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전초
* * *
마하자크는 천천히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는 샤샤가 무릎 꿇고 있는 성벽이 잘 보이는 위치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얼음처럼 얼어붙어 있는 제임스를 불렀다. 마하자크의 부름에 그는 등 뒤에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이 전 영주를 배신하기 전 보여주었던 한 없이 따뜻했던 그 눈빛이었다. 제임스는 약간 안심을 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잘 자라셨습니다...”
제임스는 그의 옆에 서서 질문에 대답을 했다.
“흠 자네도 그리 여긴다니 다행이구만 그런데 말이야 나는 저 한 떨기 같은 꽃에 벌레가 꼬일까 걱정이 된다네”
“.......”
순간 마하자크의 눈빛이 무저갱의 그것과도 같이 섬뜩하게 빛났다. 제임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만약 눈이 마주친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전부 토설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에 마하자크는 피식 웃더니 기세를 거두어 들였다. 공간을 장악했던 힘이 순식간에 증발했고, 제임스를 압박하던 것들이 사라졌다.
“용서 받길 원하나?”
갑자기 날아든 매서운 화살과도 같은 질문.
“영주님... 저는..!”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앙 다물었을 뿐이다. 마하자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아 됐네. 내 용서해주지 나라도 그럴 수 있어. 집에는 아내와 두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데 필라스크의 협박에 날 배신하지 않고 베길 수 있겠나”
마하자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제임스를 힐끗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감, 감사합니다..”
그의 용서에 제임스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에게 들킨 순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고통을 받으며 심판 당할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 영주는 그를 용서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에 대해 사면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벅벅 아무렇게나 닦고 한 번 더 제대로 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사죄의 뜻을 밝히기 위해 등을 돌리려했다.
화르르륵
“허나 말일세..... 날 배신하는 것은 용서해도 저 아이를 배신하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네....”
그런데 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몸이 통제권을 잃었다. 정신이 멀어졌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그는 비명도 살려달라는 구조신호도 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몸이 이미 지옥의 염옥에 의해 불 타 재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르르르륵
“안타까운 일이지..오랜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건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네. 내 꽃이 자라는데 벌레가 끼는 걸 참을 수는 없으니 말이야. 미안하네 제임스 자네 가족들도 내가 손수 자네 쓸쓸하지 않도록 곁으로 보내주도록 하겠네.. 그 동안 수고했네.. 편히 쉬시게”
화마에 휩싸인 제임스, 형상만 남았음에도 자신에게 손을 뻗는 그를 보며 마하자크는 조용히 읊조렸다. 이내 불길은 그 크기를 점점 더 불려갔고 이내 하늘로 용솟음치며 제임스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재만 남은 자리 마하자크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딸을 위해 구세대의 먼지 한 톨도 남기고 싶지 않았는지 바람을 일으켜 재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영주민들의 환호성을 받고 있는 딸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영주성, 분위기가 밝아야 할 터인 이곳은 마치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시종들과 메이드들은 모두 흐느끼며 일을 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존경하는 그의 마지막을 부정하고 있었다. 맥컬킨과 기사들은 연병장에 무릎을 꿇고 그가 회복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샤샤 라이너는 침대에 누워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마하자크 라이너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제발 눈을 뜨세요! 아버지!”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겨우 되찾은 아버지다. 이제 마지막 남은 혈육, 그까지 잃고 난다면 남는 건 없었다. 샤샤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의 팔을 흔들며 어서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제 임무를 수행하는 은퇴하는 노기사처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샤샤는 결국 침대보에 얼굴을 박고 흐느꼈다.
[하울 저 남자.....]
뒤에서 그녀의 절박한 외침을 지켜보던 민혁은 하울에게 전음을 보냈다.
[..불가능해 진원진기까지 다 써버렸어. 아마도 깨어나자마자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 게 원인이겠지.]
