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사랑의 열병
* * *
“아, 예, 낚시 해야죠.”
“오빠.”
“미안. 죄송.”
상준은 친구 민수와 통화를 하면서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조금 후 그들은 철수준비를 하여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신 팀장과 희진에게 방을 각각 사용토록 하고 자신은 거실에서 TV를 틀어두고 소파에 기대었다.
한참 동안을 멍 때리다 조금 전 상황을 되새겨 보다 샤워를 한 후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모두 잠이 들었는지 정적이 감돌았다.
상준에게도 스르르 잠이 몰려왔다.
그때 희진의 방문이 열리더니 상준의 머리맡에 조용히 앉았다.
희진의 향기가 상준의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눈을 뜨려다 무슨 말을 할지 당황이 되어 자는 척 가만히 있었다. 거실의 불은 환하게 켜진 그대로였다.
“오빠.”
상준은 죽은척 하고 가만히 있었으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볼것 같아 눈꺼풀이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오빠.”
희진의 목소리는 옆방에서 자는 신 팀장을 의식했는지 작으면서도 차분하였다.
“정말 나를 끝까지 동생으로 몰아갈 거야?”
“...”
“내가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그래도 난 오빠가 언젠가는 날 사랑해주리라 생각하고 있었어. 동생이 아닌 여자로 말이야. 그래서 더 이상 부담주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 했는데.”
상준은 몸을 일으키고 자리에 앉아서 희진의 손을 잡았다.
“희진아. 지난번에 너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잖아. 그게 진심이고 모두 사실이야. 넌 살아 돌아온 내 동생이야.”
“.....”
“나도 한때 널 이성으로 생각하며 널 안고 싶었어. 그런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야. 오빠도 남자야. 너 같이 착하고 예쁜 여자를 누가 싫다 하겠어. 그런데 그럴 때마다 머리를 때리는 뭔가가 있었어.” 상준의 얼굴은 확고부동한 확신이 있었다.
“.....?”
“죽은 내 동생 상미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니까 하늘에서 보내준 아이가 맞다고. 분명 그럴 거야. 난 그걸 확신하게 됐어. 결코 너가 싫어서가 아니란 말이야. 나도 널 너무나 사랑해.”
희진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간밤에 먹은 술기운 탓인지 모두의 얼굴이 해쓱하였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신 팀장이 연대표가 과음한 것을 알고 자청해서 운전대를 잡았다. 뒷자리에 앉은 희진과 상준은 침묵만 지킨 체 창밖을 내다보았다.
“식사는 군산에서 하고 가시지요?”
아무 말이 없자 신 팀장이 점심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그렇게 해.”
“그럼 군산에서 유명한 맛집으로 모실게요.”
식사를 하고 나오며 신 팀장은 또 한마디 보태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말라죽을 것 같습니다.”
하늘을 처다 보며 다시 한 마디 하였다.
“두 분 간밤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왜?”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아. 이제 알겠다. 대표님이 최 주무를 친구에게 주겠다고 하여. 헤헤헤. 최 주무. 그건 대표님 농담이지.”
몇 마디 농담을 해 봐도 전혀 분위기 개선이 안되자 신 팀장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군산에서 올린 차는 벌써 서해안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고창 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와 순천을 가쳐 중산에 도착했다.
*
한편 다슬은 하계휴가를 마치고 직장에 출근했으나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러 갔으나 연상준 선배의 진심을 듣고 나니 그만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슬은 입사 초기에 아는 직장 선배의 소개로 처음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얼굴이 핸섬하고 매너가 좋은 유망한 성형외과 의사였다. 일류대학 의예과를 나와 대기업 대형병원에 근무하는 그는 자신의 능력만큼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 점 때문에 마음이 끌려 소위 사랑이라 생각하며 그를 만났다.
그 또한 다슬에게 친절하고 섬세했다. 막상 장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난 큰 포부를 가지고 있어. 언제 까지나 남의 밑에서 일할 순 없잖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나이로써 이만한 포부는 가져야 한다고 다슬은 생각했다.
“그래서 말이야. 나의 배우자가 될 사람은 나의 꿈을 이루는데 내조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
“남진씨, 그 말이 무슨 뜻이에요?”
“내 부모님은 나의 뜻을 밀어줄 능력이 없어. 그렇다면 적어도 배우자가 될 사람의 집안이라도.”
다슬은 그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사귈 때는 친절하고 자상하게 다슬을 대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요즘 바빠서 말이야.”
휴가를 얻어 연락을 하면 그런 남진의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러려니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만나 그는 결국 다슬에게 내조를 언급하며 본 심을 털어 놓았다.
그런 이별 통고를 받고도 다슬은 조금도 가슴 아픈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 넌 능력 있어 좋겠다. 내조 진짜 잘할 수 있는 집안 좋은 사람 만나 출세 많이 해라.’
다슬은 결국 그를 만나면서 그의 학력과 그의 직업에 눈이 멀었다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도 그와 조금도 다름없는 속물이었다고.
그 후 어느 날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비워둔 너 방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안돼, 엄마.”
“가시네, 집에는 오지도 않으면서 방만 비워두면 뭘해?”
“그래도 안돼.”
수협조합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평생 아버지 그늘에서 살림만 하던 어머니가 방황을 했다. 자신의 밑에서 남매를 둔 어머니는 가장으로서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방황만 하는 어머니가 싫었다.
