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이계에서 온 소녀(2)
* * *
미준은 찬찬히 그녀가 내준 장신구를 받아 살펴보았으나 인간들이 사용해 오던 금은보석 장신구는 아니 것 같았다.
“음.”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었죠?”
미준은 그녀를 볼수록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네, 남해 금산 쌍홍문 주변에서 만났습니다.”
미준은 그제야 생각이 떠올랐다.
은혜와 함께 금산 산행길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분명했다.
한없이 섹시하고 몸매가 고와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고 싶었던 충동을 느낀 바로 그 여자 였다.
그 때가 처음 이었다.
“그때 아저씨가 뱀의 영령을 잡아내시는 걸 보고 제가 아저씨를 이곳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미준은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았다.
“아저씨를 모셔오면 천년 묵은 괴물을 잡아 줄 것 같았습니다.”
수긍을 되면서도 확실한 신뢰는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소개가 끝나자 미준은 자신에 대한 소개도 간단하게 하였다. 그것이 남의 집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 같았다.
“이제 밤도 늦었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세요.”
“공주는요?”
미준은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공주라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전 여기 벽에 기대어 자겠습니다.”
‘그래. 야설을 보면 잠을 자다 변을 당했어.’
미준은 자는 척 하면서 공주의 동태를 지켜보리라 마음을 굳히고 자리에 누웠다.
그때 미준의 눈앞에 자신의 레벨이 다시 떠올랐다.
[귀하의 스펙 10급. 순발력 31. 감별력 32. 투시력 25. 전투력 35. 조정력 16.]
‘이정도면 저 여자 정도야.’
‘내가 자나봐라. 오늘 밤 반드시 너의 정체를 밝혀내고야 말겠어.’
그러나 그것은 미준의 어리석은 생각이었을까?
그는 괴물을 잡느라 기력을 뺀 상태라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자고 있었을까?
갑자기 여자가 큰 구렁이로 변해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큰 입을 벌리고 혀를 날름거리며 금방이라도 삼킬 것 같았다.
‘속았구나.’
미준은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뱀은 점점 자신의 몸을 죄어오며 머리를 삼키려 입을 딱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눈앞으로 다가 왔다.
“으악.”
미준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떻게 된 거지. 휴우∼ 꿈이었나?’
그때 여자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몽을 꾸신 것 같습니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공주는 아직 벽에 기댄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아. 아직 그러고 있었군요.”
“네, 걱정 마시고 더 주무세요.”
‘내가 쓸데없이 오해를 하였나?’
이제 미준은 공주를 믿어 보기로 하였다.
“불편하실 텐데 저기 누워서 주무세요. 난 이쪽에서 잘 테니.”
미준의 계속된 권고로 공주도 못 이긴 채 자리를 깔고 구석진 방에 누웠다.
마음을 놓고 나니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몸도 많이 가볍고 오히려 어디선가 불끈 힘이 솟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공주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공주를 찾아보니 마당 한쪽 모퉁이에 꾸부려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물을 받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니 이제야 주변 풍경이 눈앞에 모두 보였다.
공주의 집은 깎아지른 절벽에 작은 암자처럼 붙어 있었다.
집에서 올라가는 꼬불꼬불한 비탈길이 보였고 계곡으로 내러가는 험한 길도 보였다.
암자처럼 작은 집에 단 두칸, 하나는 방, 하나는 부엌.
어떻게 보면 그림같은 집이지만 또 다르게 보면 위험한 곳이었다.
“허음.”
“일어 나셨네요.”
“왜 이런 험한 곳에 집을 지어 살고 계십니까. 평평하고 넓은 곳도 많은데.”
공주는 여기 처음 왔을 때 모든 것이 겁이 나고 짐승들이 많아 그런 것을 피해 이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했다.
출입을 하는 데는 가파른 절벽을 오르내리려니 불편한 점은 많았지만 동물과 사람을 피하기는 안성맞춤이라 했다.
절벽에 붙어있는 집은 아래로 따라 내러 가면 맑고 깨끗한 계곡 물이 흐르고 계곡에는 다양한 고기들이 많아 쉽게 구할 수도 있어 무엇보다 좋고, 집에서 위로 올라가면 산나물과 버섯 등 얻을 것이 많아 양쪽 모두가 좋다고 하였다.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맹수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는데 괴물 지네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간 고생 많았습니다.’
미준은 천해의 조건이라 감탄을 하였다. 단지 아래위로 왕래하기가 좀 불편할 뿐이었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아 보고 싶군요.”
이 말을 하는 그 순간은 진심이었다.
생존 경쟁의 세파에 시달리지 않고 신선처럼 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남아 있었다.
‘10살도 채 안 되었던 어린 공주가 어떻게 여기에 이런 암자 같은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미준의 마음 한 구석엔 이런 의문이 자리 잡았다. 언젠가는 꼭 물어보리라 생각하였다.
공주는 물을 길러 아침이 한 뒤 미준을 불렀다.
“아저씨, 식사 하세요.”
밥상을 받아보니 다시 놀랐다.
어제 밤에는 그냥 보리밥이라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귀리로 지은 귀리밥이었다.
그리고 반찬은 송어구이와 버섯전골이었다.
일단 맛을 본 후 엄지를 치켜들고 맛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공주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나쁜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제가 여기서 사냥을 좀 했으면 하는 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저씨가 계시면 소녀야 마음이 든든하겠지만.”
“말씀 낮추세요. 지구에 온지가 그리 오래 됐다면서.”
“그렇지 않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그리고 지구의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미준은 공주를 자세히 보면 볼수록 아직 앳된 여자아이 같았다. 그러나 가만히 계산을 해보면 자신의 나이보단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아, 그래요.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하세요.”
