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전초
* * *
그 말을 끝으로 맥컬킨은 필라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붙자 기사단들도 각자 애병을 뽑고 달려들었다. 개개인의 실력은 황실기사단이 높았지만 연계 전술은 라이너 기사단이 한 수 위였다. 게다가 라이너 기사단은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었다. 바로 궁기사의 존재였다. 그들은 라이너 기사단과 황실기사단의 결투가 심화되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모두 갑옷에 마나를 둘러라!”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던 필라스크는 부하들에게 경고를 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였다. 그들이 쏜 화살은 놀랍게도 명궁들도 뚫기 힘들다는 판금 갑옷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화살에 맞은 기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기사단의 싸움에서 우세를 점하자 영지군의 기세는 더욱 더 높아졌다. 필라스크는 이를 갈았다. 이미 기사단 수는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병사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네놈은 끝까지 날 방해 하는구나”
의미심장한 필라스크의 말, 맥컬킨은 무슨 뜻이냐며 묻고 싶었지만 그가 검을 휘두르자 궁금증을 뒤로하고 창대를 휘둘렀다. 금속성이 울려 퍼졌고, 목숨을 건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막아라 막아!”
필라스크에게 모든 것을 건 칼립소는 필사적이었다. 그는 분주히 전장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목을 땄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매우 불리해진 상태였다.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때 그의 시야로 지금의 전투와는 상관없을 법한 아리따운 여인 한 명이 들어왔다. 그녀는 주위에 기사 두어 명을 데리고 있었다. 칼립소는 살기 가득한 눈동자를 반짝였다. 순간 이 전투에서 승리할 방법이 보였다. 그는 달려드는 영지군을 부하들에게 맡긴 후 양피지를 꺼내 찢었다.
펑
작은 폭발음과 함께 그의 몸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못했다. 그렇게 전투는 막바지를 향해 나아갔다.
서걱
“으악!”
비명과 함께 바닥에 뒹구는 주인 잃은 머리, 그것을 마지막으로 필라스크군의 마지막 기사가 쓰러졌다. 병사들은 어느 정도 수를 보존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겁에 질려 무기를 손에서 놓은 상태였다. 필라스크는 배에 난 자상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이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라이너 영주 또한 어느새 나와 자신의 최후를 지켜 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무하구나..”
문득 웃음이 입가를 타고 세어 나왔다. 영지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아버지를 배신했을 때부터 일을 그릇친 것일까. 아니면 그 작은 이종족 아이를 가지고 싶어 뒷 공작을 벌인 것에 대한 천벌을 받는 것일까. 어느 쪽이던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누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필라스크는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슬퍼하고 있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 우는 거요.”
그의 질문에 라이너 영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필라스크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바보 같이 눈물만 흘리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등짝을 보니 화살이 4대나 박혀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화살대를 부러트렸다. 온 몸이 욱씬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챙
“......”
그의 발 앞으로 한 자루 창이 꽂혔다. 필라스크는 감히 자신이 가는 길에 창을 내던진 범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올렸다. 그곳에는 맥컬킨이 입을 꼭 다물고 서 있었다. 필라스크는 얼굴을 찌푸렸다. 끝까지 자신이 가는 길을 방해하다니 정말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를 혼낼 힘도 자신의 몸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인 것 같았다. 필라스크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곤 아직도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는 라이너 영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깨어나거든 전해라... 미안했다고.....”
라이너 영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볼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네가 한 것이 아니다 말하라고 그를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영주였고, 그는 배신자였다. 어렸을 적부터 나온 배는 달랐어도 친밀했다. 누이, 동생하며 서로를 아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아마 아버지가 자신을 다음 영주로 선택했을 때 일까. 아니면 기사단장 자리에서 퇴출당했을 때일까.
후회가 앞섰다. 그 때 조금만 그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과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 아플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선택 해야만 했다.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아 있었다. 기사들 또한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꼬옥 감았다. 그리고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반역자를 처형하세요.”
