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싹트는 사랑(1)
* * *
그렇다고 특별히 싫어하거나 특별히 마음에 두지도 않은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두, 세달 전부터 점점 행동이 노골화 되어갔다.
은혜의 마음이 점점 멀어진다는 걸 의식했던 모양이었다.
수시로 공원에서 은혜를 불러내었고 노골적으로 손을 잡는가 하면 때때로 무리한 요구도 서슴없이 하였다.
그의 요구를 거절하면 할수록 오히려 행동은 노골화 되어갔다.
“이제 그만 만나요.”
참다못한 은혜가 거절을 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어떤 때는 회사 사무실로 전화를 하기도 하고 집으로 오겠다며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은혜를 미행했는지 미준이와 헤어진 은혜의 뒤를 따라 은밀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미준은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에 올랐다.
차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신호등을 기다리는 은혜의 뒤편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유심히 은혜를 지켜보는 청년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거 뭐지?”
촉이 이상하다.
시동을 걸려는데 그놈이 덥석 은혜의 손목을 낚아채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분위기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은혜는 놈에게 붙잡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무척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미준은 재빨리 차에서 뛰어내려 주차장 밖에 있는 횡단보도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것 놓으세요.”
“이야기 좀 하자니까.”
“할 얘기 없어요.”
“내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잖아?”
“이것 놔요. 남 보기 창피스럽게 왜 이러세요?”
그러나 이 둘의 몸싸움에 누구하나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놈은 은혜의 손목을 잡고 끌어 당겼고 은혜의 얼굴은 누가 봐도 공포에 젖은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창백했다.
“야! 너 뭐야?”
미준은 소리를 빽 질렀다.
미준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는가 하더니 은혜의 손목을 그대로 잡은 채 미준을 노려봤다.
“넌 꺼져. 이 사람 내 여자거든.”
미준을 보자 은혜는 용기를 내어 소리를 질렀다.
“누가 당신 여자야?”
“가시나, 넌 가만있어.”
“그 손 놔.”
“제 삼자는 빠져.”
“그 손 못 놓아?”
미준은 놈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가 뭔데?”
“나, 은혜 남친이야.”
“남친이면 남친이지 죽기 싫으면 꺼져.”
“너 죽는다.”
결국 놈은 더는 참지 못하고 미준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미준은 그런 건달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위기를 당할수록 광속과도 같은 그의 몸놀림이 더 살아난다.
몇 번을 피해주다가 가볍게 놈의 허벅지 근육을 툭 차버렸다.
아주 가볍게 발끝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놈의 허벅지 근육을 강타하였다.
“악”
순간 놈은 허벅지 근육에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풀썩 제자리에 주저 않았다.
“너, 이 새끼. 너, 너.”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더 이상 반격할 힘을 잃었다.
“야, 이 양아치 새끼야. 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 그만해.”
“으으으.”
“한번 만 은혜 앞에 알짱거리면 그땐 죽어.”
미준은 은혜를 데리고 차에 올랐다.
“미안해. 집이 가깝다기에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은혜는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집까지 바래다 주는 미준에게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
미준도 더는 묻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밤늦도록 집필에 주력했다.
갈수록 책은 제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도 할 겸, 반천도 살겸, 수산물 시장으로 달리고 있었다. 수산물 시장은 언제가도 싱싱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고 농수산물시장을 겸하고 있다.
중산항에는 밤새 고기잡이 하던 어선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면서 경매 시장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엄청난 고기들이 경매 시장으로 들어오면 경매꾼들은 어떻게 하는지 도매상인들과 요상한 신호를 주고받는 것 같다가는 어느새 경매가 끝나는 것 같다. 유심히 살펴봐도 알 수도 없거니와 어느 새 낙찰되어 상자 하나하나에 결정 가격이 쭉 붙여진다.
‘그것 참.’
볼 때 마다 신기하다.
그때 늘어선 광어상자 하나에 가오리 영령이 떡 버티고 있었다. 영령이라 해서 모두가 다 나쁜 놈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요정 같기도 하다. 생김새로 봐서는 웃는 얼굴이지만 입가에 처진 그림자가 불길한 예감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저걸 당장 처치해 버릴까?’
