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공주의 숲(1)
* * *
“그러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이 이야기를 자네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좀 망설였는데 연회장이 나와 자네를 함께 좀 만났으면 하던데?”
사실 연회장은 상준의 어머니에게 천 여사와 아들 천 대표를 만나고 싶으니 시간을 좀 내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연회장님께서 왜 저를?”
“자네가 불치의 병으로 알려졌던 모친의 병을 치료해 주신데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릴 겸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구나.”
“무슨. 그분은 우리 병원에 입원한 환자였는데 당연히 치료할 일을 한 것 뿐인데.”
“그런데 그 분이 제게 연락하지 않고 어떻게 어머니께?”
그러자 어머니는 무척 당황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 연락처는 어떻게 알았지요?”
“그, 글쎄 말이야.”
“그래서 자네에게 연락해 보라했지. 그런데 기어이 나와 함께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해서.”
“그냥 넘어 가세요. 그런 일로 환자의 보호자를 만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그렇겠지. 그래도 자네가 먼저 전화해서 사양하던지 하고 전화는 해봐.”
“네, 알겠습니다.”
“응.”
“그런데 어머니. 혹시 연회장과 전부터 알던 사이신가요?”
“아, 아니. 내가 어떻게 그분을.”
순간 미준은 어머니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연회장이 자신과 어머니를 함께 초대하겠다는 것도 이상하고 연회장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가 무척 조심스러운 점도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미준은 다음날 아침 연회장에게 전화를 내었다.
“여보세요?”
“뉴 중산 대표 천미준입니다.”
“아, 천 대표. 그렇지 않아도 천 대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모친께 말씀 들었죠? 고마운 마음에 두 분을 초대할까 해서.”
“단지 그 것 뿐이세요?”
“뭐 다른 뜻이 있겠소.
“그럼 사양하겠습니다. 환자와 연관되어 밖에서 만나는 건 병원 내규 상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할일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준은 전화를 끊었지만 무엇인가 찝찝한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며칠 후 퇴근을 한 후 모처럼 집 앞 대공원 카페에 들렀다.
뉴 중산 낚시공장 서영돈 부장의 요청으로 면담을 위한 자리였다. 서영돈 부장은 낚시공장 공장장을 겸임하고 있는 인사로 사적인 일로 만나자는 제의가 있어 편하게 잘 아는 카페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만나는 자리는 미준이 자주 앉는 한쪽 구석진 창가 자리였다.
서영돈 부장은 낚시공장에 대한 근황과 낚시팀 운영에 대한 자문을 받은 후 자신의 재혼 문제로 장기간 휴가를 얻기 위한 사전 보고의 자리였다.
“서부장님. 그런 일로 사전 허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히 결혼하면 휴가를 내야지요.”
“제가 초혼도 아니고 재혼인데다 결혼 할 상대를 배려하다보니 장기 해외여행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예, 서 부장님 공로가 얼마나 큰데.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필요한 만큼 휴가를 다녀오세요. 요즘 신혼여행은 장기여행을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서 부장은 중년인데다 몇 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 둘을 데리고 홀로 지내다가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 재혼하게 된 분이다.
자신의 직책이 직책이다 보니 장기 휴가를 내려고 이런 절차를 밟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저씨?”
소희였다.
“어, 소희.”
“누구세요?”
“아, 여기 내 동생.”
“.....?”
“그럼 전 먼저 나가겠습니다.”
서 부장은 동생이라 소게하는 대표의 말에 상당한 의문이 있음일 깨닫고 얼른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이라 소개한 아가씨가 대표를 부르는 호칭이 아저씨라니?
서 부장은 대표와 헤어져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몇 번이나 카페 창가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아가씨와 미준의 모습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뭔가 짐작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대표님이 연애를 하시나 보다.’
서부장은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너, 이제 나보고 아저씨라 하지 마.”
“그럼?”
“오빠라 해.”
“오빠?”
“왜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조금 전 우리 직원에게 어떻게 된 건지 알아?”
“....?”
“넌 나보고 아저씨라 부르고 난 너를 동생이라 소개해 버렸으니.”
“호호호. 눈치 챘겠네.”
“무슨 눈치?”
“내가 아저씨 애인이란 거.”
“뭐? 넌 내 애인이 아니잖아. 이제부터 내 동생이야. 그러니 이제부터 난 너의 오빠야.”
