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섹시한 스튜디어스(3)
* * *
먼저 가겠다고 나서는 정다슬.
허나 응원을 하러온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없어 그녀를 끝까지 잡아 두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용한 식당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보내고 싶었지만 행사가 끝나지 않아 그럴 수도 없었다.
정다슬이 생긋 웃으며 상준을 향해서 머리를 까딱한다.
그녀에게도 상준에게도 오늘은 참 놀랍고도 기적같은 하루였다.
“이제 전 가야겠어요. 오늘 상준씨 멋졌어요.”
“감사합니다. 모두 다슬씨 응원 덕분이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려 했는데. 당장은 여건이 안되네요. 다음에 근사하게 술 한잔 살게요”
“기대할게요. 전 올라가야 해서. 집으로 돌아가시거든 우리 어머니께 안부 좀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일정이 끝나는 대로 차를 몰아 해산을 떠났다.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것이 도대체 얼마만일까?
헌터.
연상준 헌터.
'내가 헌터 자격증을 받다니.'
정말 사람 운명이라는 건 한치 앞을 알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막연하나마 행복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고창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담양을 거쳐 순천까지 도달했다.
순천에서 하룻밤을 묵고가려고 지나가던 길 옆에 있는 한 모텔에 방을 얻어 짐을 풀었다. 새로 지은 모텔인지 꽤 깨끗하고 지낼 만 하였다. 새벽 두시가 넘었는데도 TV에선 오늘 있었던 낚시대회 이야기가 채널마다 보도되고 있었다.
어느 듯 공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연예인들보다 유명해 지는 건 아니겠지?’
또 다시 신종 괴물을 잡아버렸으니 뭐.
샤워를 한 후 자리에 누우니 포근한 온기가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내일은 일요일.
마음놓고 휴식도 취할 수 있다. 이왕 이곳에 들린 김에 정원박람회장에 가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순천에 오면 꼭 한번 둘러보고 가라하지 않았던가.
“이야, 공기 좋다.”
잠에서 깨어나니 아침 공기가 상쾌하였다. 일기 예보에는 곧 장마가 올 것이라 대비에 만전을 다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었다.
순천정원박람회는 못들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시간을 내려하면 뜻대로 안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상준은 취업준비에 몇년간이나 소비를 하였다.
비록 박람회 기간은 아니었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각국의 정원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어떤 곳은 일부분을 떼어내어 자기가 살고있는 마당으로 한번 옮겨가고 싶었다.
가능한 일이라면.
문득 언젠가 집을 마련한다면 저렇게 정원을 만들고 싶었다. 비록 작은 소망에 불과 하지만.
아니, 지금이라면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나?
길옆 벤치에 앉아 풍경을 내려다보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정답게 이곳을 산책하고 있었고, 어떤 아주머니는 포즈를 취해가며 촬영에 열중이었다. 또 다른 연인들은 팔장을 하고 정원을 배경으로 셀카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개중에서 상준의 눈을 가장 끄는 장면은 머리가 하얀 외국인 노부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길을 거니는 장면이었다.
‘누구나 평생을 살다보면 저런 모습으로 늙어가고 싶겠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인가? 한편으로는 자신이 요즘들어 부쩍 외로움을 타는가 싶기도 했다. 연희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가로저어서 떨쳐버렸다. 자연스럽게 소현이나 정다슬씨의 얼굴도 떠올랐다.
아니, 관두자.
지금이 본인의 황금시기다.
일단은 잡생각을 떨치고 일상으로 돌아가자.
중산까지 오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진 않았다.
동네 사람들도 곳곳에서 인사를 건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보였다.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주머니가 버선발로 한 걸음에 달려 나왔다.
너무나 환하게 반겨주니 그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며칠만에 만나는 거긴 하지만,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여전하셨다.
“총각. 이번에 일등 했다며?”
“예, 덕분에요.”
“내 그럴 줄 알았어.”
“고맙습니다.”
