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 전초
* * *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어요. 그 많던 기사들도 함께 말이죠.....그리고 전 포기했어요... 7서클의 초인이라고 해도... 감옥에 갇혀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지 벌써 6개월째에요....흐윽...지금 쯤 아버지는....”
이야기 하던 도중 북받쳤는지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무릎사이로 푹 숙여버리는 라이너 영주, 민혁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 그녀의 말 중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아니 당연한 것이었다. 과연 인간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6개월을 버틸 수 있을까? 그건 초인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하지만 라이너 전 영주는 탈진과 영양실조 상태이긴 했지만 6개월을 버텨냈다. 그 말은 곧 영주 몰래 감옥에 드나들며 그를 돌봐준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6서클 마법사가 풀지 못한 마법을 뚫고 감옥에 들어가서 말이다. 민혁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열쇠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았다.
라이너 성 지하감옥 26번방의 열쇠 1/2
본래는 리나의 아버지가 소지하고 있던 것이다. 두 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만 있더라도 문을 열 수 있다. 본래 영주성 지하 감옥의 옥지기로 일하던 그는 병사들에게 잡히기 전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열쇠를 리나에게 전해주었다.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당신이 용기 있고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는 자라면 라이너 영주성 지하감옥 26번방을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열쇠 하나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아마도 그것을 소지 하고 있는 자가 마하자크를 보살핀 이일 것이다. 혹은 의도는 모르겠으나 전 영주를 그 어두운 26번방에 가둔 범인일 수도 있다. 민혁은 여전히 소리 죽여 울고 있는 라이너 영주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모든 것을 말했을 때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 연기를 하며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혁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일단 마하자크를 보여준 후에 반응을 보는 게 좋겠어...“
민혁은 울고 있는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갑작스러운 그의 손길에 라이너 영주는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지탱해주는 이 믿음직함이 나쁘지 않다 여겼다. 민혁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모른 채 그녀를 부축해 밖으로 데려갔다. 라이너 영주는 그가 자신을 밖으로 데려나가자 바람이라도 쐬려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가 향하는 방향이 자신이 그에게 배치해준 방임을 깨달았을 때는 얼굴이 새빨개져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속, 속옷은 예쁜 거였나?!’
그녀는 자신의 속옷차림을 떠올려보았다. 검정색 란제리에 리본무늬가 첨가된 것이었다. 첫날밤, 남자를 유혹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차리자 지금 이라도 당장 거부해야.....’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오히려 찰싹 달라붙어 그에게 지탱되어 발을 옮길 뿐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민혁의 방 문 앞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꿀꺽
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경험이 많은 남자는 다르다는 걸까. 여유가 넘치는 것 같았다. 라이너 영주는 그것이 불만이었고, 그것을 불만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감정이 자신에게 불필요 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영주님?”
“네..넵?!”
지금도 그녀답지 않았다. 품위에 어긋나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다니 라이너 영주는 더욱 더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민혁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밀었다. 그녀는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몸은 그의 손에 이끌려 방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눈이라도 감아보자는 생각으로 라이너 영주는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영주님 눈을 떠주세요”
“저,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벌벌 떨며 말하는 라이너 영주, 민혁은 그녀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하울과 아리나 그리고 티샤는 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민혁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등을 떠밀어 전 영주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해 안내했다. 라이너 영주는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도 그의 안내에 순응했다.
“이제 눈을 떠도 됩니다.”
“아..그...저 그래도...이런 건 순서를 차례대로 지나야 해요..그리고 에..또...맞아요! 서로 씻어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그녀는 뜨라는 눈은 꼬옥 감은 채 횡설수설 말을 이어갔다. 민혁은 피식 웃더니 라이너 영주의 얼굴을 고정 시키고 귀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그녀는 간지러운지 고개를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눈을 살짝 떴다. 그러자 그곳에는 너무나 그리웠던 얼굴이 있었다. 마르고 왜소해졌지만 그 얼굴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게....어떻게 된......”
