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재벌가의 후예(4)
* * *
“누구랑 할 거예요?”
“그걸 말이라고 물어?”
“그 여자. 소행성 본부장?”
“아냐. 오빠가 좀 미안해. 이해해줘.”
“이해해요. 오빠 고민 많다는 거.”
“그래서 내가 진작 말을 못했어.”
미준은 진심을 담아 은혜에게 용서를 빌었다.
“알았어요. 이제 걱정 마시고 결혼하세요.”
“결혼하라니. 얘가 아까부터 자꾸 왜이래.”
“....?”
“내가 누구하고 결혼하라고?”
“....?”
“난 너하고 할 거야. 그래서 용서해 달라는 거고.”
“난 오늘 널 그냥 못 보내겠어.”
미준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오빠?”
마음이 급해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은혜는 TV를 보며 아직도 멍 때리며 앉아 있었다.
“우리 이거 얼마만이지?”
그제야 은혜는 미준을 흘끗 처다 보더니 얼굴이 빨갛게 되어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은혜가 들어간 욕실에 물소리가 들리자 미준은 다시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장난기와 섞여 마음이 급해 물만 축여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빠. 왜 이러세요. 부끄럽게.”
“나 좀 더 씻으려고. 좀 전에는 마음이 급해서 제대로 못 씻었거든.”
“징그러.”
팽창한 미준의 양물이 자신의 몸에 자꾸 부딪치자 흘낏 보고는 잽싸게 타월을 벗겨 자신의 몸을 감싸고는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은혜가 도망쳐 나가자 미준은 처음부터 천천히 몸을 다시 씻은 후 큰 타월로 자신의 허리에 두른 뒤 밖으로 나왔다.
방안엔 이미 불이 꺼져있었고 TV 소리만 떠들고 있었다. 미준은 TV를 끄고 나서 야간 등을 켜 둔 채 그녀가 엎드려 있는 침대 위로 올랐다.
‘이게 얼마만인가?’
사실 그동안 미준은 은혜를 만나지 못했다.
“넌 내가 결혼 하자는데 자꾸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내가 동네북인가?”
“....?”
“그새 마음 변했어?”
“믿기지 않아서 그래요.”
은혜는 이불을 뒤 짚어 쓴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그래서 네게 연락도 못했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은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은혜야. 좀 앉아봐.”
그녀의 등을 두드리자 은혜는 이불을 껴안고 미준을 바라보며 마주 앉았다.
“우리 지금 대화가 자꾸 꼬이는 것 같아.”
“....?”
“너 울었어?”
“고마워서 그래요.”
“고맙긴. 내 말 알아들은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서툴러서 그렇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울면 어떡하나?”
미준은 침대에서 내러와 다시 불을 켜고 책상 위 화병에 꽂혀있는 꽃을 몽당 뽑아 들고 침대 아래로 내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은혜야. 나 진심으로 널 사랑해. 나랑 결혼 해줘.”
무릎을 꿇고 있는 미준을 보자 은혜는 갑자기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꽃을 든 미준의 모습이 빨가벗은 상태였고 그것을 받으려는 자신도 역시 옷을 벗은 상태였다.
“호호호, 혹, 혹, 아휴∼”
“....?”
“오빠.”
“왜 또?”
“청혼하면서 복장이 그게 뭐야?”
“엉?”
“크, 큭큭큭. 크헉. 크헉. 하하하.”
“지금까지 많은 얘기 들어 봤지만 빨가벗고 청혼했다는 애긴 듣도 보도 못했어. 호호호, 흐흥, 호응, 호호호. 아∼유 배 아파. 아유∼”
“에이 씨, 모르겠다. 청혼은 나중에 하고 일단 볼일이나 보자.”
미준은 들고 있던 꽃을 책상위에 던져버리고 은혜를 덮쳤다.
“간지러워.”
“넌 오늘 죽었어.”
“아유, 간지러워.”
“예비 신부가 간지러우면 되나. 짜릿짜릿 해야지.”
“아휴 오빠. 잠깐만. 정말 간지러워.”
“에에 씨. 오늘은 정말 되는게 없네.”
“호호호 홍 홍. 아휴 배야.”
“그만해 씨. 그럼 모유나 한통 먹자. 나 배고파.”
“아이고 간지러워.”
신기한 일이다.
웃음보가 터지니 자신의 기도 사라지고 간지럽기만 하다.