“그럼 공주님이라 부르겠어요. 큐걸이라 하기엔 좀.”
“편한 대로 하십시오.”
식사를 한 후 미준은 계곡으로 내러 갔다. 공주는 미준을 따라와 동물 가죽으로 만든 가방을 매고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바위에 앉아 물고기를 잡고 있는 공주의 모습은 한 마리 인어 같았다. 아니 선녀 같았다. 연약한 손으로 고기를 따라 움직이는 포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오다 보니 숙달이 된 건가?’
두 손을 물에 넣고 돌을 더듬듯이 살살 움직이다 순식간에 물고기를 잡아 올리곤 하였다. 저런 장면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나온 물고기 잡는 헌터 같았다.
미준의 성과도 매우 좋았다.
계곡을 따라 올라 갈수록 여러 요정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정영들도 많이 보였다.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잡아넣었다. 도롱뇽, 가재, 긴 꼬리나방, 물총새, 산 까치, 부엉이 등의 정령을 잡았었고 버섯공주 요정과 풀무치 요정 그리고 사마귀 악령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가시죠.”
“내가 여기 있으니 불편하지 않아요?”
미준은 쉽게 말이 낮춰지질 않았다. 공주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식사는 하루에 두 번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침과 저녁.
조금은 섭섭했으나 이곳에 온 이상 공주의 법을 따라야만 할 것 같았다.
마당에 있는 긴 벤치는 누가 만들었는지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 짜 맞춘 듯 견고하였다. 의자에 앉아 계곡을 내려다보니 자신이 바로 신선이 된 것 같았다.
“이래서 공주가 선녀 같아 보이나?”
미준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 했다.
그때 가만가만 공주가 다가와서 미준의 옆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풍경이 참 아름답죠?”
“네. 그러네요.”
“외로운 점만 빼면 살기가 좋아요.”
“그런데 겨울에는 어떻게?”
“생각보단 여긴 춥진 않아요.”
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말이라면 모두 사실일 것 같았다.
“아저씨, 제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제가 아저씨께 뭔가 보답하고 싶어요.”
“보답은 무슨.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한 가지 소원만 말해 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드릴게요.”
“......?”
미준은 가만히 생각하니 분명 한 가지가 있긴 있는데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내일은 우리 숲속으로 들어가 봐요.”
“네. 그렇게 해요.”
그리고 그들은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거나 계곡 건너 편 숲과 계곡을 내려다보며 그냥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았고 공주에게서 나는 숲속 향기 그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저런 여자와 이런 곳에서 살게 된다면?’
순간 미준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오늘 얻은 구슬과 우주 원석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공주는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공주의 것으로 짐작되는 팔찌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이것들 아저씨 가지세요.”
“이건 공주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한 것들 같은데.”
“이제 제게 맞지 않아요. 목걸이도 그렇고, 팔찌도 그렇고 너무 작아져서.”
“어릴 때 걸고 있던 것이네요.”
“네.”
“그래도 그건 아니에요.”
“그럼, 드릴게 없는데.”
“꼭 주고 싶다면 팔찌 한 짝만 주세요. 공주를 만난 기념으로.”
공주는 잠시 뒤 다른 상자를 하나를 더 가져와서 자신의 팔찌 하나와 미준이 획득한 보석들을 담아 주었다.
“고마워요. 이것만으로도 진짜.”
미준은 순간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날이 더 어두워지자 촛불을 밝혔다.
저녁은 어디서 따왔는지 오디 열매와 낮에 잡은 물고기를 구워주었다.
“음”
당장이라도 집으로 달려가 백미 몇 포대를 가져오고 싶었다. 그러나 잘못되면 공주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자, 피곤 할 텐데 그만 자요.”
“방이 하나 밖에 없어서 참.”
미준은 그녀가 제대로 잠을 설치는 것 같아 미안한 감이 생겼다.
“제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말씨나 얼굴이나 모두가 어린 건 맞는데 아무리 계산해도 나이가 맞지 않는다.
그녀가 펴준 이불 속으로 몸을 눕혀보니 포근하기가 말 할 수 없었다.
‘이것도 비단 이불인가?’
‘이 산속에 이런 이불이 있다니.’
미준은 눈을 감았다.
불을 끄는 그녀의 입김 소리와 옷을 벗는지 사각거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자극하고 있었다.
“음.”
팔을 뻗으면 손이 닿을 거리에 선녀 같이 아름다운 처녀가 함께 누워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심장 소리가 쿵쿵 들리는 것 같다.
“공주.”
“.....?”
아무 대답이 없다.
“벌써 잠이 들었어요?”
“아니에요.”
“나도 여기서 살고 싶어요.”
“네?”
“정말 여기 살고 싶어.”
“.....?”
다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
불을 끈 뒤라 공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말을 꺼내기가 한결 쉬웠다.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 한 가지 소원 있는데?”
“.....?”
“한 가지 소원은 들어 준다면서요?”
“.....?”
“자요?”
“아니요.”
“지금 소원 말해도 돼요?”
“아니요. 이제 끝났어요.”
미준은 옆으로 팔을 뻗었다.
바로 옆에 누워있다고 생각했는데 팔을 뻗쳐도 닿지를 않았다.
“어디 있어요?”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 편 벽에 기대 앉아 이불을 목까지 당겨 덥고 있었다.
“어떻게 또.”
“내러 와서 자요.”
“괜찮아요.”
“내가 괜찮지 않아요. 내가.”
“....?”
“그럼 나보고 가란 말과 같잖아요. 매일 밤 그걸 보고 어떻게 있어?”
미준은 용기를 내어 그녀를 당겨 자신의 바로 옆에 눕혀 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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