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전초
* * *
하울의 감탄사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샤샤는 완전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입고 있던 홀 원피스는 물벼락을 맞고 몸에 달라붙어 샤샤의 풍만한 굴곡을 여실히 드러냈고, 달빛에 비친 속옷라인은 아찔한 자태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침착하게 물에 젖은 마치 미역처럼 변한 앞머리를 옆으로 제꼈다. 이미 샤샤가 주려고 만들었던 디저트는 물에 젖고 바닥에 떨어져 엉망이 된 상태, 그녀는 그것을 멍하니 보았다. 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참으려 했으나 너무나 화가 났다. 샤샤가 뭐라 쏘아붙이려는 찰나 두 눈이 마주쳤다.
“......”
“......”
샤샤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차로 들어가 버렸다. 리나의 눈동자에는 원한과 복수심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민혁은 리나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어찌됐건 지금은 동료였고 반목은 좋지 않았다. 리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고 다시 싸우지 않겠다 말했다. 이후 샤샤는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이동 할 때도 그녀는 리나를 무시하고 다른 이들과만 대화를 나누었다.
완벽히 단절된 것이다.
민혁은 굳이 두 사람 사이를 화해시킬 마음이 없었다. 리나의 행동은 분명 잘못되었지만 그렇다고 샤샤의 행동도 옳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나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나서야만 했다. 그는 일단 리나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리나”
“왜요 아저씨?”
그녀는 그의 무릎에 앉은 채로 고개를 위로 들어 민혁을 바라보았다. 살인적인 귀여움이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요즘 혹시 샤샤님과 함께 다녀서 힘드니?”
“......”
리나는 민혁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망설이다 가져왔던 쥬스를 꿀꺽거리며 마셨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리나가 입을 열었다.
“힘들기 보다는... 그 사람하고 얼굴 마주치는 거 자체가 싫어요...아무리 용서했다고 했지만 그 사람은 부모님의 원수나 다름없어요.. 보고 있으면 화가 나요... 그리고..처음 말하는건데... 제가 만약 도망치지 않았다면..아저씨가 절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쯤 인간 남자 아래에 깔려 성노예가 됐을 거에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 사람을 좋게 보겠어요...”
그녀가 내놓은 솔직한 답변에 민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잃었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학창시절에는 그것을 이유로 되도 않는 화를 내고 짜증을 주변에 부렸다. 다행히 사고를 칠 때마다 봉국이 곁에서 컨트롤을 해줘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는 문득 리나가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나 샤샤가 미웠을까 그로써는 상상 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대견하게도 샤샤를 용서했다. 비록 미운짓을 하긴 했어도 그건 리나 나름의 어리광이었을 것이다.
“아저씨?”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는 민혁의 행동에 리나는 고개를 위로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민혁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어...으악!...아저씨 으아 이게 아닌데...어어어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리나는 잠시 멍을 때리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발버둥을 쳤지만 그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도망치기를 포기하고 몸을 웅크려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정수리 위로 모락모락 김을 내며 토마토가 되어버린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의 품에 안겨 있어야만 했다.
“저녁 다 됐어요~”
아리나가 저녁 식사가 다 됐음을 알리자 그는 리나를 풀어주었고,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의 품에서 도망쳤다. 민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리나의 뒤를 쫒아갔다.
그 날 리나의 속마음을 확인한 민혁은 둘을 화해시키는 것 보다 다른 방법을 사용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 방법은 바로 경쟁이었다. 샤샤 라이너, 리나 두 사람은 민혁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스킨십과 엮어 잘만 이용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 민혁은 생각했다. 그는 준비에 앞서 티샤와 아리나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주고 양해를 구했다. 그녀들은 민혁의 계획이 잘 될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겠다고 답했다.
“샤샤님 오늘도 무척이나 아름다우시네요.”
민혁은 우선 질투 유발 작전에 들어갔다. 그는 씻기 위해 마차에서 나온 샤샤에게 다짜고짜 칭찬을 던졌다.
“어어...아..네에...감사해요....”
샤샤는 그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이게 꿈인가 싶어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방긋 웃고 있는 민혁의 시선에 볼을 발그레 붉혔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흐음 아주 좋아. 그럼 리나의 반응은?’
그는 자신의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샤샤를 뒤로하고 곁눈질로 리나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입 안 가득 바람을 불어 넣어 볼을 빵빵하게 만들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공적이었다. 민혁은 좀 더 리나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샤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터질 듯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면서도 그와의 대화가 즐거웠는지 입 꼬리가 잔뜩 높아져 있었다.
“우연이네요..민혁님도 그 차를 좋아하시나요?”
