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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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을 태우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는 입을 꽉 깨물고, 천천히 강가로 들어갔다. 그러자 물과 닿은 그의 몸이 부글부글 기포로 변하기 시작했다. 플래시봄의 체액, 그가 방금 전 마신 약의 정체였다. 슬라임 퇴치에 많이 쓰이는 것으로 물에 닿으면 산화 작용을 일으키는 약이었다. 집사는 온 몸이 녹는 고통 속에서도 웃었다. 샤샤가 자신을 찾을 수 없도록 혹은 시체를 찾더라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 볼 수 없기를 바랬다. 그래야 그녀가 덜 슬퍼할 테니까.
“아가씨..샤샤...나의 귀여운 아기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인어 공주처럼 기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강가에 둥둥 떠 있는 뼈와 주인 잃은 옷 조각뿐이었다.
그 시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샤샤는 연설 준비에 바빴다. 이미 영주민들은 연병장에 구름처럼 모여든 상황이었고, 공사현장에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도 귀환해 그녀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샤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럴 때 아버지가 옆에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의식을 회복한 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오늘 영주민들에게 할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긴장되십니까?”
다가오는 시간, 계속 전전긍긍하던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민혁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네..조금요..”
민혁의 질문에 샤샤는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모습에 그는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뒤에 서 있던 하울과 티샤는 마치 흉신악살과도 같은 표정을 내보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영지민들도 샤샤님의 괴로운 선택에 대해 이해해줄 겁니다.”
그는 위로의 말을 건내 면서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과를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 되었다. 그녀가 사과해야할 것은 거짓말을 해 속은 영주민들이 아니라 일방적인 피해를 당한 이종족들이었다. 영주민들이야 자신들에게 피해는 없으니 죄책감을 제외하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어나가거나 노예나 성욕처리기구가 된 이 종족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에는 그녀가 아직 어렸다.
“네... 정말 고마워요..민혁님..”
게다가 샤샤는 공략 대상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여자, 아리나와 함께 오늘 샤샤의 연설을 도와줄 리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굳이 진실을 들춰내 그녀의 호감도를 떨어트리고 싶진 않았다. 이윽고 때가 왔다. 샤샤는 마지막으로 참 마법을 본인에게 걸었다. 영주민들에게 조금의 호감이라도 더 얻기 위한 작은 속임수였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영주님이다!”
그녀가 성벽에 모습을 드러내자 백성들은 모두 환호했다. 기사들과 병사들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샤샤는 그들의 환호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미안함이 앞섰다. 그녀는 자신에게 한 가지 더 마법을 걸었다. 목소리 증폭 마법이었다. 이것이라면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잘 전달될 것이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순간 장 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같은 귀족도 아닌 평민들에게 영주가 머리를 숙였다.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 얼어붙었다. 샤샤도 자신의 행동이 다소 지나쳤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 때 시기적절하게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샤샤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민혁님....”
그는 히죽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것은 전염병처럼 기사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병사들 마침내는 영지민들도 박수 세례로 그녀에게 환호를 보내주었다. 샤샤는 도움을 준 민혁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바로 잡았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18살 먹은 소녀 같은 모습의 샤샤가 아니었다. 민혁이 처음 만났을 때의 능구렁이 같고 냉철한 모습의 그녀가 되었다.
“여러분...저는 오늘 제가 저지른 한 가지 죄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그녀는 평탄한 어조로 그동안 마하자크와 황가 그리고 이종족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개중에는 샤샤를 보며 혀를 차고 등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허나 연병장을 떠난 이들은 없었다.
“....모두 아둔한 제 책임입니다. 여러분을 속인 죄... 그리고 죄 없는 이종족 분들을 공포와 고통에 빠트린 죄.”
그 말을 끝으로 샤샤는 무릎을 꿇었다. 연병장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영주민들은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피해를 본 것이 없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녀의 잘못이 그리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영웅의 딸이 무릎을 꿇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백성들의 외침에도 샤샤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 모여 있던 백성들이 마치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 속을 뚫고 나오는 건 두 명의 엘프였다.
“노예들이 탈출했다!”
