야말로 대학살이었다. 차정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소멸한 정령들로 인해 여러 가지 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아름다워 보였다.

차정우는 버프를 사용한 나만큼이나 강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이민영의 버프까지 받은 내가 더 강하겠지만 차정우 또한 비장의 수가 있다는 것.

결코 내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이네. 같은 편이라서.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차정우의 강함을 넋 놓고 보던 나는 스킬, 초속 비행을 사용해 정령들이 포진한 중앙을 뚫고 남은 두 마리의 대정령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차정우 덕분에 간단한 스킬조차 사용하지 않고 편안하게 대정령에게 도달한 것은 고작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초속 비행의 속도가 빠른 것도 있었지만, 무지막지한 차정우의 공격들이 대정령과 정령왕에게 가는 길을 일직선으로 뚫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괴물 같은 새끼네. 저거….”

대정령에게 도달 한 나는 차정우를 힐끗 쳐다보곤, 버프의 시간을 체크했다.

남은 시간은 8분 정도.

[드디어 이곳에 도달한 것인가?]

[그 인간이 맞는 거 같군. 멍청한 이그니와 아쿠아 같으니….]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두 마리의 대정령.

“그러니까, 나도 좀 알려주지, 그래?”

[알 것 없다. 네놈은 그저, 네놈의 사명대로 나아가면 될 뿐.]

[그렇다. 강함을 시험해보도록 하지. 정령왕이 기다리신다.]

“그것참, 간단하고 좋네. 내가 또 시험 문제는 잘 찍거든.”

대화를 끝마치자, 두 마리의 대정령은 정령화를 사용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저 정도 강함은 나의 칼질 한 방에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다.

후웅!!

촤악-!!

“일단은 한 놈….”

잡몹처리하듯 한 방에 대정령 한 마리를 죽이자, 남은 한 마리의 대정령이 당황한 듯 나를 흘겨보았다.

스스스.

뒤이어 대정령이 사용한 것은 인간화.

싸움을 포기라도 한 것인지, 인간화로 변한 대정령은 초록색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잘생긴 외모의 남성으로 변했다.

“뭔데? 인간화를 하면 오히려 힘의 제약이 생기는 거 아닌가?”

[그렇다.]

“항복?”

아무래도 상상 이상의 강함에 난처해 보이는 대정령이었다.

[……정령왕께 데려가도록 하마. 시험은 끝났다. 네놈과 저기 날뛰는 놈 둘 다.]

“쫀 거 맞는 거 같은데?”

[……모두 그만!]

인간화를 한 대정령은 나의 말을 무시한 채, 한참 전투 중인 정령들을 불러들였다.

아직도 그 수가 수만은 남아있어 차정우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정령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령들이 자리를 비워내자, 무언가 눈치를 챈 차정우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후대의 용사여, 그리고…. 네놈은 나를 따라오도록.]

“왜 쟨 멋있게 용사여. 이러고 나한텐 네놈이래? 뒤지고 싶은 거니?”

[……]

아무리 봐도 저 모습은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나 같아도 그럴 것이다.

두 가지 버프를 중첩해 올 스탯에 가까운 능력치.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단 한방으로 대정령을 죽일 수 있는 강함.

자연재해가 괜히 자연재해인가?

생명체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힘. 그것이 자연재해였다.

그들의 관점에서 나와 차정우의 존재는 그야말로 자연재해와 같을 것이다.

“가지.”

“그래. 뭐, 부른다는데.”

인간화를 한 대정령이 몸을 돌려 거대한 건물로 몸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신전? 같은 웅장함을 지닌 이곳은 전설 속에서나 보일법한 웅장함을 지니고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멸망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보지 못할 장소였다.

“곤륜산에 이어서 이곳을 보니, 새삼…. 내가 사는 세상이 변했다는 게 진짜구나 싶네.”

“그걸 이제 알았나? 적응력이 느리군.”

“미안한데, 너한테 들을 소린 아닌 거 같다.”

감정이 메마른 새끼.

* * *

[이곳이다.]

대정령의 이끌림에 따라간 장소는 천존의 방과 흡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형태의 방이었다.

장식 같은 것이 일절 없는 이 장소는 흡사, 만화에서만 보던 모든 게 하얀 방이 생각이 났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숨이 턱 막혀 왔다.

“넌 안 답답하냐?”

“답답하다.”

“그래…. 말 걸어서 미안하다.”

