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이재신이 사용한 성흔의 뜻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로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라는 뜻이었다.
역사급 성좌 중에도 그 강함이 <안락국>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강한 성좌인 이순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순신의 최후의 전장 노량.
죽어서도 투입된 일본군을 사실상 전멸에 빠트린 거북선이 짙은 마력의 형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젠장…. 지상인데…?”
당황스러웠다. 바다도 아닌, 지상에서 마력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거북선이라니.
그것도 한 척이 아닌, 세 척이.
현재 상황이야 지칠 대로 지친 이재신이였기 때문에 세 척이 한계였지만, 정상적인 컨디션에 동조화와 성좌, ‘이순신’ 본인의 카르마를 사용했다면, 나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후….
생각보다 힘들어진 전투에 땅이 꺼지라고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젠…. 자네가 받아 볼 차례네.”
이재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끌고 마력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거북선에 승선했다.
그리고.
세 척의 거대한 거북선의 중앙에 선 이재신이 쌍룡검 한 자루를 나를 향해 뻗으며 외쳤다.
“후손, 이재신. 충무공의 힘을 받아 이 전장에서 기필코 승리하겠습니다.”
[성좌, ‘무패의 해신’이 전장을 바라봅니다.]
이재신이 올라탄 짙푸른 형상을 한 거북선의 위용은 엄청났다.
단 세 척임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분위기는 이재신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본래 이순신은 해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해상전에서 무패의 승률을 자랑했지만, 해상전뿐 아니라 지상전에서도 이순신은 강하다고 전해져 왔다.
게다가 지상에서 저런 거북선을 세 척이나 소환한 것이니… 지금 이곳이 이재신에게는 해상이나 다름없을 테다…….
이미 버프 시간을 모두 소모한 나였기에,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은 힘들었다.
버프의 재사용 시간은 6시간.
시간을 끌어 봐야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쩐다…?
나에게 방법은 두 가지였다.
지칠 대로 지친 이재신의 몰락을 기다리거나, 이재신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성흔의 발동을 취소시키는 것.
하지만 이미 첫 번째 방법은 소용이 없어졌다.
저 멀리 중앙에 있는 거북선에 승선한 이재신이 무언가를 들이켜고 있었다.
풀포션.
풀포션은 현재 상황에서 시드 벌이가 충분치 않은 우리들에게 거금의 포션이었지만, 이재신은 정말로 지기 싫다는 듯 포션을 들이켰다. 그리고…. 나는 너덜너덜했던 이재신이 멀쩡해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풀포션…? 젠장, 조진 거 같은데…. 어쩌지?”
이재신은 성흔을 사용함으로써 대부분의 마력을 소모했다지만, 버프 시간이 끝난 현재의 나로서는 거북선 세 척의 포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풀포션을 들이켠 이재신의 체력은 현재 전부 회복이 된 상태였다.
“안 오는가? 그럼, 이번엔 내가 먼저 공격하겠네.”
풀포션을 들이키고 체력을 풀로 회복한 이재신이 높이 든 쌍룡검 한 자루를 아래로 내리그으며 외쳤다.
“포격하라!!!!”
성흔을 사용한 이재신이 만든 거북선은 곧 이재신 그 자체였다.
이재신만 전투 불능으로 만들게 되면 거북선의 포격은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쿠콰쾅!!!!
세 척의 거북선은 오롯이 나 한 사람을 향해 포격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위험…!!!”
버프 시간은 끝났지만, 다행히도 화안금정으로 공격의 궤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휘릭.
스겅- 쾅!!
“헉…. 허억…. 끝이 없네…!!”
대놓고 나를 향해 날아오는 마력 포탄은 피하거나 태극검을 사용해 방어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왼쪽 팔이 없는 탓에 점점 내가 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형님!!!”
“대왕마마!!”
내가 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권민재와 안재훈 두 사람이 다급하게 나를 불러대고 있었다.
쾅!! 쾅!!
계속되는 포화 속에서 공격을 피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퍽! 펑!!!
“크…….”
버프도 없거니, 화안금정과 태극검 만을 사용하는 것도 한계였다.