“우리 다슬이가 그곳에 갔다며?”
“아, 맞다. 아주머니께 안부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집에는 잘 오지도 안으면서 그곳에는 어떻게. 하여튼 계집애!”
“분위기를 보니 낚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태평하게 이야기하는 상준.
아주머니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총각 가끔씩 눈치없다는 말 듣지 않아?”
“예? 제가요? 아니요, 눈치 빠르다는 말은 자주 듣는데?”
“흠흠. 그럼 됐어. 아무튼 다슬이 그 애도 클 때는 가끔 낚시도 하곤 했었어. 해변에 사는 아이들이야 다 그렇지 뭐.”
“네, 그렇겠네요.”
대회 우승으로 상준은 각 언론사에 다시 출연하게 되었고, 프로 헌터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며 일확천금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해산 일대와 중산 일대는 다시 낚시꾼이 붐비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 [주식회사 유성]에서 CF제안이 들어왔다.
주식회사 유성은 낚시도구를 제작하는 유명회사였다. 몇 번을 거절했으나 출연료도 높고 이미지 부각에도 도움이 된다하여 출연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정을 마치고. 며칠 뒤 횟집식당에 연락하여 그동안 모아둔 고기들을 모두 넘겼다.
비교적 싼 값에 넘기다 보니 연락만 하면 마다 않고 곧잘 달려오곤 하였다. 수족관을 본 식당주인이 매우 놀라워했다.
“이 수족관 어디에서 사왔어?”
“왜요. 좀 이상해요?”
“아니, 수족관이 금고도 아니고, 하도 특이해서.”
“아, 그런가요.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겁니다.”
“헌터분이어서 그런지 어디가 달라도 다르네.”
식당 사장은 상준의 수족관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신기해하였다. 물론 자신도 처음에 수족관을 봤을 때 비슷한 생각을 하였지만.
“연 프로! 나하고 같이 낚시 한번 가보자고. 내 조그만 배 한척 있는데. 좀 먼 바다로 나가면 꽤 낚시가 된다고.”
“그러지 말고 사장님! 작은 어선 하나 구입할 수 없을까요?”
사장은 한참도만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어선? 제법 값이 나갈 텐데?”
“어느 정도 하지요?”
“몇천은 하지. 그러지 말고 요즘 젊은이들은 요트를 많이 구입한다고들 하던데.”
“요트요? 그것 엄청 비싸잖아요.”
“좀 비싸긴 해도 휴양도 하고, 고기도 잡고, 얼마나 좋겠어? 난 돈 있으면 요트하나 사고 싶은데. 한때 내 꿈이었지. 하하하. 지금은 이제 헛된 꿈이 되었지만.”
식당 사장은 옛 생각이 나는지 약간의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사연이 있어요?”
“요트는 내 한때 작은 꿈이었지.”
“작은 꿈요?”
“난 이곳이 고향인데.”
사장은 수족관 옆에 서 있는 포구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 라이터 불을 붙였다.
“내 총각 때의 꿈이 바로 그것 이었어. 남진이 알지. 가수 남진이?”
“예, 조금.”
“그 사람 노래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 뭐 그런 노래가 있잖아?”
사장은 대 놓고 노래를 불렀다.
보기와는 달리 살짝살짝 리듬을 타면서 제법 흥미있게 발바닥으로 박자까지 맞추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노래까지? 이 아저씨 꽤나 재미있다.
“그래서요?”
“그게 내 꿈이었지. 바닷가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요트 한척사서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 달콩 즐기면서 평생을 사는 것.”
사장은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옛 생각을 떠 올리는 모습이었다.
“그렇군요.”
“그 사람이 지금 우리 집 사람이야.”
“아, 그러세요? 그럼 한 가지 꿈은 달성하셨네요?”
“달성? 뭐가?”
“그래도 아주머니와 결혼하셨잖아요?”
“그러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해서 꼬셔놓고 30년을 식당 아줌마로 고생시키고 있어.”