생각할수록 웃음만 나온다.
‘빨가벗고 한 청혼이라.’
‘에이 시발.’
‘간지러울 땐 일도 제대로 안 되는구나.’
미준은 침대에 누워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조금전 상황이 자꾸 떠올라 히죽히죽 웃음만 나왔다.
“오빠, 고마워요.”
“또 뭐가?”
“약속 지켜줘서.”
“너도 고마워. 날 이해해 줘서.”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사실 미준은 어릴 때부터 은혜를 생각해 보면 고맙기 그지없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편에서 생각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잠에서 일어났을 땐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오빠, 요즘은 사냥 안하세요?”
“너 하고 사냥한 건 너무 오래 됐지?”
“낚시도 오래 됐고.”
“정말 그러네.”
미준은 배란다로 나왔다.
대공원에는 눈발이 하나씩 뿌리고 있었다.
“회장님 식사 하십시오.”
“네.”
“우리 내러가서 점심 먹고 공원에 가봐.”
“출근은?”
“오늘 토요일이잖아?”
“아, 그러네. 괜히 마음만 바빴잖아.”
“이제 우리, 쉴 때는 쉬어가며 천천히 해.”
“알았어요.”
미준은 아주머니께 부탁을 했다.
“아줌마, 은혜씨 온 거 남들에게 말하면 안돼요.”
“네, 회장님.”
도우미 아주머니는 생글생글 웃으며 미준을 처다본다.
“아주머니, 오늘 더 예뻐요.”
“참 회장님도. 짓궂으셔.”
아주머니 얼굴이 붉게 물이 든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처음 보는 아가씬데 언제부터 우리 집에서 근무했죠?”
미준은 본능적으로 직장 언어가 튀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네?”
“그저께부터 오게 됐습니다.”
“....?”
“회장님 할머니가 보내주셨습니다. 아주머니 혼자 힘들어 하신다고.”
"아, 그래요?"
“예, 회장님. 보영인 할머님이 보낸 아가씨에요. 원래 중소기업에 근무하다가 할머니 추천으로 집으로 오게 됐습니다.”
“네.”
“그동안 집을 비우셔서 미쳐 인사드릴 시간이 없었어요.”
“네. 보영씨라고요?”
“김보영입니다.”
“그럼 보영씨. 우리 아주머니와 같이 힘을 모아 잘 지내도록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그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네 할머니.”
“내 자네에게 부탁하나 하려고.”
“무슨 부탁요. 말씀하십시오.”
“거기 보영이란 아가씨 왔지?”
그새 도우미 아주머니가 할머니께 전화를 올린 모양이었다.
아직 소개도 못했는데 그가 먼저 묻게 되자 난처했던 모양이었다.
“네, 할머니.”
“그애 잘 살펴보고 중산에 있는 회사에 마땅한 자리 하나 좀 챙겨줘. 내가 아는 고마운 사람의 딸인데. 애가 너무 착하고 예뻐서 말이야.”
“아, 그러세요. 알겠습니다 할머니.”
“고마워 손주. 아니 연회장. 난 자네를 며칠만 못보면 보고싶어 죽겠는데 내가 너무 주책이지?”
“아니에요. 할머니. 한번 들릴게요.”
“그래 연회장. 얼굴 한 번씩 보여줘.”
“네, 할머니.”
전화를 끊고 미준은 다시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 식사 같이해요.”
평소에는 늘 아주머니와 미준은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오늘은 은혜가 와서 둘만의 식사를 차려 내었다.
“그래도 되겠어요?”
“그래요. 아주머니.”
은혜도 미준을 따라 아주머니와 같이 식사할 것을 제안하였다.
미준은 그들이 식탁에 앉을 때까지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결국 도우미 아주머니와 보영씨도 함께 자리를 하였다.
식사를 한 후 차를 기다리며 미준은 보영에게 물어 보았다.
“보영씨는 전공이 뭐예요?”
“스페인 어를 전공했습니다.”
“그럼 우리 회사에서 근무해 보시겠어요?”
“저야 회장님만 괜찮으시다면.”
“뉴 중산 해외관리부는 어때요?”
“....?”
그녀는 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보영아. 거기 엄청 좋은 데야. 연봉도 높고.”
“예, 그럼 그렇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회장님. 보영인 집이 서울인데 여기서 함께 살면 안되겠어요?”