그렇다면, 공중은…?
쾅!!!!
“커 헉…”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초속 비행을 사용해 공중으로 회피했으나, 거북선 세 척은 이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공중에 뜬 나를 무차별적으로 포격했다.
“헉…. 헉…. 허억….”
체력이 바닥을 치는 상황 속에 이재신이 말을 걸어왔다.
“허허허. 이만하는 게 어떤가? 이대로 죽이기엔 아까운 인재 같은데.”
“벌써, 이길 생각부터 하는 겁니까?”
“자네는 강하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 자네가 이길 확률이 희박하다는 건 알지 않는가?”
“그렇죠….”
거리가 꽤 있었지만, 말을 걸어오는 이재신의 표정이 화안금정을 통해 보였다.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저 아저씨가 의기양양해져서는…. 젠장.
[스킬 [냉정 LV MAX]가 발동합니다.]
아…!?
잠시 대화를 위해 포격을 멈춘 이재신을 바라보다, 스킬 냉정의 덕분인지 문뜩 한 가지 방법이 생각이 났다.
나에겐 상황을 역전 시킬 기상천외한 스킬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명’을 볼 수 있었고, 3일에 한 번씩 갱신할 수 있었던 ‘명’을 아직 갱신하지 않았다.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보게. 자네가 포기하지 않겠다면, 나는 자네를 죽일 수밖에 없네. 계속할 텐가?”
“……잠시 기다려 보세요. 원래 변신할 때는 건드는 거 아닙니다.”
“그게 무슨…?”
이런 상황에 농담이라도 하는 듯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자, 이재신의 표정에 의아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 전투가 끝나고 사용할 예정이었던 나의 ‘명’을 갱신했다.
[당신의 ‘명’이 재각인됩니다.]
[새로운 ‘명’의 재각인 시간은 ‘알 수 없음’입니다.]
처음 갱신 시간이 3일이었기에,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했던 나였지만 시스템의 메시지로 금방 깨달았다.
이 사기 스킬은 무한정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촤르르륵-
머릿속에서 필름이 지나가듯 새로운 상황들이 내 기억을 헤집었다.
솔직한 말로, ‘명’을 본다고 해서 이 전투에서 이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변한 ‘명’에서의 난 이 전투에서 살아남는지, 혹은 운 좋게 이길 방법을 찾을지를 보기 위해 갱신한 것뿐이었다.
당장 급한 것은 현재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명’에서의 다른 내용은 지금 당장은 관심이 없었다.
이런 방법이…?
방법이 조금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뀐 ‘명’에서 봤듯,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죽을 정도로 핀치에 몰려야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명’을 보지 않았더라도 나는 핀치에 몰려 ‘명’에서의 상황이 발생했을 거라는 의미였다.
이미 ‘명’을 본 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발생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봐, 아저씨?”
“……? 준비는 끝났는가?”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저 아저씨 성격으로 봐서는 어쩔 수 없지. 이미 ‘명’을 봐 버렸으니.
전설의 헤비급 복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단, 처맞기 전까지는.
내 그럴싸한 계획은 처맞아야만 가능한 계획이었다.
기사회생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이재신은 착한 사람이었다.
나를 좋게 봐주어 지금까지 포격하지 않고 기다려 준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재신이 계속해서 나를 봐준다면 내가 핀치에 몰리지 않고 어영부영 끝날 것 같았기에 다소 거칠지만 확실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이미 갱신된 ‘명’을 보았기에 온전하게 한국의 ‘왕’을 차지하려면, 이번 전투만큼은 이대로 흘러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그래 가지고 무슨 한국의 ‘왕’이 되겠어?”
“……?”
“아니, 그렇잖아. 나 하나 제대로 못 이겨서 수명이나 단축하고, 충무공에게 카르마나 쓰게 하고 말이야.”
“뭐라고…?”
갑작스러운 시비에 이재신의 표정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이재신을 자극했다.
“그래서 딸이나 제대로 지키겠어?”
“이놈이…!!!”
조금만 더.