“엄마, 우리 세 식구 힘 합쳐서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봐요.”
그러나 어머니는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인지 자식의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닐 때부터 고향 집으로 잘 가지 않았다.
졸업을 한 후 취업을 하고는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 까지 본인의 월급으로 지원을 했다.
자식들의 변화가 어머니께 자극이 되었는지, 남편의 죽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하셨는지 다슬의 어머니는 살고 있던 집터와 집 주변 텃밭을 모두 합쳐서 민박집을 운영하시게 되었고 삶의 의욕을 되찾아갔다.
“너 방에 누가 오는지 알아? TV에 나오는 그 사람. 괴물 고기를 낚아 나라가 온통 떠들썩한 그 사람.”
“뭐? 그 사람이? 그래도 안돼. 나 앞으로 집에 가지 말란 말이야?
“가시네. 언제는 너 집에 왔어? 오지도 안하면서.” 다슬은 갑자기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모처럼 집에 들러 그를 만난 순간, 다슬은 그가 운명이라 생각했다.
“연상준.”
그를 본 순간을 다슬은 잊을 수가 없다.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고 온 몸에 열기로 화끈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눈길이 마주칠 땐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출근을 위해 돌아왔으나 생각할수록 가슴이 설레며 잠을 설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괴물 낚시대회 응원을 핑계 삼아 해산까지 다녀오면서도 자존심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 말도 제대로 못했으면서 그의 모습하나하나가 다 좋아 보였다. 인터넷을 뒤지고 지나간 방송프로를 모조리 찾아 습득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보고 또 봤는지 셀 수가 없다.
급기야 다슬은 자신의 자존심을 모두 팽개치고 대학 후배라는 빌미를 가지고 그의 원정 낚시터 정포항까지 가지 않았던가?
“내가 너무 산티 나게 논 것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가슴 설레고 심장이 떨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의 친구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과 사귀거나 결혼을 해?” 그때 선배는 그렇게 물었는 것 같다.
“기억에 다 떠오르진 않지만.... 어떤 친구는 의사, 또 다른 친구는 변호사도 있고.”
다슬은 그때 대답을 하면서 자신의 직장과 자신의 미모에서 긍지와 자부심으로 자신의 진가를 돋보이게 하려고 대답한 것 같다.
어쩌면 교수, 검사, 판사까지 모두 들먹이지 않았는지 기억이 없다. 사실 이것은 직장에서 들은 자신의 동료 중 그런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였거나 만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혹시 그 소문들을 다 말하지 않았을까?”
선배의 거절인지 배려인지 자존심 상한 말을 듣고 올라오면서 상준의 얼굴을 생각해봤다.
‘몰라, 시’.
‘선배가 없으면 못살 것 같은데. 자존심이 뭐 대수란 말이야’
참다못해 결국 문자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 말처럼 그럴 수는 없어. 차라리 나보고 죽어라고 해.”
이정도 되면 옷을 홀딱 벗고 자신의 몸까지 던진 격이다.
그렇지만 않았어도 여름휴가 때 고향 진호해수욕장으로 친구들을 불러 멋진 여름휴가를 보내려 했는데.
그것조차도 펑크가 나고 말았다.
‘씨, 지가 먼데 날 이렇게나 비참하게 만들어.’
다슬은 스스로 위로하며 잊어버리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스페인으로 가는 여객기에서 기내식을 배식하려 순회중인데 어떤 남자가 도시락을 받는체 하며 슬쩍 메모를 쥐어주었다. 얼굴을 쳐다보니 눈웃음을 친다.
‘미친 놈.’
저런 놈은 너무 많다. 처음 메모를 줬을 때는 받지 못하고 도로 슬쩍 넘겨버린 때도 있었다. 괜히 심장이 뛸 때도 있었다.
이젠 보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안다.
‘예뻐요. 문자주세요. 그리고 전화번호.’ 아니면 대놓고
‘사귀고 싶습니다. 전화번호 좀.’
간혹 이런 손님도 있다.
‘사랑합니다. 정다슬씨. 번호좀 줘요.’
요즘은 아예 메모조차 안본다.
미칠것 같아 다슬은 룸메이트 정희에게 술을 사달라고 넋두리를 하였다.
“너 무슨 일 있지?”
생맥을 마시며 다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정희가 물었다.
“포태나?”
“말해봐. 너 고향 해수욕장계획 취소할 때부터 감 잡았어.”
“사실 나 미치겠어. 그런데 말 못해. 말하면 나보고 미쳤다고 할거야.”
“남자 이야기구나. 맞지?”
“응”
“그데 왜? 남자가 왜?”
“몰라, 나 말 못해.”
다슬은 친구에게도 자존심이 상해 말을 할수 없었다.
“가시네, 짝 사랑하는구나.”
“짝사랑?”
“너 미치겠지. 보고 싶고, 안기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비슷해.”
친구 정희는 깔깔 웃었다.
“너 어떻게 잘 알아? 너도 그런적 있어?”
“아니. 난 없어. 그럼 너 그 사람에게 고백해.”
“고백?”
다슬은 아무리 친한 정희라지만 고백을 했는데도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는 더 할 수 없었다.
술만 들이키며 다음 휴가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