전투에 참여한 모든 이들 앞에서의 처형이다. 이는 이후 병사들의 충성도 그리고 기사들의 사기와도 연결될 좋은 선택이었다. 처형을 하기 위해 나선 것은 맥컬킨이었다. 그는 부장의 검을 빌려 그에게 다가갔다. 자신을 황천으로 인도해줄 사자의 발걸음에도 필라스크는 꿈쩍도 하지 않고 라이너 영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남길 말은?”
맥컬킨은 자신의 스승이자 이제는 바닥까지 떨어진 이 남자를 위해 마지막 자비를 내려주었다. 그에 필라스크는 피식 웃더니 아직도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는 라이너 영주를 보며 말했다.
“울지말아라...그리고 아버지에게 한 마디 더 전해라. 결국 옳은 결정을 한 것은 내가 될 것이라고...”
서걱
우와아아아아아
그 말을 끝으로 필라스크는 침묵을 지켰고, 맥컬킨은 그의 목을 베었다.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피분수에 병사들은 무기를 하늘 높이 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기사들은 눈을 감고 자신의 얼굴에 튀긴 필라스크의 피조차 닦지 않고 있는 기사단장을 챙겨 영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모두 죽고 이미 항복한 필라스크군과 칼립소의 부하들은 밧줄로 포박당해 무릎이 꿇려졌고, 적군의 시체는 한곳에 모여 불태워졌다.
라이너 영주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었다. 도저히 그의 마지막을 볼 자신이 없었다. 평소 그에 말 따라 자신은 똑똑한 척 하는 겁쟁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지금은 싸늘한 시체로 변한 그를 바라보려 했다. 그 순간 시야에 검정 그림자가 나타났다. 라이너 영주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건장한 남성의 손이 자신의 목과 입을 틀어막았다.
“읍..으으읍!”
“영주님!”
“누구냐!”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은 깜짝 놀라 검을 뽑아들고 남자를 향해 겨누었다. 그는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몸은 보였지만 얼굴이 검정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너희 영주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있어!”
라이너 영주를 포로로 잡은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검정색 안개에 쌓여 있던 얼굴에서 입 모양이 드러났다. 주변 기사들은 그가 마법사라 생각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굴렀다. 맥컬킨도 상황을 파악하고 얼른 영주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전 주인도 지키지 못했고, 그 분의 아들 또한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섬기는 주인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진정하고...영주님을 풀어줘. 너를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만 1천이다. 게다가 너희 우두머리는 이미 죽었다!”
그는 양손을 벌리고 남자를 진정시키며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그에 남자는 라이너 영주를 조르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맥컬킨은 갑작스러운 남자의 행동에 얼어붙어 더 이상 발을 떼지 못했다. 그건 남자의 머리를 조준하고 있던 궁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히죽 웃으며,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물컹
“...꺄읏...!”
“창녀촌의 여자들과는 역시 맛이 다르군 아주 좋아!”
만져진 것은 라이너 영주의 풍만한 가슴이었다. 남자는 입꼬리가 찢어질 듯 웃으며 어린 아이가 찰흙 놀이를 하듯 그녀의 가슴을 옷 너머로 희롱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외간 남자의 접촉에 깜짝 놀라 비명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에 남자는 흥분한 듯 노골적으로 젖가슴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수치심이 온 몸을 타고 올라왔다. 자신의 기사들 병사들 앞에서 희롱을 당하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이놈! 뭐하는 짓이냐!!”
흥분한 건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들과 맥컬킨은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워워 진정해 니가 다가오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고 큭큭”
“빨리 그 손을 떼고 원하는 걸 말해라! 당장!”
맥컬킨의 말에도 남자는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유륜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젖꼭지 부근을 지분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벌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던 라이너 영주의 양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남자는 얼른 그녀의 목을 틀어버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빛은 시릴 것만 같은 한기를 뿌리며 남자를 꽁꽁 얼리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