“....?”
“알았어?”
“싫은데. 동생은.”
“여친 어때요?”
“까불지는 말고.”
“알았어요. 그래도 난 여친이 좋은데.”
“저녁은 먹었어?”
“아직.”
“그럼. 여기 왜 왔는데?”
“아저씨, 아니 오빠가 공원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미행했죠.”
“뭐?”
“호호호. 농담이고 저도 여기서 친구 만났어요.”
미준은 소희를 데리고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사주면서 진심을 털어 놓았다.
“넌 동생이 있다했지?”
“네. 남동생 하나 있어요. 이제 제대하고 복학했어요.”
“우리 서로 불편하고 하니 이제부터 우리 의남매 하자.”
“진심이세요?”
“그럼 진심이지. 난 형제자매가 없잖아. 너 같은 발랄하고 깜직한 여동생 하나 있으면 좋겠다.”
“진심인가 보네.”
“그럼 넌 지금까지 농담으로 들었어?”
미준은 깜직하고 귀여운 소희를 놓치기 싫어서 동생으로 지내려고 마음먹었다.
“여기 잠깐 기다려 봐.”
미준은 잠시 차에 들러 지난번에 제작해둔 아스라이트 목걸이 하나를 가지고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어머니 생신 때에 맞춘 다섯 개 중 하나였다.
사실 목걸이는 은혜와 예솔에게 하나씩 걸어주고 남아있는 것 중에 하나였다.
“자, 이거 받아.”
“이거 목걸이잖아요?”
“이건 너와 내가 오늘부터 오빠와 동생의 연을 맺은 기념으로 주는 거야.”
“이런 건 보통 연인 사이에 주는 것 아니에요.”
“귀여운 동생에게도 줄 수 있지.”
미준은 진심을 담아 소희의 목에 걸어주었다.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소희는 기산의 옆에 꼭 붙어 기산의 팔을 잡고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 앞 까지 그대로 걸었다.
“들어가.”
“오빠라고 하니 편하긴 하네. 조심을 별로 안 해도 되고.”
소희가 들어가자 기산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그녀의 빌라는 미준의 집과 불과 300미터 정도 거리였으니 금방 집에 도착했다.
다음 날부터 미준은 늘 거래해온 중산 부동산에 연락하여 중산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중산 산 35번지 작은 빌라를 통째로 사들여 내부 시설을 개조하도록 하였다. 1층은 주차장, 2층은 휴식 공간, 3층은 주택, 4층은 도서관과 창고로 사용하도록 개조하였다.
그리고 내부엔 완벽한 리모델링을 하도록 하였고 필요한 가재도구를 구비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빌라 정원도 보다 확장하여 숲속처럼 꾸며 놓았다.
빌라의 이름은 숲속나라.
“누가 살 건데 이렇게도 신경을 많이 써요?”
부동산 중계사무소 사무장이 미준에게 물었다.
“내 동생이 살 곳이에요.”
모든 일은 사무장에게 일임시켰고 그기에 합당한 리베이트를 제공하였다.
빌라의 개조와 리모델링이 끝나자 빌라 이름을 숲속나라로 개칭하였다.
다음엔 공주의 이름을 양성화하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번 받아온 호적 신고서에 공주의 지문이 찍힌 신청서와 두 명의 신원보증서를 함께 제출하였다.
물론 천미준, 본인의 보증서도 함께 들어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공주, 나이 23세, 주소 : 중산시 본동 산 35번지 숲속나라 301호.
공주의 호적이 등록되고 주민등록증이 나올 때 쯤 미준은 차에 보관해 오던 목걸이 하나를 챙겨 방으로 올라왔다.
내일은 다시 공주를 만나러 진짜 숲속나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다음 날 미준은 비서실장과 어머니께 장기간 사냥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알리고는 숲속 공주의 집에 갈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공주에게 다녀 온지가 벌써 몇 달이 지난 것 같다.
무엇보다 공주가 필요로 하는 미곡과 통조림 등 생필품을 구입하고 산에 다닐 때 입을 수 있는 등산복과 신발, 잠을 잘 때 입을 수 있는 잠옷과 가운, 속옷 등을 챙겼다.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옷들도 모두 챙겨 넣었다.
캐리어만 해도 큰 것이 두 개가 된다. 하나는 주로 식용 생필품이고 나머지는 두 사람의 옷들이 담겨있다.