식당 아저씨는 담배 한가치를 다시 꺼내 물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였지만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사실 어릴 때 상준의 꿈도 아저씨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마당이 넓은 주택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어머니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니, 그 꿈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식당주인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문 밖에서 누군가 상준을 불렀다.
“총각, 총각 있어?”
밖을 내다보니 얼마 전 자신을 초대했던 소현이 어머니였다. 동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이젠 꽤나 익숙해졌다. 게다가 이분과는 또 특별히 각별한 것이, 물에 빠진 소현이를 구해줬다고 집에 초대까지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예, 아주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총각. 오늘 낚시 가려구?”
“예, 오늘 화요일이니 가야겠지요. 무슨 일 있어요?”
“주말에는 쉬지?
“네, 일요일은.”
소현이 어머니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애가 이번 토요일에 온다고 연락 왔네. 지난번엔 방학 되면 온다고 하더니.”
“아! 예, 그런데 무슨 일로?”
상준이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몰라. 우리 애가 총각에게 말을 좀 전하래. 주말에 어디가지 말고 꼭 있어달라고?”
“소현이가요? 무슨 일이지?”
“몰라. 가시나! 자기가 연락하지 않고 꼭 나보고 연락을 해달라고 해서.”
“.....?”
“우리 소현이 총각 집에도 갔다면서? 어머니도 만났고?”
“아, 그런가 봐요. 우리 어머니가 식당을 하시거든요.”
“알아. 들었어! 성민이 하고도 같이 간적이 있었데. 어머니가 친절하게 잘 해주신다고.”
“네.”
그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언제 나오셨는지.
이쪽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어왔다.
“소현이 어머니가 우리 집에 웬일이세요?”
“안녕하세요? 총각 좀 만나려구요.”
“총각을요?”
“좌우튼 난 소현이 말 전했어. 가요. 그리고 소현이 오면 총각 전화번호 좀 가르쳐 줘.”
“...예? 예.”
소현이 어머니가 돌아가고.
아주머니가 은연중에 물어왔다.
뭘까. 뭔가 분위기가 기묘한데.
“총각. 저 여편네 왜 왔어?”
“뭐, 그냥.”
“총각 소현이와 사귀는거야?”
“예? 아니요. 사귀긴요. 지난번 바다에 빠졌을 때 구해준 것 뿐이죠.”
“으응, 알겠네. 한턱 쏘려고 그러나 보지. 그때 초대한번 받았잖아?”
주인집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안채로 들어가셨다. 상준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아주머니들이 떠난 후 상준은 소현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은 좀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지난 번 부산 어머니 가게에 들렀을 때 소현이를 들먹이던 어머니 말씀이 머리에 맴돌았다. 소현이를 어지간히 칭찬하셨던가.
‘뭔 잡생각을.’
낚싯대를 메고 바다로 나갔다. 해안가 곳곳에 낚시꾼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싸인 요청이 들어와서 팔자에도 없던 싸인을 만들어내서 몇장이나 해줬다. 노래미 몇 마리를 건져놓고나니 이후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낚싯대를 걸쳐두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무렵부터 흐리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조용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내 인생도 참.”
한기가 스며온다. 조용히 내리는 보슬비는 어느새 옷을 적셔 가슴까지 적시고, 잔잔히 밀려오는 작은 물결은 갯바위를 쓰다듬고 돌아서는데, 아릿한 마음의 상흔이 보슬비 타고 흘러내린다. 보슬비가 내릴때면 가끔씩 옛 생각이 떠오른다. 빗줄기 사이로 아련한 옛 추억이 스치듯이 지나간다. 세월이 흘러 추억도, 상처도 희미해져 가는데, 오늘은 그 사람이 생각이 난다.
때로는 비가 오는 밤이 좋다.
오늘 같은 빗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밤에.
바람도 잠이든 고즈넉하고 운치있는 깊은 밤.
은빛 잔물결만이 끝없이 밀려와 등댓불 아래 맴을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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