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에필로그(1)
* * *
그렇게 해서 삼월 봄맞이 가족모임은 모두 끝이 났다.
저녁을 먹으면서 다음 모임은 유월에 부산에 계신 고모님 댁에서 하기로 하고 모두 헤어졌다.
미준은 은혜를 태워 돌아오다 해자도에 들렀다.
해자도의 불빛은 예나 다름없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오늘 수고했다. 은혜야.”
“아니에요. 전 너무 즐거웠고 또 감격했어요.”
“감격?”
“가족 분들이 하나 같이 모두 좋은 분들 같았어요.”
은혜의 표정에서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형수는 어땠어?”
“형수도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어요.”
“무엇보다 형수와 잘 지내. 한 번씩 통화도 하고.”
“네, 이제 좀 자신이 생겼어요. 재벌가라 해서 엄청 쫄았거든요.”
“시대 탓도 있겠지. 무엇보다 난 우리 가족들이 너무 좋아.”
“인정해요.”
“할머님 말씀처럼 빨리 아이 만들어 결혼하자.”
“참, 오빠도. 아이야 결혼한 후에도 늦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아. 아직 형이 아이가 없어. 아마 많이 기다리고 계실 걸.”
은혜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우리 나이 적지 않아. 순서 따질게 뭐 있어.”
“그건 그렇지만.”
“결혼은 이번 가을 어때?”
은혜는 미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얼마가지 않아 이미 은혜에겐 미준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오빠, 제 몸이 이상해요.”
“....?”
“임신인가 봐요.”
“그래? 고맙다. 은혜야.”
“그래도 창피해요.”
은혜는 소문이 날까봐 걱정을 많이 했지만 미준은 무엇인가 자신의 소임을 다 한 것 같아 가슴이 뿌듯했다.
“창피하긴. 천하에 나 연미준 아이 임신했다고 창피하다고. 이게 말이 돼?”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 이제. 아무리 그래도 우리 둘은 낳자.”
은혜는 미준을 처다 보며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직장은 어떻게 할 거야?”
“난 계속 근무하고 싶어요.”
“그럼 그래. 나도 그러길 바랬어. 재벌가라 해서 결혼하면 모두 살림만 해야 하나. 요즘 세상에.”
“고마워요. 오빠.”
“우리 아기 낳으면 유모 모셔와서 우리 집에서 돌보면 돼.”
“고마워요.”
“그리고 처남 있잖아. 이제 좀 큰일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은석이?”
“응.”
“오빠가 배려해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렇지 않아. 누나가 그러면 안 되지.”
“고마워요. 다음 인사 때 부장 승진시켜도 되겠어요?”
미준은 은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가을 그들은 진호동 부모님 댁 정원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야외 결혼식을 올렸다.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가운데 두 사람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미준은 은혜와 삼주 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중산 대공원 옆 자택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신방은 본래 3층 미준의 방을 비우고 2층으로 옮겼다.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2층을 다시 예쁘게 꾸며 그들의 신혼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일층에는 가사도우미와 김보영 사원이 가주하고 2층은 미준의 부부, 3층은 그냥 비워두었다.
“오빠,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장기간 소행성에 출장을 다녀온 미준은 배가 불러 오르는 은혜를 침대에 눕혀 그녀의 상의를 벗기려 들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날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미준의 은혜의 상의를 위로 밀어 올리고 동그랗게 불룩한 은혜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간지러워.”
“이제 심장소리가 더 큰 것 같아.”
그때 태아가 엄마의 배를 툭 차는 것 같았다.
“느꼈어요? 우리 [미래]가 발길질 했어요.”
[미래]는 뱃속에 있는 아기의 태명이다.
“뭐, 발길질. 아빠가 심장소리 좀 듣겠다는데 발길질을 해.”
“헤헤헤.”
“건방진 놈.”
“호호호.”
얼마 후 은혜는 신고국 태조 연기산 황제의 첫 증손자이며 뉴 해양 그룹과 뉴 중산 그룹을 이끌어 갈 옥동자가 세상에 태어났다.
이날 중산 앞바다에는 작은 유성우가 쏟아져 내렸고 작은 해일이 일어 해수욕장을 쓸고 지나갔다.
“이 놈이 우리 가문의 미래를 이끌 놈이구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 손자를 얻게 되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여보, 우리 미래 보러가요.”
연상준 회장은 틈만 나면 중산 아들집으로 달려오곤 한다.
손자의 자는 모습과 옹알이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 돌아가곤 하였다.
“여보 우리 너무 애들 집에 자주 가는 것 아니에요?”
“그렇지?”
“그런데 도대체 눈에 삼삼해서 돌아서면 또 보고 싶어.”
“사실 나도 그래요.”
“여보 그런데 왜 당신은 자꾸 젊어져?”
“에이. 별 말씀을.”
그것은 사실이었다. 할아버지 상준에 비해 할머니 뷰미는 아직 나이가 너무나 젊어 보였다.
‘인어 출신이라 그런가?’
할아버지 상준은 예쁜 아내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휴 요걸.”
“당신 나이 생각해요.”
“뭐? 내 나이가 어땠어?”
“참나.”
“이리 와.”
“간지러워요.”
손자의 첫돌을 맞이하여 연상준 회장은 모든 가족들이 다 모인 가운데 중대 발표를 하였다.
“우리 미래의 관명은 연공준이다.”
“공준이?”
“난 이제 현직에서 물러날 생각이다.”
“아버님 갑자기 무슨 말씀을?”
“이제 뉴 해양 그룹 회장자리는 슬준에게 물려주고 난 네 엄마와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다.”
