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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에 미친 총각-158화 (158/225)

〈 158화 〉 여행중 만난 여자(3)

* * *

식사를 한 후 협재항(포구)을 돌아 올레길을 따라 용포리를 지나 한림항까지 천천히 걸었다.

어린이 날이라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가 유별나게 많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경선은 상준의 팔을 잡고 같이 걷는다.

바닷 바람이 시원해서 좋고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의 수도 적당해서 좋다. 꼬마 하나를 앞세워 놓고 꼬마의 부모가 아이의 뒤를 따라 반걸음으로 뛰면서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상준과 경선의 길을 비켜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한다.

얼굴에는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고 졸종 걸음으로 아이를 따라간다.

“행복해 보이죠?”

갑자기 경선이 그를 보며 묻는다.

“응.”

“저도 한 때 저런 걸 꿈꿨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

“그럴까요?”

경선은 살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여행길에 올랐었다.

“그럼 이제 시작이지.”

“전 고등학교 때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했어요.”

경선은 고등학교 1한년 때 처음 남학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둘의 키가 비슷했는데 남학생의 키가 더 이상 크지 않았고 자신의 키는 뒤늦게 많이 커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정이 들었고 그때는 늘 함께하는개 행복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그 남학생이 돌아섰다는 것이었다.

고교 3년을 늘 같이 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그만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핑게가 바로 둘의 키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남자보다 더 크면 무슨 문제 있어요?”

“글쎄.”

“제 키가 167이 되거든요. 그 친구는 165라고 하던데.”

“둘이 비슷했네.”

“처음엔 제가 더 작았어요. 162쯤 됐을까?

“헤어진 남친도 171 쯤 될 거예요. 그 친구도 언제는 키가 커서 좋다고 하더니 배신 때릴 때는 뭐라 했는지 아세요? 키가 안 맞데요. 자기하고. 그게 이유가 되는 거예요?”

“열등감 아닐까?”

“전 남자 경험이 몇번 있어요.”

“응.”

“근데 이상하게 대부분 남자들이 저보다 작아요. 전 키를 별로 보지 않았거든요.”

상준은 키가 커서 고민 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부모님은 뭘 하시는데?”

“대학 교수에요.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시고. 우리 엄마도 아빠보다 더 커요. 그게 뭐가 문제예요?”

“이제 돌아갈까?”

“여기서 좀 놀다가요.”

“그럴까?”

“헤어진 전 남친은 대학 선배였어요.”

“응.”

“대학 1학년 때 알게 된 선배였는데 군에 갈 땐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말라며 몇번이나 당부 하더니 제대하고 졸업하더니 자기가 먼저 배신 때렸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려 줬는데. 면회도 몇 번이나 갔어요.”

“그것 참.”

상준은 딱히 위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한림 중앙상가까지 걷게 되었다.

“다리 안 아파?”

“이야기를 하면서 천천히 걸으니 잘 모르겠어요.”

“대학 4년 간은 그 친구 하고만 사귄 셈이네?”

“그래서 더 죽겠어요.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연애도 해 봐야 했었는데.”

“충격이 컸겠다.”

“선배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결국은 그 남자들이 다른 여자를 알게 되어 배신을 때린 것이 아닐까 싶다.

경선은 마침 노래 주점이 보이자 상준을 끌고 그 곳으로 들어간다.

“또 노래방?”

“이제 우리 밖에 없잖아요.”

경선은 노래방에서 맥주도 시키고 안주도 시켜놓고 노래를 불렀다.

주로 트로트였다.

가사가 애절한 그런 노래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4050대가 좋아하는 노래 같기도 하다.

노래방에서는 이런 것을 불러야 신이 난다는 것이었다.

경선은 트로트 메들리를 켜두고 술도 권하고 춤도 추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자기 체면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택시를 타고 펜션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 시간에 상준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준은 직감으로 다슬이라 생각하며 얼른 전화를 받았다.

뷰미였다.

“아저씨.”

“이 시간에 왜?”

“어디에요?”

“제주도.”

“혼자?”

“어.”

