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아주 잠시 마주쳤지만, 용사는 나를 기억했다.
“맞습니다.”
“왜…. 안 도와준 거지? 네놈이 조금만 도와줬어도 우리는…. 퀘이사는 살 수 있었다.”
“…….”
카인의 말에 이들을 두고 도망친 나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는…. 죄책감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스킬 [냉정 LV.2] 효과가 강하게 발동됩니다.]
아…. 본래, 이런 스킬이었지.
스킬의 발동과 함께 죄책감보다는 현재 상황에 맞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이 스킬이 나에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난…. 나는… 이곳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렇게 하면 퀘이사와 동료들은 외롭지 않겠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당신의 그 선택을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겁니다.”
“네깟놈이 뭘 아는 거지?”
용사의 말 그대로였다.
나는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나의 ‘명’일 뿐.
다른 사람의 ‘명’은 알지 못했다.
고작 C급의 이세계.
그 속의 용사.
카인의 이야기는 나의 명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이 게이트가 클리어되면 용사의 영혼 속에 각인되는 기억.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용사 본인도 알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후회하겠지.
그리고 게이트가 다시 생겨날 때까지 그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겠지.
“후회할 겁니다. 분명히.”
“닥쳐라!!! 후회는 이미 충분히 했다!!”
이야기로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용광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혼자 상대하기에는 용사의 기운 자체가 나보다 강하다는 게 느껴졌다.
“용사다!!!”
“흑화한 것 같은데?”
“지금 조지면 클리어야!!!”
내 주변에는 어느새 현계인을 포함한 모험가들이 용사를 포진하고 있었다.
챙-!!!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나였다.
누군가 스타트를 해야지만, 전투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촤륵.
태극검을 사용해 성검을 사용한 용사의 공격을 흘려냈다.
성검은 마물들이나 마왕에게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냈지만, 인간들에겐 그렇지 못했다.
인간들에게는 그저, 성능 좋은 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법인데? 할 만하겠어!!”
“다들 덤벼!!”
나와 용사의 격차는 컸다. 하지만 몇 합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더니 현계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후웅!!!
콰르릉!!! 쾅!!
온갖 마법과 화살들이 용사에게 쏟아졌다.
“크흑…!”
카인의 몸에 데미지는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나는 곧 앞으로 나가 [무쌍 난무 LV.1]을 사용해 용사의 갑옷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컥…. 커 헉…!”
반응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으아아아아아!!!!!!”
엄청난 소리와 함께 용사의 울부짖음이 커지자, 검은 아우라가 품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 크아아악…!!!”
용사의 눈이 흰자위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흡사 누군가에게 당하는 듯했고, 곧 의식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죽… 죽여 버리겠다…. 전부….”
의식이 있을 때 처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스악!!!
나는 [질주 LV.1]을 사용해 빠른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 추진력을 이용해 강하게 용사를 베어 냈다.
하지만…. 변하기 시작한 용사에게 내 공격은 먹혀들지 않았다.
촤악!
“커… 헉….”
오히려 용사의 검에 베인 것은 내가 되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해 냈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공격력의 상승이 엄청났다.
아무래도…. 저 검은 아우라가 이유인 것 같았다.
“헉…. 허억…. 뒤질 뻔했네.”
[성좌, <재미로 삶을 반복하는 자>가 조금 더 힘을 써 보라 말합니다.]
[성좌, <당나라의 고승>이 불쌍한 중생을 바라보며 염불을 외웁니다.]
[성좌, <사계절을 사랑하는 선녀>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사계절을 사랑하는 선녀…?
갑작스레 등장한 새로운 성좌가 궁금하긴 했지만, 다시 전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용사 카인에게 베인 상처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직은 버틸 만해. 조심해야겠어.
용사의 검은 아우라가 점점 강해졌다.
곧 용사가 발산한 검은 아우라는 용사의 몸과 성검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스아아악-
“…….”
용사의 의식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말도 안 되는 강함의 상승.
흑화를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강함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서 얻어선 안 되는 힘을 얻은 것 같았다.
점점 더 강해지는 용사 카인의 강함에 긴장감이 흘렀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나의 본능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불안함을 느낀 나는 용사와 거리를 두었다.