그때 낙찰을 받은 젊은 새댁이 물옷을 입고 광어 상자를 따로 빼내고 있었다. 순간 새댁의 어깨에 가오 요정이 풀썩 뛰어 오른다.
미준은 얼른 카메라를 들고 새댁의 어깨에 올라앉은 가오의 사진을 찍는 그 순간 갑자기 뒷목을 잡고 수산물 시장 바닥에 푹 쓰러져 버렸다.
“이봐 처녀. 왜이래?”
“남희야?”
그들의 소리로 봐서는 갑자기 쓰러진 사람은 새댁이 아닌 처녀인 것 같다.
한 아주머니가 급히 뛰어 오더니 처녀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남희야!”
주변 상인들이 이 들을 둘러싸고 팔다리를 만져주거나 몸을 흔들었다. 갑작스런 비명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 들었다.
“누가 119에 연락 좀 해 줘요.”
누군가 소리치자 전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중 한 청년이 물옷을 입은 채 인공호흡을 시키려고 두 손을 모아 흉부 압박호흡을 시도하려 하였다.
미준은 더 이상 방관할 수 만은 없었다.
“잠깐만요.”
미준은 그들을 헤치고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실신해 있는 그녀의 위에 다리를 벌린 채 버티고 서서 그녀의 머리에 고기상자를 끌어당겨 받쳐주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녀의 두 어깨를 잡고 지그시 눌렀다.
그때 이미 미준의 왼쪽 손은 요정의 몸통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구음으로 말을 하였다.
‘가.’
가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미준을 쳐다봤다.
‘내가 보여?’
‘까불지 말고 꺼져.’
순간 가오 요정은 얼음이 녹듯 녹아내리며 처녀의 어깨에 물방울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콜록 콜록.
잠시 후 처녀는 의식을 되찾으며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6척이 넘는 후리후리한 남자가 자신의 위에 걸치듯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죽은 건가요?”
어이없는 말이었다.
“와, 깨어났어,”
그제야 미준은 한쪽 발을 빼어 뛰어 넘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남희야, 괜찮아?”
“응, 엄마.”
처녀의 어머니는 미준을 붙잡고 몇 번이나 고맙다며 인사를 하였다.
미준의 손에는 가오가 남기고 간 우주 원석과 다이야 원석이 들어 있었다.
“누구세요?”
“....?”
“의사에요?”
“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일단 이것이라도.”
미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뜨려하자 아주머니는 비닐 봉투에 광어 몇 마리를 담아 쥐어주며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이런 일도 있구나.’
수산물 경매 시장을 나오는 미준의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고 있었다.
“저 사람, TV에 나와 동자승을 보고 백년 묵은 산삼을 깼다는 그 사람 아니야?”
“맞아. 나도 어디선가 본 사람 같다 했어.”
“그 사람이 의사였어?”
‘만약 저렇게 사람이 죽으면 의사들은 보통 어떤 진단을 내릴까?'
'심장 마비?'
그럴수도 있을 것 같다.
궁금해 하면서 카메라에 담긴 가오 요정을 보며 자신도 놀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 즉시 가오 요정 사진을 컴퓨터에 담아두고 다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정신병 진단으로 인한 자신의 자기 치료 연구 과정과 신경정신과 전문의로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남다른 의술을 익히게 된 동기와 과정을 상세하게 추가하여 기술하였다.
책 곳곳에 삽화 사진도 넣고 책의 표지에는 괴물 해태상의 사진을 넣은 뒤 책의 제목을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준은 아무도 모르게 부동산 전문가와 변호사를 찾아 자문을 받아가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장차를 위한 포석이었다.
중산 대호동 일대 야산을 대거 매입하는 계획과 필요한 자금을 자력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여행을 계획하였다.
이번부터는 여행이 아닌 사냥계획이었다.
본격적인 집시 헌터로써 출발하는 것이다.