정령왕의 방에 도달한 나와 차정우는 주변을 살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대정령은 자신의 할 일은 마쳤다는 듯,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기다리기를 수 분.

차정우는 말이 없었다.

자신이 이세계로 불려간 뒤, 자신이 살던 세계에 관한 질문이라도 할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그런 차정우의 모습에 사연이 있겠거니,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내가 모르는 그 이세계라는 곳이.

“거긴, 네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이냐?”

“사람 사는 곳이다. 네놈이 사는 곳과 다르지 않지.”

“대답을 해주니, 되게 황송하네.”

“비꼰다면 더 이상 대답은 하지 않겠다.”

“죄송합니다.”

정령왕이 오고 전투가 벌어질지, 상황이 종료될지는 나를 포함해 차정우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해서,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차정우를 이대로 보낸다면 나는 앞으로도 이세계의 정보를 얻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사람은 여기도 살고 있어. 어떤 곳인데?”

“검과 마법의 세계. 이종족이 가득한 신비로운 곳이다.”

“하…. 존재했다고?”

“그렇다.”

차정우는 덤덤히 나의 말에 대답했다.

“어떻게 간 건데?”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다. 싱크홀…. 그곳에 빨려 들어간 후 눈을 떠보니, 이세계더군.”

“싱크홀…?”

싱크홀이란, 본래 땅속에 지하수가 흘러 형성된 빈 공간이 주저앉아 발생하는 커다란 웅덩이를 말했다.

생기는 싱크홀마다 그 크기는 달랐지만…. 그 깊이는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싱크홀이 이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내 생각엔 그렇다. 다른 문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군.”

“아…. 들어본 적은 있어. 곧 모든 세계의 입구와 출구가 열린다지?”

“그렇다. 네놈은 모르는 게, 너무 많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지?”

“그럴 수도 있지 인마.”

차정우의 말에 기가 찼다.

싱크홀은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그 싱크홀이 이세계로 통하는 길이라니.

“그래서, 그 길이는?”

“알 수 없다. 꽤 오랜 시간을 떨어졌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뒤 눈을 떴지.”

“하…. 말이 되는 소리냐…?”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궁금해 보여 대답을 해준 것일 뿐.”

차정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바다에 생기는 블루홀도 무언가 있을 거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내 관심 밖이었다.

“그럼…. 너 이쪽 세계에 궁금한 건 없냐? 가족이라던가.”

“다 죽었다.”

“한 명도 남김없이?”

“아니…. 한 사람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보고 싶겠다.”

“이젠, 조금은 흐릿흐릿한 기억일 뿐이다. 이미 죽었을 수도.”

차정우의 표정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보고 싶은 한 사람. 그게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차정우는 입을 열다가도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며 말을 잇지 않았다.

“이 앞의 상황이 전투일지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 찾을 수 있게 도와주마. 엘릭서 값이라고 해두지 뭐.”

“……”

말이 없는 차정우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싱크홀’로 이세계로 불려간 자.

그 속에서 용사라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계처럼 싸우고 살아남기를 반복한 자.

말로는 쉬워 보일 수 있지만, 더없이 큰 고독을 느끼는 중일 것이다.

“아, 네 부하는?”

“내가 떨어질 때,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이유로 같이 오게 됐다.”

“그놈 참, 재수 옴 붙었네.”

“나에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자다. 혹여 죽일 생각을 한다면, 내가 네놈을 죽일 것이다.“

“뭔…. 갑자기 급발진이야?”

차정우가 자기 부하를 아끼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자신 혼자만 이세계로 불려가야 할 상황에 우연찮은 계기로 같이 가게 된 사람.

그 사람이 대장이라 부르며 자신을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의 짐작일 뿐이지만, 의지할 곳 없는 그 세계에서 차정우에게 친구 같은 존재일 게 분명했다.

“죽일 생각 없으니 걱정 말….”

나의 말을 끝마치기 전이었다.

갑작스레 엄청난 고통과 함께 귀에서 엄청난 이명이 들리더니, 곧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환한 빛이 나와 차정우를 감쌌다.

화악!

“큭….”

“뭐….”

[그대들인가요?]

”뭐….“

점차 빛은 적응되어 눈앞의 시야를 다시 밝혀냈다.

그리고

화안금정을 사용 중인 나에겐 눈앞에 이 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정령왕.

눈앞에는 ‘정령왕’은 인간화를 사용한 모습으로 나와 차정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정령왕, ‘실리아나’. 내부와 외부에서 온 두 인간이여, 반갑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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