내가 거리를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현계인과 모험가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막타는 내 거다!!!!”
“기여도 1위는 내 거야. 다 비켜!!”
“용사를 죽여라!!!”
엄청난 숫자였음에도 용사는 그저 자신의 검기를 사용해 묵묵히 베어 나갈 뿐이었다.
스걱.
스각.
강했다.
사람들이 종잇장 찢어지듯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스킬 [냉정 LV.2] 효과가 강하게 발동됩니다.]
곧바로 움직이려 했던 나였지만, 스킬 냉정의 효과에 그대로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저 용사를 죽일 방법.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사람들을 죽여 나가는 저 용사를 죽일 방법.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한들 없는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저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날려져 오는 용사의 검기를 회피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후웅-!!
“그만하고 뒤져라. 좀!!”
태극검을 사용해 용사의 공격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한들 나의 태극검은 LV.1이었다.
흘려내는 것이 한계였다.
“안이 씨!! 제가 도울게요!!”
“아저씨 죽지 마요…!!”
후방에 빠져 있으라고 했던 김영광과 임아린이 어느새 근처에 와 있었다.
“……!?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임아린에게 이 전투는 위험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죽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아저씨 미안해요. 제가 계속 가 보자고….”
후방에 있던 김영광이 임아린을 데리고 온 것은 어쩔 수 없던 선택인 것 같았다.
이해는 했지만…. 이런 위험한 상황에 이들을 반길 수 없었다.
“아린이를 데리고 물러서세요…!!”
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김도은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안이 씨 기회는 한 번. 빈틈은 제가 만들게요.”
“도은 씨가 어떻게…?”
“저 무시하지 마세요. 제법 강해졌으니까.”
공격을 흘리는 것도 한계에 다다라 잠시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김영광이 앞으로 나서 용사를 막기 시작했다.
“크하악…!!! 얼마 못 버팁니다…!!!”
“영광 씨…!!”
콰르릉!!!! 쿠콰쾅!!!
이어지는 임아린의 번개 마법이었다.
그리고.
츠아아앗-!!!!
어디선가 신비한 기운이 모이고 있었다.
어찌나 신비한지, 나도 모르게 그 방향을 쳐다봤다.
“도은… 씨?”
김도은이 활시위를 끌어당겨 화살촉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같이 행동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공격이었다.
[성좌, <달과 순결의 상징>이 자신의 후원자를 지켜보라 말합니다.]
“……?”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날리게 되면 용사를 처치할 방법이 없다는 것만큼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용광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김영광을 도우려고 움직이려던 때였다.
“영광 씨, 지금!!!”
저 멀리서 김도은의 외침과 동시에, 김영광이 용사의 공격을 회피해 옆으로 굴렀다.
후웅-!
쿠콰콰콰쾅!!!!!!
“크… 크하악….”
엄청난 공격에 당해, 검을 놓치고 쓰려지려는 용사 카인에게 달려들었다.
스악!
나는 김도은이 준 기회를 살려, 망설임 없이 용사 카인을 베어 냈다.
“주… 죽여 줘서…. 고맙다….”
용사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희미함.
용사 카인의 마지막 말은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동료들에게 보내 줘서 고맙다는 것이었을까?
자신의 흑화를 막아 준 것이 고맙다는 것이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죽어 가는 용사를 보며, 미안함이 커지기만 했다.
그리고….
용사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시스템 알림이 뜨기 시작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게이트가 클리어되었습니다.]
[기여도를 발표합니다.]
[1.이안 / 2. 김도은 / 3. 김영광 / 4…….]
[기여도 1위의 보상으로 스킬 [용사의 패기 LV.1]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명 : 용사의 패기 LV.1
스킬 설명 : 이세계의 용사가 사용하던 스킬로 강한 기합과 함께 자신의 모든 능력치를 30% 상승 시킬 수 있다.
# LV이 상승할수록 버프의 효율과 시간이 높아 진다.
[게이트가 10분 뒤에 사라집니다.]
“하…. 도은 씨 아니었으면 못 잡았을 겁니다.”
[성좌, <재미로 삶을 반복하는 자>가 거저먹었다고 말합니다.]
[성좌, <당나라의 고승>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사계절을 사랑하는 선녀>가 동의합니다.]