“네 다른 차는 뒷맛이 써서 잘 안 먹지만 페이즐링은 그냥 먹어도 괜찮고 과자와 함께 먹으면 사르르 녹는 맛이 아주 좋아 자주 마십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같이 아이지스 왕국의 명인거리에서 한 잔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좀만 붙으면 어깨가 닿을 정도의 거리, 민혁과 샤샤는 즐겁게 대화의 꽃을 피웠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리나는 열이 받았다. 그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그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질투가 났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로 다가가 옷깃을 붙잡았다. 순간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리나는 속으로 환호했으며, 샤샤는 좋은 분위기가 그녀로 인해 깨져버리자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리나.”
“아저씨 짐 옮기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자극을 주는 건 위험했다. 그는 샤샤에게 실례하겠다고 말하며 리나가 이끄는 곳으로 가 그녀의 짐 정리를 도와주었다. 일행의 짐은 기본적으로 많지 않아 정리가 금방 끝났다. 다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 민혁은 자신의 옆에 꼭 붙어 있는 리나와 샤샤의 눈치를 살폈다. 샤샤는 대놓고 리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리나는 비웃음을 지으며 그의 팔뚝에 달라붙었다. 평소 서로를 무시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작전이 효과가 있다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의 작전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리나가 보는 앞에서 샤샤와 손을 잡는다던가. 샤샤의 눈앞에서 리나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그 둘은 서로 민혁의 스킨십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리나는 애정결핍에 걸린 강아지처럼 시도 때도 없이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샤샤도 마차에 박혀만 있지 않고 리나를 견제하기 위해 민혁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서로를 헐뜯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지만 둘이 대화도 몇 마디 나누었다. 계획은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둘이 떨어져 나간 밤이었다.
“오늘... 리나한테 키스해줄 때 너무 사심이 들어간 거 아니에요?”
“아리나...아,알잖아 모두 작전인거..나 그런 마음 전혀 없어.”
“...의심된다.....아무래도 이걸 다른 여자들에게 놀리지 못하도록 좀 뽑아놔야 것 같다.”
티샤와 아리나는 그의 천막으로 찾아와 추궁했다. 민혁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들이 생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티샤는 집요했다. 그녀는 훌륭한 막대기가 된 그의 물건을 콱 잡아채며 눈을 빛냈다. 아리나 또한 상의를 벗으며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음 날, 민혁은 난생처음으로 아침 텐트를 치지 않고 있는 자신의 물건을 발견하고 복상사(?上死)의 가능성을 느꼈다.
제국의 황성 크렐린까지 이틀 남짓 남은 거리에서 일행은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외지인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곳이라 숙박시설도 하나 밖에 없었지만 일행은 이곳에서 잠시 쉬다 가기로 했다. 마을 유일의 숙소 ‘바람 머무는 언덕’의 1층 식당 민혁과 일행은 음식을 맛보기 위해 양껏 주문을 했다. 종업원들은 오랜만에 물주가 등장하자 신이 나서 조리된 음식을 날랐다. 과일 졸임을 올린 오리 바비큐와 돼지 등심을 잘 구어 여러 가지 야채와 같이 꿰어 놓은 꼬치구이까지 맛도 꽤나 좋았다.
“리나 거기 소스 좀 집어줄래?”
민혁도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다. 그는 볶음 면을 먹던 도중 간이 약간 부족했는지 칠리소스로 보이는 병을 달라고 리나에게 부탁했다.
“네 아저씨!”
리나는 닭고기를 입에 넣던 것을 멈추고 그가 부탁한 소스 병을 향해 손을 뻗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의 테이블이 워낙 컸기 때문에 중앙에 소스 병을 잡기 위해서는 키가 작은 그녀로서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손을 뻗자 소스 병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리나는 오기가 생겼는지 온 몸을 다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노력이 통했는지 손끝이 병에 닿았다. 그런데 불쑥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소스 병을 낚아 채갔다.
“어머 리나 테이블에 올라가면 못써 이럴 땐 어른에게 부탁 하렴~”
그림자의 주인공은 바로 샤샤였다. 그녀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소스 병을 민혁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그에게 내밀었다. 칭찬해달라는 뜻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을 샤샤가 하고 있었다. 민혁은 익숙한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샤샤는 헤벌레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길을 만끽했다.
“으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리나는 볼을 부풀리면서 항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일행은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가졌다. 아리나는 민혁과 대화를 하면서 벌써부터 저녁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옆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던 샤샤가 나선 것은 그 때였다. 그녀는 오늘 먹었던 음식 중에서 감명 받았던 것이 있었는지 저녁은 자신이 직접 만들어주겠다 나섰다. 일행은 그녀의 디저트 맛을 이미 본 후였기 때문에 상당한 기대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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