그 순간 민중들 속에서 이와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영지민들은 자신이 소리친 것이 아닌데도 얼굴이 빨개졌다. 이미 샤샤에게 진실을 들은 이후임에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그들 또한 똑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자신들이 벌인 일에 대한 죄책감과 머릿속에 박힌 고정 관념 때문에 괴로워할 동안 그녀들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제지 없이 샤샤가 무릎 꿇고 있는 성벽을 향해 올라갔다.
“샤샤 라이너....”
작은 키의 엘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샤샤는 고개를 살짝 올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은발로 밝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귀족 영애들이나 입는 드레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해주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잘려져 나가 뭉툭해진 귀가 옥에 티였다. 샤샤는 시선은 잠시 귀로 향해 있다가 다시 땅바닥으로 내려갔다.
‘이익...!’
엘프, 리나는 자신을 동정 섞인 눈빛으로 쳐다본 샤샤를 지금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만약 지금 품에 숨긴 단검으로 그녀의 목을 찌른다면 시원할 것이다. 부모님의 복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아마 병사들의 손에 잡혀 갈갈이 찢길 것이다. 아니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민혁에게 미움을 받을까봐. 그것이 무서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에게마저 버림받는다면 자신은 정말 이 세상에서 고립되어버리니까.
“샤샤...라이너..저는 아니 우리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내뱉으며 문장을 완성시켰다. 뒤에서는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 인간들의 환호성을 들려왔고 앞에서는 원망스러운 부모님의 원수가 보기 흉한 눈물을 짜내고 있었다. 리나는 순간 품에서 단검을 꺼내려 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아리나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포근한 품, 눈물이 흘렀다. 억울함에 속상함에 힘이 없는 자신이 미웠다. 한편으로는 이 포근함과 맞은편에서 자신을 보며 박수를 쳐주는 민혁의 모습에 한 없이 기뻤다.
‘어째서 세상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세상은 왜 이리도 불 공편한지.
샤샤 라이너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할 때, 경비대장 제임스는 연병장 한 모퉁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짝 다리를 짚고 다리를 정신없이 떨고 있었다. 무언가 매우 불안해보였다.
‘지금 가서 모든 걸 털어 놓는 다면 날 용서해주실까?’
그는 샤샤가 무릎을 꿇자 매우 놀랐다. 귀족이란 오만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것은 전 영주인 마하자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웅이었으나 좋게 말해 호색한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난봉꾼이었다. 그런데 그 딸은 지금 영지민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있는 죄를 모두 토설한다면 살 수 있을까. 대답은 NO였다.
‘내 죄는 너무나 크다...아무리 영주님이라도 용서해주실 리가 없어...게다가 그 누구도 내가 한 일을 모르고 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자칫 불똥이 잘못 튀기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이다. 집에는 토끼 같은 자식들과 곰 같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정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전 영주 마하자크였다. 제임스는 황가 그리고 필라스크와 손을 잡고 그를 배신했다. 하지만 직접 독을 타거나 감옥을 관리한 것은 아니다. 그저 독을 마신 그를 황궁에서 나온 기사와 한 침대에서 엉키게 만들었을 뿐이다.
“참 잘 컸지. 안 그런가?”
“누구냐!”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임스는 얼른 무기를 빼들고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로브를 입은 정체불명의 괴한이 서 있었다. 제임스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건물들 사이의 그림자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검을 괴한에게 겨눈 상태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괴한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자신이 기척을 못 느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허허 검을 겨누다니.... 경비대장 혹 내 목소리도 잊은 겐가”
경비대장 제임스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 그것을 본 괴한은 껄껄 웃으며 그림자를 벗어나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양지로 나왔다.
“...영,영주님...!”
햇볕이 그의 얼굴을 비췄고, 경비대장 제임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뭐가 그리 불안해서 떨고 있나 내가 못 올 때라도 온 겐가. 그러지 말고 이리와서 내 질문에나 대답해 보게 참 잘 컸지 안 그런가?”
마하자크는 천천히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는 샤샤가 무릎 꿇고 있는 성벽이 잘 보이는 위치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얼음처럼 얼어붙어 있는 제임스를 불렀다. 마하자크의 부름에 그는 등 뒤에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이 전 영주를 배신하기 전 보여주었던 한 없이 따뜻했던 그 눈빛이었다. 제임스는 약간 안심을 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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