그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라이너 영주는 정말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이 그리워하던 아버지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리고 마침내 손이 그에게로 닿으려는 순간, 하울이 제지했다. 라이너 영주는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행동을 막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감히...어디서...”
순간 하울의 드래곤 피어가 그녀를 덮쳤다. 무형의 기운에 라이너 영주는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이며 겁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민혁은 그녀의 딱한 모습에 앞으로 나서서 하울의 피어를 막아주었다. 그러자 하울은 민혁을 노려보았다.
“너....당장 비켜....”
“어휴...유치하게 그럴래 그만하고 나와. 저주에 걸렸었다고 해도 이제 풀렸잖아 가까이가면 감염될 위험이 있다고 해도 그건 라이너 영주님이 선택할 문제야”
민혁의 말은 정론이었다. 하울은 이를 악물면서 드래곤 피어를 지웠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라이너 영주는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일어났다. 마음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 한 저 여자를 벌하고 싶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녀가 위험한 인물, 자신이 손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차마 하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네....괜,괜찮아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걱정스럽게 자신의 안부를 물어오는 민혁에게 안기는 것뿐이었다. 덕분에 지켜보고 있던 아리나와 티샤와 눈빛도 덩달아 무서워졌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있는 라이너 영주에게 그것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아버지......”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마하자크에게로 향해 있었다. 손을 가까이 가져갔지만 차마 용기가 없어 그를 만질 수가 없었다. 라이너 영주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 상황 자체가 불합리 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품 안에 그를 안았다.
“...살아....있어요....”
라이너 영주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포기 했었다. 솔직히 말해 인간이 어떻게 6개월이나 굶주림을 참고 견딘단 말인가. 하지만 마하자크는 그걸 해냈다. 민혁은 그녀의 뒤에 서서 라이너 영주가 전 영주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하자크를 가둬놓은 용의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그녀가 말한 엔서린이라는 자가 분명했다. 아마 그녀가 영지에 숨어서 마하자크를 관리 하고 있었던 거겠지.그렇다면 이제 그 이유를 알아야 할 시간이다. 마하자크는 제국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자, 황가에서는 그를 제압해 제 살을 깎아 먹었다. 그것도 7서클 마법사를 제압할 만한 고수를 써서 말이다. 괜히 그런 짓을 벌였을 리는 만무했다. 무언가 단서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된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발견 당시에 탈진만 있었을 뿐 나머지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어요...아무래도 따로 전 영주님을 돌보던 분이 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민한 라이너 영주는 민혁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그녀는 마하자크의 자세를 한차례 매만졌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밖에 사람을 불렀다. 방금 전 민혁과 마주쳤던 시종이었다. 그녀는 시종에게 일러 경비대장과 기사단장을 호출했다. 제임스와 맥컬킨이었다. 두 사람은 라이너 영주를 제외하고 영지 내에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제임스는 민혁과도 구면이었고, 맥컬킨은 다부진 체격의 호탕한 얼굴을 한 기사였는데 그들은 바짝 마른 전 영주를 발견하고 몹시 놀란 얼굴 표정을 지었다.
“영주님!”
맥컬킨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 또한 전 영주의 손에 재능을 꽃피워 소드마스터라는 지고의 경지에 오른 평민 출신 기사였다. 반면 경비대장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뜬 상태였는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두 사람은 잘 들으세요. 지금 당장 신속히 병력들을 끌어 모아 다시 한 번 영지를 수색해 수상한 자들은 모두 잡아들이세요. 아버지...아니 전 영주님을 가둬 놓은 자들이 탈출한 영주님을 찾아 해매고 있을 겁니다. 그들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라이너 영주의 기백 넘치는 명령에 맥컬킨은 호탕하게 대답하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들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경비대장 제임스도 침중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민혁은 제임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별 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혹시 황가와 최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빠져나가고, 민혁은 담아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 * *