“아버지.”
슬준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난 네 어머니와 이미 약속했다. 난 명예회장으로 남고 이제 뉴 해양을 자네가 이끌게.”
“그래, 애비. 잘 했다. 이제 가끔 손주 재롱이나 보면서 쉬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그동안 고생했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 일어선 것이 다 자네 내외 덕이다. 이제 우리 집안에 세 명의 회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연상준 회장은 즉시 회사에서 모든 수순을 밟게 한 뒤 현직에서 물러났다.
“우리 아이 키울 땐 이리 귀여웠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원래 손주가 더 귀엽다고 하잖아요.”
“남들도 다 그럴까?”
“그럼요. 세상에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 손주가 귀여울 거예요.”
은혜는 출산 휴가와 1년간 육아 휴직을 마친 뒤 직장으로 돌아갔고 유명한 유모를 특채하여 공준의 양육을 맡겼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걱정을 하셨으나 미준의 결정으로 결국 그렇게 하였다.
손주 공준은 머리가 영특하고 남다른 데가 있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아기들이 먼저 아는가 보다.
공준이 나이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 때 증조할머니 정연정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고 그때부터 아이의 기질이 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혹 어린이 집에서 반 아이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준 일이 있어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긴 했으나 그때까지는 아직 어렸으니 죄 없는 보육교사만 골탕을 먹었다.
아직 어린 아이였으니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긴 해도 그 항의는 유아원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
공준은 초등 4학년이 되자 남다르게 성장이 빨라 덩치도 커지고 힘이 세어져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연공준. 너 왜 그래?”
같은 6학년 전교 회장 권혜영이 어느 날 공준을 보며 나무랐다.
여학생 출신 전교회장으로 유별나게 키가 크고 똑똑한 여자 아이가 노골적으로 공준에게 항의를 하였다.
제 1기 사춘기가 온 것일까?
공준의 태도를 갑질이라 해도 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기회만 되면 못된 짓을 일삼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남들이 보면 갑질을 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을 이용한 갑질.
모든 남자 아이들은 자신의 부하가 되어야 하고 여자 아이들은 시중을 드는 노리개로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갔지만 좀처럼 철이 들지 않았다.
4학년 여름 방학 때 어느 날 같은 학교 여자 아이들을 불러내어 이틀간이나 말도 없이 사라져 학교와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다.
이런 말썽이 일어나자 결국 어머니는 더 참지 못하고 아들 교육을 위해 자기 방에 두고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너 앞으로 외출금지다. 내가 부르기 전엔 너 방에서도 나오지 마.”
“알았어요.”
그리고 문을 딸각 잠가 버렸다.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다.
‘이상하네. 지금 쯤 나올 시간이 됐는데.’
그리고도 저녁 먹을 시간인데도 소식이 없다.
조바심이 난 어머니는 할 수 없이 키를 찾아 방문을 열러 보았다.
“아니.”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주머니.”
어머니는 즉시 아주머니를 찾았다.
“아주머니 공준이 나가는 거 봤어요?”
“아뇨. 방에 없어요. 전 못 봤습니다.”
‘나 모르게 도망쳐 나갔나?’
어머니는 다시 공준의 방을 뒤져보고 집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결국 신발장을 봤으나 신발은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신발도 신지 않고 어디로 갔지?’
어머니는 이걸 남편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대로 두다가는 아이의 나쁜 버릇이 고쳐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도 걱정이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을 그만두고 아이 교육에 전념해야 하나?’
어릴 때부터 유모의 손에 의해 길렀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공부도 잘해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행동에 약간의 문제가 보였으나 철이 들면 괜찮다는 어머니의 조언도 있어 큰 염려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갈수록 문제가 커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공준의 소식이 없었다.
조금 더 있으면 남편의 퇴근이 임박하게 된다.
‘아빠가 오면 의논을 할까?’
‘아니지. 그럼 아빠가 걱정을 많이 하실 텐데.’
가급적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어느 듯 시간이 저녁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곧 돌아오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기다리던 어머니는 마음이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별일은 없어야 할 텐데.’
“딩동.”
벨이 울렸다.
‘공준이 왔나?’
아니었다. 초인종 화면에 비친 얼굴은 남편 연회장이었다.
“나 왔어요.”
연회장은 현관에 들어서자 아내 외에는 아무도 없자 재빨리 은혜를 부둥켜안고 진한 입맞춤을 하였다.
“흡.”
“음.”
“잠깐만요.”
연회장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으로 사모님이 집에 계시는 날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일부러 거실로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의 러브 모션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연회장은 모처럼 아내가 문을 열어주자 덥석 아내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는데 삼층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아빠, 이제 오세요?”
미준은 깜짝 놀라 아내를 계단에 내려놓고 위층을 처다 봤다.
공준이었다.
은혜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너 언제 왔어?”
“무슨 말이에요?”
“너 어디 갔다 왔냐고?”
은혜는 공준이 나타나자 마음 한 편은 안심을 하면서도 괘심한 생각이 들었다.
“가긴 어디가요. 내내 방에 있었는데. 꼼짝 말고 방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
“공준이 너 혹시?”
“미안해요. 아빠. 엄마 마음 상하게 해서 벌 받느라 아직 저녁도 못 먹었어요.”
“뭐?”
“그, 그게 아니라.”
은혜는 아들의 표정을 보니 아주 태연하였다.
‘이상한데?’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준이 나갈 때도 보지 못했고 들어올 때도 보지 못했다. 나갈 때는 좀 방심을 했지만 들어올 때는 현관문을 열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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