“나도 같이 갈걸.”

“미안.”

“계획 있다더니 혼자 가실 계획이었어요?”

뷰미는 좀 아까워하는 어투로 말을 하였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그냥. 아저씨. 저 운전시험 걸렸어요.”

“그래, 축하한다.”

“이제 나도 차 사야지.”

“응.”

“언제 오실 거예요?”

“금요일.”

“다음 여행 때는 같이 가요. 약속 잊지 말고.”

상준은 샤워를 한 후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경선은 상준이 나온 뒤 욕실에 들어가 한 참 만에야 잠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저씨 노래 잘하던데요?”

“너도 잘했어.”

“트로트 좀 촌스럽죠?”

“아냐. 나도 좋아해.”

“부모님 맞벌이라 할머니와 살았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부르는 트로트를 좋아했어요.”

“응, 그렇구나.”

“들어가요. 아저씨.”

“이제 저 방 비었으니 넌 침대방에 가서 자.”

“아저씨는요?”

“난 우리 방에서 잘 거야.”

“나도 우리 방에서 잘거에요. 그 사람들 쓰던 방 싫어요.”

경선은 먼저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 정리를 하였다.

자신도 그 들이 쓰던 침대가 놓인 방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거실에서 자고 싶다. 웬지 방이 갑갑하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 다시 휴대폰이 울려 얼른 집어 들었다.

이번엔 뷰리였다.

뷰리는 팀장으로 승진한 뒤 제대로 인사를 못했다며 전화를 하였다.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 했다.

“꼭 그럴 필요 있을까?”

“그래야 아저씨랑 같이 자리라도 한번 하지 않겠어요?”

“그런가?”

‘이놈의 인기. 언제 좀 없어지나?’

“금요일에 내러 갈 거야.”

“바다에는?”

“이제 날씨도 좋고 제 혼자 전복도 잡고 해삼도 잡고 해요.”

뷰리의 말을 듣고 보니 미안한 생각보다 염려가 앞섰다.

종종 뷰리를 바다로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을 최근에는 한번도 지키지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그녀가 집에 다녀 갈 때 그녀를 배웅하며 식사와 업무에 대한 염려를 하자 가사 도우미 아줌마가 상준의 말을 들었는지 충고 비슷한 이야기가 한 기억이 떠올랐다.

“대표님, 뷰리도 그렇고 뷰미도 그렇지만 아가씨에 대해서도 조금씩 짐을 내려놓아야 해요.”

“무슨 말씀이세요?”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모든 사람을 다 챙길 수는 없잖아요.”

도우미 아줌마의 참견 같은 이야기가 처음엔 좀 어이가 없어 불쾌 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았다.

“내가 돌아가도 당분간은 시간 내기 어려워.”

“그럼 어쩌지. 다음 주에 할까요?”

“그때 가서 보자.”

방 정리가 끝났는지 경선은 다시 거실로 나왔다.

“이 시간에 전화가 많네요.”

“응, 업무상 전화.”

“잠이 안오시나 보죠?”

“그런 것 같네.”

“사실 저도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상준은 가방을 뒤져 허브차를 끓여 경선에게 주고 자신도 거실에 앉아 차를 마셨다.

옆에 앉은 경선에게서 펠로몬 향이 은은하게 풍겨오는 것 같았다.

결국 둘은 눈은 TV를 보고 있으면서 머리는 멍 때리고 있었다.

베란다 쪽 창문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자 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협제 포구 등대불이 떨어지는 봄비에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비가 오네.”

경선도 자리에서 일어나 상준의 옆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좀 올 것 같네요.”

“그래.”

“차라리 비라도 좀 푹 오면 좋겠어요.”

“그럼, 관광은?”

“관광이야 뭐 별게 있겠어요.”

“그래도 계획을 세워 왔을 거 아니야.”

“아뇨. 그냥 바람이나 좀 쇄고 싶어서.”

상준은 다시 소파에 앉자 경선은 방으로 들어가며 빨리 들어오라고 하고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상준은 오늘은 절대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있을 때는 하는 수 없었지만 둘 밖에 없는 펜션에서 더 이상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한 참 후 상준은 조명만 남겨둔 채 불을 끈 후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저씨.”