캠핑카를 정비하고 필요한 식품들을 구입한 후 지도를 펴 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무조건 멀리부터 갈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부터 살펴보자.
이것이 미준의 사냥이면서 여행계획이었다.
아침을 먹고 금호대교를 거쳐 와우 생태호수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와우 호수공원에는 행운의 섬이 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호수 공원 풍경을 하나하나 담으면서 산책로를 따라 걸어 보았다. 참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인공 폭포에는 계절의 탓인지 물은 흐르지 않고 있었다.
호수 물은 너무나 깨끗한데 사람들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주말이 되면 찾는 사람들이 있을 것도 같다.
호수 주변 산책로를 따라 조금 걷다보니 부들군락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좋은 시설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될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둔 교량도 나오고 곳곳에 쉼터도 준비되어 있었다.
쉼터에는 플라스틱 의자인지 신소재 의자인지 구별 할 수는 없었으나 예쁜 색깔로 예쁘게도 만들어 놓았다.
그때였다. 빨강 눈 왕눈이가 진짜로 나타났다.
진짜 왕눈인지 환상의 영령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사라져라.’
조용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웠으나 꼼작하지 않는 것이 진짜 왕눈이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빨간 눈 왕눈이 주변이었다. 왕눈이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초점을 맞추는데 사라세니아가 큰 입을 벌리고 괴물처럼 빨간 눈 왕눈이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미준은 얼른 셔트를 누르고 등산 스틱으로 사라세니아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잠깐.”
그러자 사라세니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사라세니는 토종식물이 아니다. 어디서 왔는지 사라세니의 악령이 빨간 눈 왕눈이를 공격하려한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미준은 깜짝 놀라 살펴보니 분명 빨간 눈을 가진 왕눈이 말이었다.
“너 말도 하니?”
“본래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다 말을 해요.”
“그런데?”
“단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죠.”
“그런가?”
“아저씨, 잠깐만요.”
‘이런 것을 내가 환청으로 착각했던가?
그리고 왕눈이는 잠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놀랄 일은 왕눈이 떼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나 상준의 앞에 무엇인가를 토해 놓았다.
‘뭐지?’
바로 빨간 눈 왕눈이를 닮은 빨간 눈 천연보석이었다.
왕눈이 몸이 작은 탓인지 여러 마리가 차례로 뛰어 올라 토해 놓고 돌아갔다.
‘고맙다 왕눈아.’
미준은 그들이 준 보석들을 씻어 주머니에 넣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호수 가운데에 조성되어 있는 행운의 섬으로 들어갔다.
‘행운의 섬’
다행인 것은 섬으로 들어가는 나무다리가 너무나 예쁘게 놓여 있었다. 뭔지 몰라도 저 섬에 들어가면 행운을 얻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포물선 모양의 다리를 건너며 부들 군락지를 둘러보니 철지난 홍수련과 적수련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미준은 다시 사진을 담고 행운의 섬에 도착하였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늑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데이트 코스에도 좋고 산책하기도 더없이 좋다.
마침 그때 인적이 없는 와우 생태공원에 그림 같이 한 쌍의 커플이 산책길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뭘 좀 아네.’
얼른 카메라를 당겨 커플을 모델로 하여 촬영을 하였다. 아무도 없는 빈 호수보다는 누군가가 멀리 있다는 것이 사진 작품으로 돋보일 것 같았다.
얼마 후엔 그들 역시 상준을 보며 촬영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모델이 되나?’
그때였다. 행운의 섬에서 고즈넉이 풍경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어.”
바로 은혜였다.
“오빠. 오늘 저녁 시간 있어요?”
은혜의 음성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미안. 나 지금 멀리 있어.”
“어디?”
“여기 광양.”
“음. 여행?”
“그런 셈이지.”
“오빠, 나 할 말 있는데....”
“전화로 해. 여기 나 혼자 있어.”
“어제 밤 그 사람 말이야.”
“응.”
미준은 그 사람이란 은혜에게 행패를 부리던 그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은 짐작이 되었다.
“나 정말 그 사람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