이번에 챙긴 것 중 특이한 것은 개조된 엽총과 양궁, 손도끼와 톱 등이었다.
등산복을 입고 스틱을 꽂은 가방을 어깨에 멘 다음 여행용 캐리어를 양손에 잡았다.
‘숲속 큐걸의 집 마당.’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회전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깜작이야.”
마침 마당에서 햇볕을 쬐며 앉아있던 공주가 갑작스런 미준의 출현에 깜짝 놀라 처다 보더니 그의 품에 오락 뛰어들었다.
“아저씨.”
미준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잘 지냈어요?”
그녀를 떼어 놓고 먼저 공주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지난번 떠날 때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던 공주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공주의 얼굴은 지난번 볼 때와는 달리 많이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네. 이제 적응이 되어가나?’
“잠깐만 여기 않아서 기다려 주세요.”
마당가에 놓여있는 나무 벤치를 가리키며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미준은 벤치에 앉아 주변 풍경을 살펴보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여기 생필품.”
“고마워요. 아저씨. 매번 이렇게.”
쌀과 국수, 통조림 들을 모두 꺼내 정리를 해주고 김과 멸치. 육포등도 판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번엔 비닐봉지에 꼭꼭 싸맨 김치, 된장, 고추장 등도 모두 꺼냈다.
“이런 것도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고마워요. 아저씨.”
공주의 표정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지난번엔 건강이 나빠져서 몰골이 말이 아닌 것 같았는데 지금의 공주는 매우 건강해 보였다.
“건강해 보여 좋아요.”
미준의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활짝 웃었다.
“이번엔 빨리 오셨네요.”
“내가 빨리 온 건가?”
“지난 번 보단 빨리 오셨잖아요.”
공주의 이야기 속엔 그녀의 마음이 모두 엿보였다.
이제 꼭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진 것 같았다.
요리를 하고 있는 공주를 미준은 등 뒤에서 다시 안아 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캐리어도 방으로 들여 놓았다.
얼마 후 공주는 조촐한 판을 챙겨 방으로 들어왔다.
“이거 피라미 매운탕이에요.”
“음, 맛있겠다.”
“지난번에 좋아하시는 것 같아 만들어 봤어요. 피라미도 있지만 꺽지와 동자개도 많이 넣었어요.”
“이걸 어떻게 잡았어요?”
“일러 주신 방법으로 어망을 만들어 봤어요.”
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만들어 졌나 보네.”
“아니에요. 몇 번 시도하다 겨우 성공했어요. 이제 계곡에 미끼만 넣어 던져두면 금방 잡을 수 있어요.”
“다행이네.”
“다 아저씨 덕분이죠. 큰 고기들보다 작은 고기들이 더 맛있어요. 매운탕용으로.”
사실 공주는 큰 물고기는 직접 손으로 잘도 잡는다.
그러나 정작 작은 물고기는 잡기가 힘이 들어 미준은 바지의 다리를 잘라 아래위로 묶은 다음 대나무를 휘어 통발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었다.
영리한 공주가 미준의 이야기를 듣고 결국 성공한 모양이었다.
“공주는 안 먹어요?”
“저는 점심을 안 먹잖아요.”
미준은 좀 이른 점심을 먹고 그녀와 함께 계곡으로 내러 갔다. 그녀가 만든 통발을 가지고.
미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계곡 중에서 물이 고인 곳을 골라 통발을 설치하였다.
미끼는 주로 누룽지였다.
계곡의 웅덩이 마다 작은 물고기 떼가 바글바글하였다.
오월의 계곡물은 아직도 좀 찬 편이었다.
통발을 웅덩이에 던져두고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러 갔다. 돌 틈에 손을 넣어 큰 고기들을 잡아 올렸다. 역시 대단한 아가씨였다.
“이 정도 되는 고기는 구워먹는 게 제일 좋아요.”
그녀는 신이 나는 지 옷이 젖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메기랑 송어, 열목어 등을 잡아 올렸다.
횟감으로도 좋을 것 같았다.
미준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편안하였다.
이곳에만 오면 세상에 걱정은 모두 잊게 되고 마음이 평화롭고 한없이 행복하다.
욕심도 없고 경쟁도 없으며 남의 시선도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는 곳.
그냥 마음 편하게만 살면 될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가 이런 곳을 한번쯤은 꿈꾸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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