[성좌, <달과 순결의 상징>이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막타는 언제나 중요한 법이죠.”
알 수 없는 힘을 받아들인 용사 카인의 강함은 생각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알 수 없었던 것은 김도은의 공격이었다.
“허억…. 헉….”
“괜찮아요?”
“아니요…. 허억….”
알 것 같았다.
김도은이 사용한 힘의 정체. 그것은 ‘성흔’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스킬을 사용해도 이 정도까지 쉽게 지치는 스킬은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 이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내며, 김도은의 기력을 모두 앗아갈 수 있는 스킬은 단 한 가지였다.
배후성의 ‘성흔’.
그렇다는 건….
김도은은 자신을 후원해 주는 성좌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도은 씨 누워 계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네…. 잠시만….”
현재 상황에서의 성흔 사용은 몸에 엄청난 무리를 가져온다.
능력치의 합도 낮았고, 레벨도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한 김도은이 무리를 한 것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되겠어…….
우연히 막타를 치게 된 것이지 이번 전투에서 내가 한 것이라곤 공격을 몇 번 흘려낸 것뿐이었다.
나는 약했다.
너무나도 약했다.
별다른 활약 없이 막타만으로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생각에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강함에 대한 욕구.
내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의 ‘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져야만 했다.
“아린아, 괜찮아?”
“네! 아저씨가 지켜 줬어여.”
“영광 씨는요?”
“저야 뭐, 항상 튼튼합니다. 하하….”
말로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용사의 공격에 상처투성이인 김영광을 보자, 나의 욕심을 더 커져 가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사라집니다. 게이트 내에 모든 인원이 현계로 전이됩니다.]
파앗!!!
심란한 마음을 뒤로한 채, 현계로 전이된 나는 일행들을 살폈다.
두 번째 미션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57시간 정도였다.
이틀이 조금 넘게 남은 걸 확인한 나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다들, 조금 쉬세요. 이건 몸 안에 수분과 허기를 채워 줄 겁니다.”
휴식이 필요했기에 시드 스토어를 사용해 에너지 바와 에너지 드링크를 구매해 일행들에게 나눠 줬다.
“으웩…. 아저씨 전 안 먹을래여…. 맛없어.”
“……안이 씨, 이거…. 일주일 안 빤 양말은 씹은 듯한 기분이네요.”
“양말을 씹어보셨습니까?”
“우웩….”
“먹어야 합니다. 힘내려면.”
에너지 바와 에너지 드링크의 효과는 매우 좋았지만, 맛이 문제였다.
효율을 극대화시켜서인지 맛은 정말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억지로라도 드세요. 그래야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특히 도은 씨.”
“……안 먹고 안 움직이면 안 될까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남기고 온 킹크랩이 생각나네요…. 으웩….”
같은 생각이었다.
반 강제로 에너지 바와 에너지 드링크를 먹인 후 일행들에게 말했다.
“쉬더라도 이동해서 쉬는 게 좋을 겁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 건데요?”
“서브 미션의 선택지 중 ‘산군’을 처치하는 건 어중간한 힘으로 어려울 겁니다. 용사보다 훨씬 강하거든요.”
“그럼 숨겨진 세계…?”
김도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김영광이 질문을 해 왔다.
“아시는 게 있습니까?”
“네. 성좌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성좌, <재미로 삶을 반복하는 자>가 입만 벌리면 구라라고 말합니다.]
[성좌, <당나라의 고승>이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 말합니다.]
[성좌, <사계절을 사랑하는 선녀>가 피식 웃습니다.]
“그렇군요.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쉽게 설명 드릴게요. 도은 씨 외계인 이야기 기억하죠?”
“이번에도 외계인인가요…?”
“아니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실 거예요. 아틀란티스 같은 곳. 많이 들어 보셨죠?”
“설마….”
“네. 그런 곳을 찾는 겁니다.”
대서양에 있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대륙인 아틀란티스를 들먹이자, 일행들의 동공이 두 배는 커졌다.
“아, 물론 대서양으로 갈 건 아니에요. 저희는 다른 곳을 찾을 겁니다. 그곳에 가면 저희도 조금은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가 어딘데요?”
“그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