하울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마하자크는 필라스크가 처형된 후 하울의 치료를 받아 기적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말고 회복에 전념하라는 하울의 말을 듣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무리하게 밖을 돌아다녔다. 영지로 나가 백성들을 보살피고, 쾌쾌 묵은 은원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죽은 듯 잠에 빠진 게 이틀 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에서는 생기가 사라져갔다. 신관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그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민혁은 한숨을 쉬며 침대보를 붙잡고 흐느끼고 있는 샤샤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도 마하자크를 간호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상태였다. 곡기를 끓은 게 벌써 이틀 째 였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그녀도 위험한 상황, 그 때 꼼짝도 하지 않던 마하자크의 몸이 움직였다. 그는 마치 눈을 반개하듯 뜨고 손을 들어 샤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 아버지...?!”
자상한 그의 손길에 샤샤는 얼굴이 눈물로 엉망인 것도 까먹고 고개를 들어 마하자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그는 다정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평소의 아버지였다. 샤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하자크는 두 팔을 벌려 그녀에게 안기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샤샤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매달렸다.
“아, 아버지!..아버지 아버지!...아버지!”
그녀는 눈물을 허공에 흩뿌리며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허허 말만한 처자가...”
마하자크는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의 품에 안긴 딸의 가녀린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언제나 강한 척만 하던 아이다. 가진 바 재능이 마법과 다르고, 검의 길과는 달라 항상 고민하던 아이다. 아버지라는 큰 그림자 아래에서 괴로워하던 아이다. 그럼에도 잘 커주었다. 어느새 자신이 내팽겨쳤던 영지의 내정일을 도맡아 했고 외교관이 되겠다며 제국 아카데미에 들어가 당당히 수석자리까지 따냈다. 정말 자랑스러웠다. 마하자크는 자신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울고 있는 딸의 얼굴을 들어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얼굴이 엉망이구나.”
“아버지...”
그는 콧물과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이리도 아리따운 아가씨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런 딸을 두고 먼저 가야한다는 것이 분했다. 언제까지나 품 안에 두고 살 것만 같았던 아이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을 못 보는 것이 아쉬웠다. 마하자크는 몸에 맴돌던 생기가 점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늘은 야속하게도 그에게 잠시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샤샤의 만류에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침대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청년과 시선을 마주쳤다.
Level: 236
이름: 마하자크 라이너(상태이상: 마나고갈, 탈진)
종족: 인간
경지: 워메이지 7서클 비기너
체력: 0/68881
마나: 0/116980
한편 부녀의 감동적인 해후를 뒤에서 지켜보던 민혁은 속으로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생각했다. 불가능했다. 이미 그의 마나와 체력은 0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회광반조인가. 아니면 애끓는 부정이 만들어낸 기적인가. 불현 듯 시선이 마하자크와 마주쳤다.
“이보게 은공.”
“아....네!”
마하자크는 그를 불렀고, 민혁은 잠시 멍을 때리다 그가 부르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하자크는 샤샤의 부축을 받으며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는 민혁을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 했다.
“이리 앉게.”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의자, 마하자크는 민혁을 그곳에 앉혔다. 그리고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부담이 되어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묘한 분위기에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 아버지 뭐하시는 거에요!”
“허허 내 미래 사위 얼굴 보는 것도 잘못인 것이냐.”
“저, 정말 아니에요 아버지!”
어색해진 공기, 자칫 무례하다고 볼 수도 있는 마하자크의 행동에 샤샤가 나서 그를 만류했다. 마하자크는 헛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을 노려보는 딸을 바라보았다. 샤샤가 사랑하는 사람은 역시 이 남자였다. 의식을 회복한 후 샤샤가 그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채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하니 약간 슬펐다.
‘흐음 벌써 여자가 3명이라... 녀석 힘들겠구먼.....’
그에게 있어 민혁은 은공이기도 했지만 딸을 채간 도둑놈이기도 했다. 게다가 분위기를 봐서 뒤쪽의 아리따운 여성진들은 이미 그에게 푹 빠진 것으로 보였다. 한 명 한 명이 샤샤보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딸, 하지만 마하자크는 그녀의 선택을 반대할 수 없었다. 사랑은 그 누가 뭐라 한다고 해서 쉽게 감정이 식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하자크는 자신이 이상한 행동을 더 취할까봐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딸을 한 번 흘깃 봤다. 생각 같아서는 곁에 남아 연애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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