“우리 회사 사택도 있는데?”
“그건 그렇지만 가끔 제 일도 좀 도와주고 말동무도 되고.”
“보영씨가 원하면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미준과 은혜는 차를 마시고 난 후 공원으로 나왔다.
벌써 눈이 발목까지 차올랐다.
“우와, 오빠. 여기 눈이 이렇게 많이 온건 몇 년 만에 처음인 거 같애.”
바람결에 흩날리던 눈발이 함박눈으로 바꿔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공원으로 들어와서 눈장난을 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소란을 떨고 있었다.
공원에 들어찬 나무에도, 종각 위에도, 그리고 풍차에도 하얗게 뒤덮였다.
은혜를 데리고 공원 호숫가에 나란히 섰다.
“할아버지. 저 은혜씨랑 결혼하려고 해요. 도와주세요.”
눈발이 펑펑 떨어지고 있는 호수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오빠. 할아버지.”
은혜는 그의 말을 듣고는 미준의 팔을 잡으며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따라한다.
“저도 오빠를 많이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앞으로도 잘할 테니 잘 부탁드려요.”
그들은 함박눈이 쏟아지는 호숫가에서 한참 동안이나 포옹을 하고 서 있었다.
지루했던 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날.
정기적인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은혜를 만났다.
“오빠. 좀 긴장돼요.”
“괜찮아. 그럴 것 없어.”
“어제 오빠 전화 받고 한 잠도 못 잤어요.”
“그랬겠다. 그래도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 해.”
“만약 반대하면 어쩌죠?”
“그럼 너 데리고 해외로 도망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우리끼리 살자.”
미준은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은혜를 데리고 예정 시간보다 일찍 진호동 집에 나타났다.
이번 모임은 아버지 댁에서 할 차례였다.
대문을 들어서자 아직 상은 차려지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정자에 앉아 진호동 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준은 먼저 은혜를 데리고 할머니께 다가갔다.
“할머니.”
“어, 우리 새끼 일찍 왔구나.”
“할머니 제가 사랑하는 아가씨 입니다.”
“뭐?”
할머니는 찬찬히 은혜를 살펴보셨다.
“....?”
“너 이놈. 이 할미를 가장 사랑하다고 하지 않았어?”
할머니의 눈가에 웃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참, 할머니. 할머니 다음으로 은혜를 사랑해요.”
“안녕하세요? 정은혜입니다.”
“어서 와요. 예쁘게도 생겼네.”
“고맙습니다. 할머니.”
“자네 어머니는 알고 계시냐?”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정원으로 나오며 두 사람을 목격했다.
“여보, 저 처녀 당신 알아요?”
연회장은 아내 뷰미를 보며 물었다.
“네, 사실 제가 오래전에 소개해준 처녀에요.”
“그래요?”
“그런데 제들 끼리 이미 알던 사이였어요.”
그들이 접근하자 은혜는 두 분께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어서 와요.”
“정 은혜입니다.”
“그럼?”
“네, 맞습니다. 뉴 중산 본부장입니다.”
미준은 아버지께 다시 소개를 하였다.
“좌우간 반가워요. 우리 중산 연회장이 미리 낙점했던 아가씬가 보네.”
은혜는 모든 가족이 참석하기 전부터 행사장 이것, 저것을 도와주면서 서먹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가족 모임은 참으로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식사를 하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서로 나누고 궁금했던 일들을 물어보곤 하였다.
간혹 사업의 근황이나 경기의 움직임도 묻곤 하였다.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연회장은 정리를 하는 말씀을 하였다.
“자자. 이제 새해 모임 마지막으로 할머님 종례말씀 듣고 건배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박수를 쳤다.
“자, 어머님 건배사 한 말씀.”
아버지가 잔을 들고 할머님을 보며 건배사 제의를 하셨다. 할머니는 잔을 들고 입을 여셨다.
“올해 첫 모임에는 새 가족이 될 손주며느리 후보감이 참석하여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즐거웠다. 두 사람은 하루 빨리 떡두꺼비 같은 증 손주를 안겨주도록 하고....”
“어머니.”
“아니지, 아직 참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떡두꺼비 낳으면 안되겠다.”
모두들 잔을 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하루 빨리 날을 잡아 결혼하도록 하고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며 하는 사업들 대성하기 바라는 의미에서 위하여!”
“위하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