잠이 체 들까말까 하는데 경선을 문을 열고 상준을 불렀다.

“아저씨, 무서워서 혼자 잘 수가 없어요.”

유리창엔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봄비라 하기엔 너무나 많이 내리는 것 같았고 가끔씩 창문이 흔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상준은 꼼짝을 하지 않고 그냥 누워 있었다.

결국 경선은 요와 이불을 끌고 나와 거실 바닥에 요를 깔고 자리에 누우려다 이불 하나를 더 가지고 나와서 상준에게 덮어 주었다.

얼마 후 상준의 귀에 잠결인지 꿈결인지 경선의 흐느낌이 들려오고 있었다.

“왜?”

상준의 묻는 말에는 대답도 없이 그녀는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뭣 때문에 그래?”

“아니에요.”

상준은 이불을 가지고 소파 아래로 내러와 경선의 옆에 누웠다.

“아저씨, 미안해요.”

경선은 손을 뻗어 상준의 손을 찾더니 상준의 엄지손가락을 찾아 쥐고는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고 잘게요.”

상준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러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오늘 밤은 이렇게 그냥 자고 싶었다.

아니, 오늘 밤은 그렇게 해야만 될 것 같았다.

상준이 눈을 뜻을 땐 경선은 아침 준비를 하는지 씽크대 앞에서 서 있었다.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바람은 다소 잠잠해 졌으나 빗줄기는 오히려 더 많이 내렸다.

자신이 누운 곳은 거실 바닥이었고 찬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다.

몸을 뒤척이며 경선이 누웠던 요위로 올라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다시 눈을 뜻을 때 경선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상준은 누운 채 경선을 처다 보니 갸름한 얼굴과 긴 목덜미.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경선의 눈망울이 사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사슴 생각이 났을까?

그냥 누워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저씨 회사 엄청 크네요.”

이미 자신을 처다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상준도 태연을 가장했다.

“다음 인력 채용은 언제 쯤 하세요?”

“올 가을.”

“그럼 졸업 예정자도 응시할 수 있지요?”

“아마도.”

경선은 소파에서 일어나 상준이 누운 이불로 파고들었다.

“아저씨.”

“응?”

“오늘 비도 오는데 우리 그냥 여기서 보내요.”

경선은 모로 누운 채 한 팔을 뻗어 상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전 순결한 여자도 아니에요.”

“....?”

“이미 몇 번이나 남자들과 경험이 있단 말이에요.”

“몸의 순결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요?”

“마음의 순결이 중요하지.”

상준은 어제부터 그녀가 한 말에서 자신의 모든 걸 다 줬는데 배신을 때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미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자신의 순결을 다 줬건만 그들은 둘 다 자신을 떠났다.

이제 자신은 순결한 여자가 아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대로 하고 될대로 되라.

이런 기분을 가지고 괴로워 하는 것 같았다.

정작 그들이 떠났다는 괴로움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 그것도 다름아닌 자신이 사랑한 남자들의 배신으로.

죽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난 육체의 순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마음이고 정신이지.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가꾸어 간다면 순결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

“....?”

“요즘 세상에 과연 육체적 순결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저씨.”

경선은 얼굴을 들고 상준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이불속으로 머리를 묻으며 상준을 불렀다.

“아저씨. 한번 만 꼭 안아주세요.”

상준은 몸을 돌려 경선을 안아주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경선은 상준의 등까지 팔을 뻗어 꼭 안았다.

“고마워요. 아저씨.”

“이제 우리 밥 먹자.”

그들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종일 펜션에서 푹 쉬었다.

그녀의 표정도 많이 밝아졌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올 땐 상준의 팔에 팔짱을 끼고 같이 걷고 있었다.

그녀와 헤어지면서 상준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가. 현선경.”

“잊지 않을게요. 아저씨. 그리고 언젠가는 신세 진 것 모두 다 갚을게요.”

상준은 공항에서 그녀가 떠나가는 것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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