“그딴 어영부영한 마음으로 아내는 이미 죽고, 하나 남은 딸이나 제대로 지킬 수 있겠냐고.”
“개…. 우라질 놈이…!!!”
이재신이 이토록 간절하게 승리를 바라는 이유는 나의 ‘명’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자신의 아내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과 하나 남은 자신의 딸 아이를 보다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서 이토록 무리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쁜 놈이면 어쩌게? 한국의 ‘왕’이 되면 <왕의 권능> 쓸 수 있는 거 몰라?”
“이 새끼가…!!! 좋은 놈인 줄 알고 봐주려 했더니, 안 되겠군….”
“개소리는 달나라 가서 하시고. 누가 누굴 봐줬다는 거야?”
“하하하하하. 궁지에 몰리니 본성이 나오는구나!!! 그래 좋다! 후회하지 말아라.”
“아이고? 후회는 딸 죽고 나서 아저씨가 하겠지. 안 그래?”
“…….”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일그러졌다.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찬 이재신은 말이 없었다.
[성좌, <재미로 삶을 반복하는 자>가 자살하는 새로운 방법이냐 물어봅니다.]
[성좌, <재미로 삶을 반복하는 자>가 주둥아리 술을 자살하기 위해 쓰는 것이냐 물어봅니다.]
.
.
.
아무래도 나의 계획을 몰랐던 배후성이 걱정이 되었는지, 폭탄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만해요…. 이 정도면 스팸이야….”
[성좌, <재미로 삶을 반복하는 자>가 자신의 후원자가 정신을 차리길 바랍니다.]
[성좌, <당나라의 고승>이 고개를 푹 숙이며, 제자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폭탄 메시지를 보내는 성좌들을 무시한 채, 초속 비행을 사용해 이재신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본, 이재신이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쌍룡검 한 자루를 치켜들며 말했다.
“포격하라!!!”
이재신이 외치자, 거북선 세 척의 포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랐다.
처음 사용했을 때는 내가 항복하길 기다리며 봐주었다면, 두 번째 포격은 진심으로 나를 죽이기 위한 포격이었다.
꽝!!!
쿠콰콰쾅!!!!
날아오는 마력 포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하…. 가차 없네. 이 아저씨. 하긴, 딸을 들먹였는데…….”
나는 적당히 공격을 피해 가며, 간간이 포탄에 한 발씩 맞아 주고 있었다.
“크윽…!!”
양측 모두에게 연기하기 위함이었다.
이재신에게는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함이었고, 권민재와 아이들에게는 ‘명’에서의 상황을 유발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헉…. 허억…. 뒤지게 아프네… 커 헉….”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재신만 무력화할 수 있을까 싶어 접근도 해 보았지만, 거북선의 마력 포탄의 기세가 엄청났기에 역시나 실패였다.
“끈질기구나!!”
“하…. 하하…. 내가 좀…!”
“이제 내가 한국의 왕이다!! 죽어라!!”
“거참, 말 살벌하게 하시네.”
그리고 이재신이 최후의 타격을 위해 나를 향해 포격을 날려 댔다.
쾅쾅!!!
쿠콰콰쾅!!!
나에게 날아오는 마력 포탄을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아준 뒤 죽어 가는 척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기사회생을 아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커…. 허억…. 이럴 수가….”
“처음부터 항복했으면 좋지 않았는가!?”
“젠장……. 이렇게 죽는 건가…?”
“자네가 죽으면, 자네 부하들은 살려 주도록 하지.”
나의 발연기에도 이재신이 승리를 장담한 듯 물었다.
와라. 와라. 지금이다! 재훈아…!!!
시원하게 처맞은 나는 온몸에 피를 흘리며, 속으로 외쳤다.
나의 간절한 속마음을 듣기라도 했는지, ‘명’에서 봤던 것처럼 안재훈이 흥분한 채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개자식아!!! 우리 대왕마마 죽이지 말라고!!!”
“재훈아…!!!”
권민재가 급하게 손을 뻗어 안재훈을 말리려 했지만, 갑작스레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안재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짜식. 어른한테 싸가지는 없지만, 감동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